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내 소년 시절과 소', '적성산의 한여름 밤' 김환태.. '무주, 그리고 최북과 김환태' 방민호 (2020.12.26)

푸레택 2020. 12. 26. 16:21

 

 

■ 내 소년 시절과 소 / 김환태(金煥泰)

내 마음의 이니스프리에는 소가 산다. 이리하여 네거리 아스팔트 위에서나 철근 빌딩 밑에서 바위 그림자와 같은 이니스프리의 향수에 엄습할 때면 나는 내 마음 심지에 '못 가장자리를 핥는 잔물결 소리' 외에, 또 골짝을 울리는 해설픈 소울음을 듣는다. 소가 사는 내 이니스프리의 경개(景槪) 는 이렇다. 사방을 산이 빽 둘러쌌다. 시내가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흘러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넘는 강선대 밑에 휘돌아 나간다.

봄에는 남산에 진달래가 곱고, 여름에는 시냇가 버드나무숲이 깊고, 가을이면 멀리 적상산에 새빨간 불꽃이 일고, 겨울이면 먼 산새가 동리로 눈보라를 피해 찾아온다. 나는 그 속에 한 소년이었다. 사발중우를 입고, 사철 맨발을 벗고 달음질로만 다녔기 때문에 발가락에 피가 마르는 때가 없었으나 아픈 줄을 몰랐다. 여울에서 징게미 뜨기와 덤불에서 멧새 잡기를 좋아하여 낮에는 늘 산과 내에서만 살았고, 밤에는 씨름판에 가 날을 세웠다.

어떤 날 나는 처음으로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이랴 어저저저" 하며 고삐만 이리저리 채면 그 큰 몸 뚱이를 한 짐승이 내 마음대로 억어(抑禦)되는 것이 나의 자만심을 간지럽혀 주었다. 소가 풀을 으득으득 뜯을 때 그 풀향기가 몹시 좋았다. 산 그림자 속에 풍경소리가 맑았다. 나는 해가 지는 줄 몰랐다. 이웃집 영감님이 재촉하지 않았더라면 밤이 깊은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주 날이 깜깜했다. 모두들 마루에 불을 달아놓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걱정 속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어머님이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무신 어머님의 이빨 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님은 얼굴에 더 노여움을 가장하려고 하시나 밑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길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끝내 웃으시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까지 하셨다. "우리 환태가 인젠 다 컸구나."

머슴은 소고삐를 받아 말뚝에 매놓고는 일어서서 소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석 때리며, "네기랄 것, 이 놈의 소, 오늘 포식했구나. 어떻게 처먹었던지 배지가 장구통 같다." 이렇게 함부로 욕설을 했다. 그러나 소는 이 욕이 만족의 표시인 것을 아는지, 목을 말뚝에 부빌 뿐이었다. 머슴은 다시 기쁨과 부끄럼에 얼굴을 붉히고 섰는 나를 돌아보며 농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작은 머슴 오늘부터 밥 두 그릇씩 주시갸."

이튿날 나는 학교에서 하학을 나오자마자 할머님이, "어린 것이 어느새 어떻게 소를 뜯기려 다니냐."고 말리시는 것도, 동무들이 산으로 새알을 내리러 가자는 것도 봇뜰로 고기를 흝으러 가자는 것도 다 물리치고 또 풀을 뜯기러 나갔다. 강변에서 혼자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고 서서 염불만하고 있던 소는 제 이 작은 주인을 보자 뒷발을 두어 번 하늘로 쳐들고 뛰었다. 이래서 나는 소와 아주 친한 동무가 되었다.

