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2020.12.29)

푸레택 2020. 12. 29. 11:48

■ 식민지의 국어시간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ㅡ 시집 『땅의 연가』(창비, 1981)

 

youtu.be/jT69MF3Z8X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