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아두면 쓸모없는 조선 왕 이야기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집권했던 왕조로,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우는 조선 왕의 계보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알아두어도 쓸모없는 지식이지만
재미삼아 조선시대 왕에 관한 퀴즈를 풀어보자.
● 재미로 풀어보는 조선시대 역사 퀴즈
[퀴즈] OX Quiz
1 가장 수명이 짧았던 왕은 단종이다. O X
2 가장 수명이 길었던 왕은 영조다. O X
3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단종이다. O X
4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한 왕은 철종이다. O X
5 재위기간이 가장 짧았던 왕은 단종이다. O X
6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왕은 영조다. O X
7. 부인을 가장 많이 둔 왕은 성종이다. O X
8. 단종은 부인을 하나 두었다. O X
9. 자식이 가장 많았던 왕은 태종이다. O X
10. 아들이 가장 많았던 왕은 세종이다. O X
11. 딸이 가장 많았던 왕은 태종이다. O X
12.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은 자식이 없었다. O X
13.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자는 의친왕이다. O X
14. 자식이 가장 많았던 왕자는 양녕대군이다. O X
15. 세자 생활을 가장 오래 한 왕은 문종이다. O X
16. 가장 짧게 세자 생활을 한 왕은 정종이다. O X
17. 조선시대 최초로 직계가 아닌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사람은 철종이다. O X
18. 조선의 왕은 순종을 마지막으로 했을 때 27명이다. 조선 왕들의 묘효 중 끝에 조(祖)를 붙인 왕은 모두 7명이다. O X
19. 영조의 장남, 정조의 장남, 순조의 장남은 모두 임금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O X
20. 신하들에게 쫒겨난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O X
21. 왕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왕이 승하한 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조선의 임금은 단 2명, 연산군과 숙종뿐이다. O X
22. 조선시대 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약 46세다.
O X
.....
☆ 1. 수명이 가장 짧았던 왕은?
단종 17세
예종 20세
헌종 23세
☆ 2.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은?
영조 83세
태조 74세
고종 68세
광해군 67세
정종 63세
숙종 60세
☆ 3.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헌종 8세
순조 11세
단종=명종=고종 12세
성종 13세
숙종14세
☆ 4.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한 왕은?
태조 58세
정종 42세
☆ 5. 재위 기간이 가장 짧았던 왕은?
인종 9개월
예종 1년 2개월
정종 2년 2개월
문종 2년 3개월
단종 3년 2개월
☆ 6.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왕은?
영조 51년 7개월
숙종 45년 10개월
고종 43년 7개월
선조 40년 7개월
중종 38년 2개월
☆ 7. 부인을 가장 많이 둔 왕은?
태종 12명
성종 12명
중종 12명
정종 10명
광해군 10명
선조 8명
철종 8명
명종 7명
숙종 7명
고종 7명
태조 6명
세종 6명
영조 6명
☆ 8. 부인을 하나 둔 왕은?
단종
현종
☆ 9. 자식이 가장 많았던 왕은?
태종 29명
성종 28명
선조 25명
세종 22명
☆ 10. 아들이 가장 많았던 왕은?
세종 18명
성종 16명
정종 15명
☆ 11. 딸이 가장 많았던 왕은?
태종 17명
성종 12명
선조 11명
☆ 12. 자식이 없었던 왕은?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은 자식이 없었다.
☆ 13. 아내가 가장 많았던 왕자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 15명
자식 21명 (12남 9녀)
☆ 14. 자식이 가장 많았던 왕자는?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 25명
☆ 15. 세자 생활을 가장 오래 한 왕은?
순종 32년 5개월
경종 30년 11개월
문종 28년 8개월
☆ 16. 가장 짧게 세자 생활을 한 왕은?
2대 정종(定宗)
1398년 8월 26일 세자(世子)에 책봉되어 같은 해 9월 4일 왕위에 오름.
약 8일간의 짧은 세자 생활이었음.
☆ 17. 조선시대 최초로 직계가 아닌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사람?
14대 왕 선조
☆ 18. 조선의 왕은 순종을 마지막으로 했을 때 27명이다. 조선 왕들의 묘효 중 끝에 조(祖)를 붙인 왕은?