가을이 되자 나는 머슴을 따라다니며 겨울 먹일 소풀을 뜯어 말렸다. 겨울에는 여물을 썰고 소죽을 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첫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날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소를 생각한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
ㅡ (《조공》,3권 1호,1937.1.1)

■ 적성산(赤城山)의 한여름 밤 / 김환태(金煥泰)

우리 고향에서 한 30리 가량 되는 곳에 적성산(赤城山)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산허리가 마치 성벽 같은데, 가을이 되면 그 성벽이 빨갛게 물이 듭니다.그래서 그 이름이 적성산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기도 하다고 하여 적상산(赤裳山)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고향 어린이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다가는 이산을 손가락질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가 나이 들어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하면 마루 끝에 장죽을 물고 앉아 이 산을 바라보며 긴 해를 보냅니다. 노인네들의 대대로 전해 오는 말을 들으면 이 산이 생긴 이후로 아직 한 사람도 그 절벽에서 떨어져 횡사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절벽 웅크리고 있는 맹수들도 이 산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고향 사람들의 이 산에 대한 정감은 마치 어머니에 대한 그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용모와 마음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은 이 산의 정기를 타고 이 산의 애무 속에서 자란 까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나는 큰 괴로움을 안고 고향에 돌아갔었습니다. 예전 놀던 산으로 시냇가로 싸다니었으나 나의 괴로움은 좀처럼 멎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성산에 올라가서 그곳 절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새워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산이 서러운 어린애로 하여금 눈물을 닦고 웃으며 일어서게 하는 그런 어머니의 품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묵은 절 앞 풀밭에 가 누워서 달을 기다렸습니다. 보름달이건만 앞을 가린 봉우리에 스무날 달보다도 늦게 떴습니다. 그러나 그 달은 유독히도 밝았습니다. 그리고 그 달이 그린, 절을 둘러싼 그림자는 호수보다도 깊었습니다. 달빛에 잠기자 뭇 풀벌레 소리는 한층 맑고 높아졌습니다. 나는 그만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심장의 고통도 섞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그곳에 정신을 잃고 누웠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박쥐가 집을 짓고 있는 마당  넓은 나의 방에 돌아온 때는 아마 자정이 훨씬 넘었었을 것입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떡을 해 가지고 오랜만에 찾아 오셨습니다. 나는 설움이 복받쳐서 그 떡에 걸려 그만 잠을 깨었습니다. 보니 달그림자가 창문 끝에 겨우 달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밑에 절에서 새벽 염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 해를 나는 전에 없이 거뜬한 마음으로 맞았습니다.
ㅡ(《조광》, 2권 7호, 1936.7.1)

☆ 작가 소개

김환태(金煥泰): 1909~1944년, 전북 무주(茂朱) 출생. 호는 눌인(訥人). 1916년 무주보통학교에 입학하여1921년 3월 졸업. 1926년 보성고보(普成高普) 2학년에 편입 1928년에 졸업. 편입 당시 보성고보 상급반에 이상(李箱)이 있었고 김상용(金尙鎔)이 교사로 재직 중이었음.

1928년 경도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함. 여기서 정지용(鄭芝溶)을 만나 문학적인 친교를 맺게 됨. 1931년 동지사대학 예과 3년을 수료하고 구주(九州) 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함. 1934년 졸업. 귀국하여 평론가로 활동.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소개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후일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음.

1936년 3월12일 구인회 가입. 이때 동인 박팔양·김상용·이태준·김기림·박태원·이상·김유정 등이었음. 이 무렵 도산 사건에 연류되어 1개월간 동대문 경찰서에 수감됨. 6월 1일 박용철(朴龍喆)의 누이동생 박봉자와 결혼함. 1938년 횡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 교사로 근무함. 1940년 무학여고로 전임함. 1944년 5월 26일 34세로 영면함. 무주군 무주면 당산리에 가족묘지에 안장.

■ [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무주, 그리고 최북과 김환태

아담하고 깨끗한 '원' 무주의 거리
대쪽 같은 예술가 최북 예술혼 느껴

대전 넘어 무주로 가는 길은 양쪽 산으로는 늦가을 녹슨 단풍들 지천이다. 무슨 터널 지나자 ‘추부’ 표지판이 나온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여기서 대전까지 공부하러 다녔다. 올해 벌써 몇 해째 무주던가? 평론가 김환태와 인연을 맺으면서 한 해 꼭 한두 번은 적상산, 덕유산의 이 고장을 찾게 된다.

