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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양념, 맛만 내는 게 아니랍니다' 권오길 (2020.12.08)

푸레택 2020. 12. 8. 11:02



■ 양념, 맛만 내는 게 아니랍니다 / 권오길

"사람이 밥만 먹고 못 산다"는 말은 삶이 너무 팍팍해서는 안 되고 뭔가 좀 윤기 넘치는 넉넉함과 헐렁한 남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듯 음식에도 양념감이 들어가야 맛깔이 난다. 고추, 마늘, 생강, 파, 양파, 부추, 후추, 설탕, 깨소금 등 우리가 쓰는 양념거리만 해도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누가 뭐라 해도 그 중에 고추가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 고추나 고춧가루는 멋으로 넣는 양념 정도의 것이 아니다. 풋고추 하나에 들어 있는 비타민C가 귤의 네 배나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가을도 되기 전에 푸릇한 풋고추는 늙어가면서 새빨개지니 그것은 캡산틴 색소가 생겨난 탓이요, 고추의 매운 맛(실은 맛이 아니고 아픔, 통각임)은 캅사이신(capsaicine·고추의 학명 Capsicum annuum의 속명인 Capsicum에서 따옴)이란 물질 때문이다. 호, 호 맵다. 얼마나 맵기에 옛날 어른들이 고초(苦草)라고 이름 붙였을까. 고추는 끝보다는 줄기 쪽이 더 맵던가?

그건 그렇다 치고, 양념감은 주로 꽃을 피우는 현화식물(顯化植物)의 꽃, 뿌리, 과일, 씨앗, 줄기, 껍질에서 얻는다. 이것들은 모두가 물질대사의 결과 생긴 이차 부산물로, 늙은 식물세포일수록 커지는 액포(식물의 배설기관) 속에 넣어둔 일종의 노폐물(老廢物)이다. 이 화학물질은 곤충이나 세균, 곰팡이, 바이러스, 기생충, 고등동물들에 대한 자기보호를 하는 비밀무기 역할을 한다.

사실 양념(향료)이란 음식의 색을 내고, 향으로 잡냄새를 없애는 일 말고도 우리 몸에 유익한 영양소가 들어 있어 입맛을 낸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물에 여러가지 양념(조미료)을 넣어 먹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여러 양념으로 영양분을 얻을뿐더러 다른 세균이나 곰팡이의 번식을 막는다. 그래서 동남아나 대만, 중국 등지의 더운 지방으로 갈수록 여러 가지 양념(허브)을 쓰고 또 그 농도가 엄청나게 짙어 누구나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체머리를 흔들게 된다.

우리나라도 남쪽 지방의 음식은 하나같이 짜고(소금도 일종의 양념으로 세균을 죽임) 매우며, 내 고향 서부 경남에서는 방아풀이나 산초나무, 초피(제피)나무 같은 냄새 짙은 열매가루를 물김치, 겉절이, 된장, 순대에도 막 넣어먹는다. 양념(향미료)은 절대로 향이나 색깔, 맛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음식의 썩음을 막는 방부제로 쓰인다. 게다가 오래, 자주 먹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인이 박이는 것이 양념이다.

"십리만 떨어져도 물과 바람이 사뭇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하여 경북 청송산(靑松産)인 우리 집사람은 앞에서 말한 방아나 산초, 제피를 먹지 않고 자랐기에 그것을 먹을 줄 몰라 요리에 쓰지 않는다. 아니, 쓰는 것을 싫어한다. 때문에 글 쓰는 이는 애통하게도 어릴 때부터 즐겨 먹어온 그 맛을 잃고 살아간다. 그런데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가능한 한 같은 민족과 또 동향인끼리 혼인을 하려 드는 것은 무엇보다 비슷한 먹이문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일 터. 따지고 보면 요놈의 간사한 혓바닥이 나라를 나누고 지역 편 가르기를 한다.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출처] 경향신문 (2009.06.25)

/ 2020.12.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