1대 태조
7대 세조
14대 선조
16대 인조
21대 영조
22대 정조
23대 순조
모두 7명이다.
☆ 19. 임금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난 세자들
태조의 막내아들 이방석 17세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20세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 13세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34살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 10세
영조의 차남 사도세자 28세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 5세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 22세
☆ 20. 신하들에게 쫒겨난 임금은?
연산군
광해군
☆ 21. 왕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왕이 승하한 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조선의 임금은 단 2명, 연산군과 숙종뿐이다.
☆ 22.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왕 27명의 평균 수명은 46.1세다.
[참고자료] 조민기의 '조선 임금 잔혹사', 이덕일의 역사평설 '조선왕을 말하다 1', '조선왕을 말하다 2'
● 조선시대 평균수명 35세.. 왕은 46세
영유아 사망률 높았던 탓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현재 평균수명(남 78세, 여 85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세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다산연구소에 따르면 황상익(의사학) 서울대 의대 교수는 다산포럼에 게재한 칼럼 '수명이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35세 내외, 혹은 그 이하'로 추정했다. 조선시대 국왕 27명의 사망 평균 연령은 46.1세다. 영조의 경우 만 81세 5개월을 살면서 조선시대 국왕 중 가장 장수했지만 전체 왕 중에 만 60세를 넘긴 왕은 20%도 안 된다.
황 교수는 의료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을 국왕이 백성들보다 오래 살았을 것이라는 점과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1800년 무렵의 평균수명이 35세 안팎이었던 점 등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람의 평균수명을 35세 내외로 유추했다. . 근대화 이전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출생아 세 명 중 한 명은 네 살까지 살지 못했고, 네 명 중 한 명은 첫돌조차 맞이하지 못했다. 의료혜택을 많이 받던 왕가도 비슷했다. 최장수 임금 영조의 자녀 14명 중 5명이 네 살을 넘기지 못했다. 이에 반해 2013년 현재는 전 세계 출산 1000건당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연평균 추정)은 52명이며, 우리나라는 4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크게 낮아졌다. / 문화일보 기사
● 조선왕조, 간략한 역대 왕들의 역사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집권했던 왕조로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했다.
조선왕조계보 1대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케 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웠다. 2대 정종은 1대 태조의 둘째 아들로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세자로 책립됐다. 3대 태종은 1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고 관직 제도를 개혁했다.
4대 세종은 3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켜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 성군이다. 5대 문종은 유교적 이상 정치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6대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해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7대 세조는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수양대군)로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으며, 8대 예종은 7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9대 성종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했다.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0대 연산군은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됐고, 11대 중종은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했다.
12대 인종은 11대 중종의 맏아들로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깊었던 왕이다. 재위 8개월 만에 사망했다. 13대 명종은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었다. 14대 선조는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겪었다.
15대 광해군은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됐다. 16대 인조는 왕위에 올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 겪은 왕이다. 17대 효종은 16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으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18대 현종은 17대 효종의 아들로 남인과 서인의 당쟁(예송논쟁)이 계속돼 국력이 쇠퇴해졌다. 19대 숙종은 18대 현종의 아들로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함했다. 당쟁과 궁중암투가 극에 달했다.
20대 경종은 집권시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21대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고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들었으나 사도세자의 비극 겪기도 했다. 22대 정조는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킴으로써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23대 순조는 22대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에 즉위했다. 김조순 등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던 시대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24대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25대 철종은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됐으며 진주민란 등 민란이 빈번했었다. 26대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리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했다. 27대 순종은 26대 고종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며,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됐다. / 일간스포츠
☆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 25명의 왕 중에서 최악의 왕 3명 (Top3)을 꼽는다면?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임금, 최고의 왕을 꼽으라면 아마도 누구나 세종대왕을 꼽을 것이다. 그 다음 훌륭한 왕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조라고 대답할 것이다. 세번 째로 훌륭한 왕은? 여기서 사람들은 망설여진다. 각자 역사를 보는 견해, 역사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세종대왕을 빼고 훌륭한 왕은 없다" 라고 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의 25명 임금 중에서 최악의 왕 Top3를 꼽으라면? 내가 생각하는 조선시대 최악의 왕은 단연코 인조다. 차악은 선조, 차차악은 고종을 꼽고 싶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 '까막눈 철종'이란 잘못된 오해.. 우리가 놓친 사실 / 김종성
고종 임금의 전임자인 철종은 죽어서까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그는 많은 현대인들로부터 까막눈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철종 까막눈'을 검색해보면, 오해가 상당히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지금 방송되는 TV조선 드라마 에 나오는 철종(정욱 분)의 이미지는 약간 다르다. 이 드라마 속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는 유약한 군주이기는 하지만, 까막눈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14일 방송된 제 9회분에서는 철종이 '별 어려움 없이' 서류를 읽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대중의 인식과 거리를 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철종이 까막눈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철종의 학문이 높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철종은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높지 않은 군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오해가 확산된 데는 대중 역사물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일례로, 역사학자 이이화의 와 를 재구성한 는 철종과 그 형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서술한다.