무주, 하고 혼잣말을 하면 늘 외할아버지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밥상에 반주 한 잔씩은 꼭 곁들이셨는데,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실 때까지 참 시간이 오래도 걸렸다. 돌아가실 때 나는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어서 장례에도 가지 못했다. 한 가닥 위안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무주구천동 보고 싶다 하셔서 어머니와 함께 모시고 다녀온 것이다.

그때 덕유산을 처음으로 만났다. 지금은 스키장이다 뭐다 많이도 변했지만 여름 한철인데도 숲이 깊디깊고 그늘도 깊어 외갓집 뒷마당에서 본 푸른 이끼가 바위들, 나무들을 타오르고 있었다.

‘왜정’ 때는 일본에도 다녀오셨고 해방 후에는 만년 야당이셨던 제주 고씨 탐라 왕국의 먼 후손이신 외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무주를 알고 구천동을 알고 조선 왕조 때 폐비 윤씨 이야기도 일찍부터 알았다. 새벽녘부터 일어나 대빗자루로 넓은 토방을 썩썩 밀어대시며 방학이면 열아홉 외손들 중 늘 몇 명씩은 식객으로 붙어 있는 당신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셨을까.

아침부터 너무 일찍 서두른 탓에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넘게 여유가 있다. 차를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세워 두고 오늘은 아직까지 한 번도 건너가 보지 못한 무주 남대천 건너편으로 ‘시내구경’ 겸 걸어보기로 한다. 저쪽 강원도 남대천과 다른 이곳 남대천은 앞뒤로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긴 다리를 건너자 아담하고도 깨끗한 ‘원’무주의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차들 별로 다니지 않은 작은 거리와 사거리에 없는 것 빼고는 없는 것이 없어, 정형외과도 있고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도 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신호등도 무지하게 큰 것도 달려 있다. 뭣보다 한눈에 롯데리아 가는 사거리 길목에 나지막한 양철 기와지붕 ‘봄에 새싹 조경, 원예, 자재’집. 들어가 구경이라도 할까 하다 말았으나 참 예쁜 것이 이집 담벼락의 아기자기한 그림이다.

창에 한지에 붓으로 일본을 비판해 놓은 글귀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 같은 해바라기 풍경화가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등에 한 마리가 이 그림 해바라기를 진짜로 알고 앉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급기야 살짝 붙어 앉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웃는다.

무주는 일제 때 평론가 김환태와 조선 시대 화가 최북의 고장이다. 여기 오면 늘 보는 문학관, 미술관이지만 여유도 있으니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한다. 마침, 옛날 ‘실천문학’ 편집위원 시절부터 인연 깊은 영동 사람 양문규 선배를 만나 미술관 동행을 한다.

최북은 숙종 연간 1712년에 나서 178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옛날 사람으로는 그리 단명은 아니었으되, 벽에 써놓기를 “거리에서 동사함”이라 했다. 예술과 풍류로 일관한 삶답게 말년이 그리 유복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이 최북이 그림을 그려내라는 ‘세력가’의 강청에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버렸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본래 한쪽 눈이 성치 못했던 그의, 그러나 대쪽 같고 불 같은 성정을 빗대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런 예술가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최북은 1748년 기록에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까지 다녀왔다고 하는데, 더구나 이 무주 출신 걸출한 비평가 김환태는 일본 교토에서 공부하고 또 규슈까지 가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대학원 시절 나는 지금 덕성여대 계신 이은애 선배의 일을 잠깐 도와 드리다 이 김환태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살펴본 김환태는 문학을 정치 아닌 문학답게 세우고자 한 사람이었다.

