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버스의 기다림
아주 오래 전, 어느 시골길 허름한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에서는 한번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그런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 앞에 군인이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도 아닌데 기사님은 흔쾌히 버스를 세워 군인을 태웠고 승객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에 달궈질 대로 달궈져 찜통 같은 버스가 다시 출발해야 하는데 버스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더위에 슬슬 짜증이 난 승객들은 버스기사에게 출발하자고 재촉했지만 버스기사는 “저기...” 하며 눈으로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모두가 버스기사의 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는데, 한 여인이 버스를 향해 열심히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여인은 어린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뛰어오는데, 버스가 출발하면 얼마나 허망할까 하는 생각에 승객들은 여인을 기다려 주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그 시절 버스에서 땀을 흘리는 승객들은 손부채를 흔들면서 아무 불평 없이 여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길 몇 분 후, 여인이 도착했는데 여인은 버스에 타지 않고 버스 창문만 물끄러미 계속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타라고 말했지만, 여인은 버스에 오르지 않고 창문을 통해 먼저 탄 군인에게 말했습니다.
“가족 걱정하지 말고 몸성히 잘 다녀오세요.”
아쉬움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담긴 여인의 말에 군인도 답했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힘들게 여기까지 왜 왔어. 걱정하지 말고, 내 건강히 잘 다녀올 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객들은 아무도 불평도 짜증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따뜻한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출처] 따뜻한 편지 1426호
■ 저기, 우리 어머니가 오십니다
오래 전 시외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버스기사가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던 순간, 승객 한 사람이 버스를 향해 걸어오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기사님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할머니 한 분이 못 타셨는데요?”
한 승객의 큰 소리에 버스에 탄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에서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짐을 한 가득 인 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버스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나이와 큰 짐 탓인지 속도가 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어서 출발합시다.”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일부 승객들이 바쁘다며 그냥 출발하자고 재촉했습니다. 그때 버스기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기, 우리 어머니가 오십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가시지요. 죄송합니다.”
버스기사의 어머님이라 하니 승객들도 더 이상 그냥 가자는 재촉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가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승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버스 밖으로 모아졌습니다.
할머니가 이고 있던 짐을 받아 드는 청년, 할머니의 손을 부축하여 잰걸음으로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와 청년이 버스에 오르는 순간, 승객 중 누군가가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자 마치 전염된 듯 너나 없는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할머니는 버스 기사의 어머니도, 청년의 어머니도 아니었습니다.
■ 어느 병원장의 일기
아침 8시 30분 쯤 되었을까? 유난히 바쁜 어느 날 아침, 80대의 노인이 엄지손가락 꿰맨 곳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의 바이털 사인을 첵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초조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행히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 상태를 물으니,
노신사는 “아내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요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르신이 약속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물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내는 나를 몰라보지만, 나는 아내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사랑의 참된 모습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 자식을 믿어주고 밀어주는 아버지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출처] 박찬석 전 경북대학교 총장의 글
■ 마지막 선물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명희씨는 모 일간지에 연재한 글에서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퇴원을 고집하고 집에 와 누우신 아버지는 당신이 평생 누워 살았던 그 집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셨다. 그러고는 혼자 독백하시듯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겨우… 겨우… 요걸 살다가려고. 겨우, 요거 살다가는 것을 그렇게 내가 가족들 힘들게 하고 아등바등했구나….” 이것이, 내가 마지막 들은 아버지 육성이었다.》
혹시 나는 그토록 소중한 오늘을 살면서 겨우 한다는 짓이 남들 힘들게나 하고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었다. 문득 어느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어떤 간호사의 글이 떠올랐다.
저는 암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어느 날 야간 근무를 하는 중에 생긴 일입니다. 새벽 5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호출 벨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에게 말 못할 급한 일이 생겼나 싶어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된 입원 환자였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간호사님, 미안한데 이것 좀 깎아 줄래요.”
그 남자는 저에게 사과 한 개를 쓱 내미는 것입니다. 황급한 마음에 달려왔는데 겨우 사과를 깎아달라니...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옆에선 남자를 간호하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건 보호자에게 부탁해도 되는 건데요?”
“미안한데 이번만 부탁하니 깎아 줘요.”
화가 났지만, 다른 환자들이 깰까 봐 사과를 깎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번에는 먹기 좋게 잘라달라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 시간이라 피곤함까지 함께 몰려오는데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환자가 못마땅해서 조금은 귀찮은 표정으로 사과를 대충 잘라 침대에 놓아두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성의 없게 깎은 사과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환자는 계속 아쉬운 표정으로 사과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 환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뒤 남자의 아내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사실 그 날 새벽 사과를 깎아 주셨을 때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선물이라며 깎은 사과를 저에게 주더군요. 그 날이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거든요. 제가 사과를 참 좋아하는데, 남편은 손에 힘이 없어 사과를 깎지 못해 간호사님께 부탁했던 거랍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던 남편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죄송한 마음이 너무나 컸지만,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 날 사과를 깎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새벽 가슴 아픈 사랑 앞에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지.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 전부였던 그들의 고된 삶을 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한없이 인색했던 저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며 말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편하게 떠날 수 있게 해 줘서...”
ㅡ 따뜻한 편지 1032호
소중한 오늘을 살면서 김명희 시인의 아버지 말씀처럼 아등바등 살지 말고 남 힘들게 살지는 말아야 겠다. 그리고 간호사의 글에서처럼 주변 사람들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작은 배려도 실천하면서 성심을 다해 살아야겠다. 그리고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출처] 블로그 '노루굴 이야기' 中에서
/ 2021.02.21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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