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金尙鏞)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감상과 해설]
1
창을 남쪽으로 내겠다는 제목부터가 생활의 건강하고 낙천적인 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에 대한 굳은 신념을 나타내면서도, 역설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제2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해학과 더불어 매우 시다운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시의 특별한 매력이다.
마지막 연은 의미의 함축성과 표현의 간결성 및 탄력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도회 생활의 공허한 삶은 생각지도 않고 무슨 재미로 전원에 파묻혀 사느냐고 질문하는 친구에게 만족한 대답을 주려면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것을 시는 '웃지요'라는 단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회의, 번민, 사색, 해답, 결심이 하나로 압축된 자신의 생활관을 실증하는 웃음인지 모른다.
이 시는 자연과 함께하고자 하는 작자의 소박한 소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평이한 시어로 전원생활을 표현하면서 달관한 경지의 인생관을 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남'(南)이라는 방위가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잘 나타나 있는 이 시는 시인의 개인적인 소망으로도 볼 수 있지만, 1930년대의 시대적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품 자체의 내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면, 전 3연의 간결한 형식과 밝은 시어, 민요조의 단순하고 소박한 가락에 주목할 수 있고, 주제에 중점을 둔다면 남에게 굳이 강요하지 않는, 전원생활에 대한 시적 화자의 마음가짐에 주목할 수 있다. 시 안에서는 특히 마지막 연의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부분을 이백(李白)의 시 (山中問答)의 둘째 구절 '笑而不答心自閑'과 함께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를 논술에서 다룬다면 작가의 삶에 대한 자세에 중점을 둘 만하다. 지금까지 문명을 일군 세계의 가치관이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이 시에 나타난 가치관은 자연과 동화되고자 하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현대인들의 여유 없는 삶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으며, 끝없이 과학 문명의 발달만을 추구해 온 현대 사회의 여러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
2
소이부답(笑而不答)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鏞∙1902~1951년)은 1934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웃지요."
월파는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 만 15세 되는 해인 1917년에 단신 상경해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이 나라의 최고 수재들이 들어가던 학교다. 재학 중인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그는 보성고등학교로 옮겨서 1921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릿교(立敎)대학교의 영문학과에 입학을 한다. 릿교대는 미국 성공회 선교사가 1874년 도쿄에서 영문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출발 한 사학(私學)이다. 그 뒤 학교가 성장을 하면서 처음에는 영문학으로, 뒤에는 경제학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길러낸 명문으로 손 꼽힌다. 그가 릿쿄대에 재학을 하고 있던 1923년 도쿄에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이 일어나 그때 현지 거주 우리동포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었다.
월파는 그 참사를 무사히 모면하고 1927년 졸업을 하자 귀국해서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곧 온 가족을 연천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해서 성북동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이듬해 1928년부터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하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나이 만 32세에 이미 일가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38세에 발표한 것이 '남으로 창을 내겠소' 라는 시였다. 그가 떠나온 전원생활을 다시 동경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는 노래다.
왜 사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대답을 하려 들지 않고 웃겠다는 말은 이백(李白)의 시 '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백은 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에게 무슨 이유로 벽산에 사느냐고 묻는다(問余何事棲碧山)./ 웃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 가니(桃花流水杳然去)/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別有天地非人間)."이 시도 이름은 문답이라고 되어 있지만 역시 시인 혼자서 주고받는 자문자답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내가 왜 여기 살고자 하는지 물어보지만 구태여 말로 그 이유를 조목조목 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고 느긋하다. 이백의 탈속적인 기상이 넘쳐나는 시다.
그러나 월파는 이백과 같이 속세와 단절된 이상향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전원으로 돌아가서 자연을 즐기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따뜻한 인간 사이의 교류를 탐하고 있음을 강냉이로 표백하고 있다. 그가 외면하려 한 것은 구름의 유혹이었다. 즉 세속적인 영달을 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지키고자 바란 것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정이 오가는 안온한 교단생활이었다.
대륙을 침공하다가 끝내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1943년 적성 문학이라고 전문학교 교과에서 영문학 강좌를 폐지함으로써 월파는 교단에서 축출당한다. 해방 이후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벼락 출세를 할 때 월파는 미군정에 의하여 강원도 지사로 뜻밖에 임명되었지만 며칠 만에 바로 사임을 하고 교단으로 복귀했다가 그 이듬해 미국 보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돌아온 해는 1949년 정부가 수립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돌아오자마자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복직을 했으니 그가 노래한 시가 얼마나 그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인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월파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식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였다. 우리 시문학에는 측량할 수 없도록 애석한 돌발사였다. 그가 남긴 시를 암송할 때마다 좀 더 오래 생존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상념에 잠기게 된다. 요즘 같이 어수선한 세상에서는 무슨 물음에나 웃고 대답하지 않는 쪽이 더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ㅡ 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 2020.12.26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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