월터 페이터처럼, 오스카 와일드처럼, 문학을 문학답게, 문장을 문장답게 지키려 한 그의 젊은 넋을 기리며, 나는 김환태 문학관을 통과하여 행사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1909년에 나서 1944년에 해방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친 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ㅡ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출처] 방민호 '문학의 숨결을 찾아'(2020.11.13)

■ [文香이 흐르는 문학관을 찾아서] 무주 김환태문학관

“비평의 대상은 오직 문학이다”… 순수 비평의 선구자. 일제 강점기 이념·사상에 물든 비평계 새 관점 제시. 국어 말살 정책에 절필선언… 결핵으로 35세 짧은 삶. 신라·백제의 관문이던 나제통문 옆 문학 기념비 ‘이채’. 무주 구천동의 문학관, 이웃 공예공방과 문화벨트 형성

전북 무주군에 있는 김환태 문학관은 일제 강점기 카프에 경도돼 있던 비평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순수 비평의 씨앗을 틔운 김환태 문학의 혼과 삶이 응결된 곳이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 노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놓은 꽃송이를 찾아 그 미에 흠뻑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 때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는 쉬운 그 꿈을 말의 실마리로 얽어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

비평가 김환태의 ‘평단 전망’ 중에서 발췌한 김환태 문학비평의 길이다. 그는 문학비평의 본질이 무엇이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에게는 순수문학의 옹호자로서, 순수 비평의 씨앗을 틔운 주인공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눌인(訥人) 김환태(1909~1944).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비평사에 한 획을 그은 문인이다. 서구의 심미적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와 월터 페이터 등을 한국 문단에 소개했으며 당시 카프에 경도돼 있던 비평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1920~1930년대 문단은 유행처럼 번진 이념성과 사상성으로 순수 문학의 입지가 약화돼 있었다. 계급주의적 비평이 문학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양상이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환태는 “문학비평의 대상은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다”라고 주창했다.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위대한 힘을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김환태의 호는 ‘눌인’(訥人)이다. “어눌한 사람”이라는 뜻이 말해주듯 그는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었다. 그의 성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눌인’이라는 호는 역설적으로 그가 결코 ‘어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평문학과 순수문학에 있어 김환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명민하며 뛰어난 감수성과 심미안을 지닌 비평가다.

전북 무주 덕유산 국립공원 입구에는 ‘눌인 김환태 문학 기념비’가 있다. 나제통문(羅濟通門) 옆에 세워진 문학비는 지난 1986년 제막됐으며 김동리·박두진·백철 씨 등 문인 45명과 유족 등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모던하고 세련된 문학비는 여느 문인들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이채로운 형상이다. 김환태의 문학 정신과 추구했던 비평의 세계가 아름다운 조각에 투영돼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나제통문 바로 옆에 문학비가 있어서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이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의 관문이었다. 무주구천동 입구에 위치하며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한다. 구천동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시원스레 통문 아래 다리를 타고 흘러간다. 최근에 내린 비로 계곡은 불어 남실거리고, 물소리는 산세에 휘감겨 상쾌하다.

아름다운 산세와 계곡 언저리를 배경삼아 서 있는 문학비를 보다 말고 서둘러 비평가 김환태를 알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문학사에서 그다지 알려진 문인은 아니다. 문학을 공부하는 전공자들도 한두 번 이름을 들어봤어도 그가 어떠한 비평가인지는 잘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문학을 접하는 데 있어 주류 장르, 일테면 시와 소설, 희곡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잠시 김환태의 생애를 대강 더듬어 보자. 그는 1909년 11월 29일 무주에서 태어났다. 1916년 무주보통학교에 입학해 1921년 졸업했으며 1926년 보성고보 2학년 편입해 1928년 3월에 졸업했다. 1928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정지용을 만나 문학적인 교류를 한다. 1931년 도시샤대를 수료하고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1934년 규수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36년 구인회에 가입해 김상용·이태준·정지용·김영랑·김기림·박태원·이상·김유정 등과 교유하며 문학의 순수성을 견지하는 활동을 펼친다. 이후 광주 광산의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박봉자)과 결혼을 하고 명신중 교사와 무학여고 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다 1940년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이 강화되고 일본 보국문학이 기세를 떨치자 더 이상 글쓰기를 지속할 수 없다 판단하고 절필을 선언한다. 1943년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고향 무주로 내려왔으며, 이후 1944년 향년 35세로 세상을 뜨고 만다.

