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과학칼럼] '겨울 밭가의 끈질긴 생명들' 권오길 (2020.12.08)

푸레택 2020. 12. 8. 12:07



♤ "삶이 정녕 지겹고 힘들다 싶으면 지금 당장 겨울밭가에 나가보라. 땅바닥의 끈질긴 생명들이 당신을 살갑게 맞이할 터이니... 겨울 푸나무들이여 힘내라!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 겨울 밭가의 끈질긴 생명들 / 권오길

겨울 뒷산을 살펴보니 황량하기 짝이 없다. 짙푸르던 풀대는 말라 비틀어졌고 소나무, 잣나무들을 빼고는 모두 나목이 되어 본체를 드러내고 뿔뿔이 서있다. 사방 득실거리던 벌레들은 쉬엄쉬엄 다 어디로 가고 텅 빈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온통 그것 앞에서는 벌벌 떨고 있다. '겨울은 휴식의 계절'이란 말이 실감난다. 저기 저 논밭을 봐도, 여름 내내 온 곡식에 진을 빼앗겼던 흙이 지력을 되찾고 있다. 저렇게 대자연도 쉬는 철이 있구나! 휴식은 노동의 연속이라 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정적이 감도는 겨울에도 생동하는 생명들이 있으니, 아침 밭가에서 언제나 만나는, 흰 바탕에 검은 옷을 입은 '박새'와 짹짹거리며 떼 지어 다니는 붉은 머리에 오목한 눈을 가진 '뱁새'다. 또 잣나무에서는 '청설모'가 그네를 타고, 고목에서는 '딱따구리' 놈이 달라붙어 딱! 딱! 딱! 나무를 쪼아댄다. 그 시간에는 언제나 '고양이'가 쓰레기를 찾아 헤매고…. 이들 동물이 우연찮게도 새와 짐승들이 아닌가. 여타 변온동물(냉혈동물)은 추워 꼼짝달싹 못하고 모두 숨어 버렸지만 정온동물(온혈동물)인 조류와 포유류만이 저렇게 설친다. 물론 사람도 정온동물이며 개중에는 인정머리 없는 '냉혈동물'도 더러 있다.

그건 그렇다치고, 대낮 따스한 햇살에 노인들은 해바라기를 하고, 젖먹이 아이들에게는 일광욕을 시킨다. 살갗은 햇살(자외선)을 받아 에르고스테롤을 비타민 D로 바꾸는 비타민 제조공장이라, 글 쓰는 이 같은 설익은 노인에게는 이것이 뼈를 튼튼케 하고 전립선암을 예방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하루에 15분 넘게 직사광선을 받아야 자궁암에 안 걸린다고 한다. 게다가 겨울에는 낮 시간이 짧아 수면(잠)에 필요한 멜라토닌 합성이 부족하여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겨울햇볕은 약방의 감초다.

이제 집 뒤의 양지바른 텃밭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밭의 두렁과 두렁 사이가 밭고랑이고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랑이라 한다. 두렁은 우뚝 솟아 있기에 볕이 잘 들지만 고랑은 하루 종일 두렁에 그늘이 져서 응달이다. 두렁의 눈은 태양을 받아 곧바로 녹아버리지만 고랑의 것은 여간해서 녹지 않는다. 밭이랑 하나를 두고도 두렁과 고랑 사이에 이렇게 온도차가 난다. 일조나 바람받이 등에 따라 생기는 아주 작은 기후 변화(차)를 미기후(微氣候·microclimate)라 한다. 눈 무덤 속과 공기의 온도가 다르고 앞마당과 뒤뜰의 기온 또한 천양지차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밭두렁에 냉이, 달맞이꽃, 애기똥풀(유아변초), 고들빼기가 줄줄이 미기후를 애써 이용하고 있다. 한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땅바닥에 바싹 웅크려, 이파리를 납작하게 땅바닥에 달라 붙이고 있으니, 아래 큰 잎과 위의 작은 것이 엇갈리게 포개져 장미 꽃송이처럼 둥글게 동심원으로 열 지어있다. 이런 꼴을 로제트(rosette)라고 하며, 땅의 온도를 한껏 얻어쓰겠다는 심사다. 그 오묘함에 마냥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삶이 정녕 지겹고 힘들다 싶으면 지금 당장 겨울밭가에 나가보라. 땅바닥의 끈질긴 생명들이 당신을 살갑게 맞이할 터이니…. 겨울 푸나무들이여 힘내라!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생물학

[출처] 경향신문 (2009.11.26)

/ 2020.12.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