"고아인 이들 형제는 강화도에서 땔나무를 하여 푸성귀로 연명하는 생활을 했다. 때로는 강화도의 유력자 이시원(한말 명문장가인 이건창의 할아버지) 같은 인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철종은 여느 초동들과 어울려 지게 목발을 두들기며 나무를 했고, 글 한 줄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글 한 줄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자랐을 것이라고 했다. 철종을 까막눈 비슷하게 묘사한 것이다. 위 책은 철종이 안동 김씨의 선택을 받아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옮겨져 임금 생활을 할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무식꾼인 철종은 궁중에서 온갖 법도를 배워야 했다. 일정한 시간에 글을 익혀 왕도를 배워야 했고, 만조백관을 접하고 정책을 논해야 했다. 그는 거추장스런 곤룡포 따위의 의관을 걸치고, 걸음걸이는 위엄 있게, 말씨는 왕자(王者)답게, 눈빛은 빛나게 갖기 위해 한 시간도 여유 없이 긴장해야 했다."
철종이 글 한줄 변변히 읽지 못한 무식꾼이었다는 이 같은 서술은 음력으로 철종 즉위년 6월 9일자(양력 1849년 7월 28일자) 과 명확히 상반된다. 1849년 7월 28일은 철종이 주상으로 등극한 날이다.
이날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진 철종은 희정당에서 대왕대비 순원왕후 및 전·현직 대신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다. 이 자리에서 순원왕후와 대신들은 새로운 군주의 학업 능력을 체크했다. 이때 철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통감 2권과 소학 1·2권을 읽었지만,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
통감은 기원전 403년부터 서기 960년까지의 중국 역사를 담은 사마광의 을 축약한 를 지칭한다. 그리고 소학은 아동용 유학 교재다.
통감과 소학을 조금 읽었다는 답변은 적어도 은 뗐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같은 또래 유생들에 비하면 상당히 뒤진 편이지만, 일반 농민 자제들과 비교하면 꽤 많이 앞서는 편이었다. 이 시대의 평균 학력을 명확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까막눈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대중 역사물인 신봉승(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역임)의 글인 '역사 에세이: 강화도령 철종'은 이이화의 글과 달리 '철종이 어느 정도는 책을 읽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2012년에 제152권에 실린 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철종이 안동 김씨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19세의 더벅머리 총각이 조선의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바로 철종 임금이다. 을 보면 철종이 명심보감과 소학 1, 2권을 읽었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고, 경연에서 강론한 것으로 보아 아주 까막눈은 아닌 게 분명하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명심보감은 통감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 통감(通鑑)이란 한자를 급하게 읽다 보면 보감(寶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보감'으로 잘못 읽게 되면 명심보감의 약칭으로 오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이화의 글과 달리 신봉승의 글은 철종이 기본 학력은 갖고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아주 까막눈은 아닌 게 분명하다'는 표현은 철종의 학업 수준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렀던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철종의 실제 학문능력과 한참 동떨어진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종은 국립대학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것도 모범 유생들을 따로 모아 가르칠 만했다. 이를 증명하는 문헌이 있다. 구한말의 가장 유명한 논객으로서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실각시킨 면암 최익현의 문집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의 연보(年譜) 편에서 철종의 학문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철종이 왕이 된 지 6년 뒤인 1855년이었다. 이때 철종은 24세였고, 최익현은 22세의 성균관 유생이었다. 연보 편에 따르면, 이 해에 철종은 춘도기(春到記)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주재했고 최익현은 이 시험에 응시했다.