김환태문학관은 전통공예문화촌에 자리한다. 이곳 공예문화촌에는 김환태문학관을 비롯해 최북미술관, 전통공예공방이 함께 들어서 있다. 문화의 집결지 내지는 문화클러스터라 해도 될 만큼 문학관과 미술관, 공방이 서로 이웃하며 하나의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최북은 무주가 배출한 조선 후기 화단의 거장으로 꽃과 풀, 새, 고목, 호랑나비를 잘 그렸다. 기이한 행동과 특이한 술버릇으로 유명했다 한다. 당시 중국 산수를 그리는 풍토에 반발해 조선의 진경 산수화를 고집했으며 파격적인 조형양식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지난 2012년 건립된 문학관에는 김환태의 어록 및 철학, 그의 문학정신을 총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료와 영상이 비치돼 있다. 또한 유학 후 귀국 활동, 일본 규슈대학의 졸업논문, 출생과 성장기, 구인회 활동 등의 자료도 보인다.

이곳에서는 매년 가을 눌인 김환태 문학제를 개최한다. 눌인김환태문학제전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사상사와 눌인문학회가 주관하며 전북문인협회와 무주군이 후원한다. 문학제가 개최되는 시기에는 김환태 비평 정신을 기리고 계승한 문인을 선정해 평론문학상을 시상한다. 지금까지 김윤식·김주연·권영민·조남현·정호웅·권택영·최동호·이동하·최헤실·우찬제·정과리·김성곤·방민호·유성호·문혜원 등이 수상을 했다. 이들은 한국 비평문학계에 내로라하는 평자들로 면모만 봐도 김환태평론문학상의 위상이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다.

[출처] 광주일보 (2020.05.25) 박성천 기자

■ 김환태와 김환태 문학관 / 김주영

일제강점기 시대 살았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 전북 무주(茂朱)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普成高普)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제대[九州帝大]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잇달아 《예술의 순수성》 《나의 비평태도》 등을 발표하여 순수문학을 적극 옹호하고 카프의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많은 문예시평(文藝時評)에 그대로 나타났고, 유진오(兪鎭午)와 김동리(金東里)의 ‘세대론(世代論)’이 벌어졌을 때는 《순수시비(純粹是非)》를 발표하여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김동리를 옹호하였다. 《정지용론(鄭芝溶論)》 《시인 김상용론(金尙鎔論)》 등을 통해 예술파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한편, 이태준(李泰俊)·김동리·최명익(崔明翊)의 작품에 새로운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등 순수 문학정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평론활동을 폈다. 만년에는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明新)중학과 서울 무학(舞鶴)여중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유저(遺著)로 미망인이 낸 《김환태전집》(1972)이 있다.

무주 반딧불전통공예문화촌 내에 자리한 김환태문학관은 일제강점기 문학비평가인 눌인 김환태 선생의 100여 점 유물이 전시된 곳이다. 문학관은 2, 3층에 걸쳐 세미나실과 다목적 영상관, 눌인전시관, 휴게시설 등을 두루 갖췄으며 김환태 선생의 사진을 비롯해 김환태 비평 선집, 눌인 김환태가 남긴 유산 등 다수의 저서와 유물 등을 전시한다.

“문예비평이란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해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표출하여야 합니다.”

- 김환태의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
비평문학의 선구자

김환태 선생은 일제강점기 순수문학의 이론체계를 정립하고 계급주의 등으로 경직된 문단에 순수 비평을 싹 틔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무주군에서는 김환태 선생의 문학을 기리고 무주문화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김환태 문학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출처] 작성자: 김주영 (2016.09.02)

/ 2020.12.26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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