■ 선생님과 아빠
어느 초등학생 소녀가 학교에 가자마자 담임 선생님께 길에서 주워온 야생화를 내밀며 이 꽃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꽃을 한참 보시더니 말했습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선생님도 잘 모르겠는데 내일 알아보고 알려줄게.” 선생님의 말에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에 모르는 게 없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주운 꽃인데 이 꽃 이름이 뭐예요? 우리 학교 담임 선생님도 모른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런데 소녀는 오늘 두 번이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믿었던 아빠도 꽃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녀의 아빠는 식물학을 전공으로 대학에서 강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소녀를 담임 선생님이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어제 질문한 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소녀는 아빠도 모르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알려준 선생님이 역시 대단하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젯밤 소녀의 아빠가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그 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그 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딸이 어린 마음에 선생님께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따뜻한 편지(1023호)
■ 인사와 웃음이 구해준 생명
오래 전 어느 냉동식품 가공공장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어느 날 냉동공장의 냉동고 안에서 일을 하던 한 여직원이 냉동고 문이 갑자기 저절로 닫히면서 냉동고에 갖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냉동고가 워낙 클 뿐만 아니라 안에서는 열 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냉동고 밖에까지 들릴 리도 없었고, 몇 시간째 갖혀있다 보니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하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냉동고 문 쪽으로 한 줄기 생명의 빛이 스며들었다.
경비원 노인이었다. 경비원은 왜 직원들이 다 퇴근해 버린 그 늦은 시간에 냉동고 문을 열게 되었을까. 사연은 이랬다.
이 여직원은 출·퇴근할 때마다 항상 경비원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다른 직원들은 경비원을 무시하거나 본체만체했지만 이 여직원만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늘 친절하게 인사를 하니 경비원은 그저 고맙기만 했고 또 그 여직원이 출·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리기까지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직원들은 다 퇴근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여직원이 퇴근을 하지 않는 거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침에 분명히 출근하면서 인사를 했는데. 거기에 생각이 머물자 경비원은 회사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냉동고 문까지 열어보게 된 것이다.
“내가 이 공장에서 23년을 근무했는데 출퇴근할 때마다 밝게 인사 건네는 직원은 아가씨뿐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퇴근 인사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지요.”라고 말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 여직원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은 출·퇴근 때마다 경비원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여직원이 평소에 쌓아놓은 친절이 위기의 순간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친절을 베푼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친절이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여기 이런 경우처럼.
■ 새엄마와 내복 세 벌
내가 열두 살이 되던 이른 봄, 엄마는 나와 오빠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당시 중학생인 오빠와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아빠에게 부탁한다며 눈물짓던 마지막 길..
남겨진 건 엄마에 대한 추억과 사진 한 장. 엄마는 사진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몫까지 채워가며 우리 남매를 길러야만 했다.
그게 힘겨워서였을까? 중학생이 되던 해 여름. 아빠는 새엄마를 집으로 데려왔다.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말씀을 우리 남매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생전처음 겪어보는 아빠의 매 타작이 시작되었고, 오빠는 어색하게 “엄마”라고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난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왠지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돌아가신 진짜 엄마는 영영 우리들 곁을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으로 피 멍이 들수록 난 입을 앙다물었다.
새엄마의 말림으로 인해 매 타작은 끝이 났지만, 가슴엔 어느새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새엄마를 더 미워하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내방에 있던 엄마 사진을 아빠가 버린다고 가져가 버린 것이다. 엄마 사진 때문에 내가 새엄마를 더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부터 새엄마에 대한 나의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새엄마는 분명 착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 만큼 강렬했다. 난 언제나 새엄마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 해 가을 소풍날이었다. 학교근처 계곡으로 소풍을 갔지만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다. 소풍이라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되고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 계곡 아래쪽을 서성이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새엄마가 들어왔다. 손에는 김밥도시락이 들려있었다. 뒤늦게 이웃집 정미 엄마한테서 소풍이라고 전해 듣고 도시락을 싸오신 모양이었다.
난 도시락을 건네받아 새엄마가 보는 앞에서 계곡물에 쏟아버렸다. 뒤돌아 뛰어가다 돌아보니 새엄마는 손수건을 눈 아래 갖다 대고 있었다. 얼핏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증오와 미움 속에 중학시절을 보내고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입 진학상담을 해야 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담임선생님 말씀대로 가까운 인근의 인문고 진학을 원하셨지만, 난 산업체 학교를 고집하였다.
새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산업체 학교에 원서를 냈고 12월이 끝나갈 무렵 경기도에 있는 그 산업체로 취업을 나가기로 결정됐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 가방을 꾸리는데 새엄마가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정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경기도에 도착해서도 보름이 넘도록 집에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산업체 공장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낯섦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옷 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맨 아래 검은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누군가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투. 봉투 속에는 양말과 속옷 두벌 그리고 핑크빛 내복 한 벌이 들어있었다. 편지도 있었다. 가지런한 글씨체.. 새엄마였다.
두 번을 접은 편지지 안에는 놀랍게도 아빠가 가져간 엄마사진이 들어있었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엄마사진을 간직했다가 편지지속에 넣어서 내게 준 것이다. 이제껏 독하게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눈물에 씻겨 내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그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첫 월급을 타고 일요일이 되자 난 홍천행 버스를 탔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려 들판에 쌓여있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내복. 새엄마 아니 엄마는 동구 밖에 나와 날 기다리고 계셨다.
빗자루가 손에 들린 엄마 뒤에는 훤하게 아주 훤하게 쓸린 눈길이 있었다. “새엄마.. 그 동안 속 많이 상하셨죠? 이제부턴 이 내복처럼 따뜻하게 엄마로 모실게요.” 아직도 말로 못하고 속말만 웅얼거리는 나를, 어느새 엄마의 따뜻한 두 팔이 감싸 안고 있었다.
[출처] 좋은생각
/ 2021.02.22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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