춘도기는 출석 성적이 우수한 성균관 유생들만 따로 모아 시행한 특별 전형이다. 이런 시험이 가을에 열리면 추도기로 불렸다.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를 거쳐 제2단계 과거시험인 대과로 나아가는 게 상례였지만,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이들끼리만 대과를 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춘도기·추도기가 바로 그것이다.
1855년 봄철에 시험이 치러졌을 때, 철종은 단순히 참관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문제를 내고 채점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가 유생들을 하나씩 불러내 일대일 면접을 하는 방식으로 이 시험은 진행됐다. 시험 범위는 고대 중국 역사서인 이었고, 최익현은 맨마지막 자리에 배치돼 있었다.
이날의 시험장을 긴장시킨 것이 있었다. 바로, 철종의 표정이었다. 문제를 내고 답을 듣는 철종의 표정이 내내 좋지 않았다. "임금께서 즐겁지 않은 기색"이었다고 위 연보는 말한다. 그를 흡족케 할 만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철종의 표정을 일거에 바꾼 것이 마지막 수험생의 등장이었다. 최익현은 막힘 없이 술술 답변했다. 철종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철종한테서 나온 굵직한 한마디는 "순통(順通)이로다"였다. '성적 우수' 판정이 나왔던 것이다.
'면암선생 문집'은 최익현의 아들이 최익현을 존경하는 문인들과 함께 만든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익현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과장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상황이 상당부분 진실에 가깝다는 점은 최익현이 이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다. 최익현이 다른 수험생들을 능가하는 답변을 내놓은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위 일화가 철종의 높은 학문 수준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철종은 가장 모범적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문제를 냈다. 그들의 답변을 들은 철종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는 철종이 그들을 평가할 만한 학문적 역량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최익현이라는 걸물을 발굴해 장원급제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머지 않아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지식인을 그가 발탁했던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므로, 최익현을 골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철종의 학문적 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것은 이때 철종이 24세였다는 점이다. 당시 20대는 지금의 20대보다 조숙했지만, 그 시절의 20대도 지금처럼 젊은 축에 속했다. 20대 전반에 그 정도였다면, 이미 10대 때부터 상당히 뛰어났으리라고 판단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한 학문적 역량이 즉위 후 6년 사이에 축적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미 오래 전부터 쌓였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즉위식 날에 그가 했던 "통감 2권과 소학 1·2권을 읽었지만,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라는 말은 과도한 겸양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철종이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에 묘사되는 것처럼, 그는 안동 김씨의 간섭으로 인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까막눈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많이 배운 사람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허수아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허수아비 군주가 되는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자원이 없어서다. 외교 전문가로서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집단의 허수아비가 됐던 것은 최규하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산이 없어서 그렇게 됐을 뿐이다. 철종 임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2020.06.21)
■ 흥청망청(興淸亡淸)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동안 조선(朝鮮)은 27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가운데 딱 두 분만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고 군(君)이라 불러지고 있습니다.
1494년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조선의 열 번째 왕은 국가가 지향하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거부하고 절대 왕권을 추구하였으나 애초부터 불행의 씨앗을 품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생모(生母) 폐비 윤 씨가 사사(賜死)되면서 독약을 마신 후 죽기 직전 입고 있던 저고리에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핏덩이를 묻혀 친정어머니 손에 쥐여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일 내 아들이 왕위에 오르거든 전해주면서 원통한 한을 풀어달라는 유언과 생모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유품을 받아든 연산군은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눈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몇 차례의 피 보라가 조정 안팎에서 몰아쳤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패악(悖惡)과 폭정은 그칠 줄 모르고 더해 가더니 끝내는 쾌락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때를 놓칠세라 간신배들이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폭군의 비위를 맞추기로 넷째 아들 임숭제(任崇載)와 발 벗고 나섰습니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한 종친의 인척으로 4명의 자식이 두었으며 첫째 임광제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막내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한 사이입니다. 특히 막내아들 임숭재는 처남 매부지간이기도 했지만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임사홍은 이점을 이용하여 용의주도하게 폐비 사건을 슬며시 흘렸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 백 년 동안 폐비 문제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성종의 유언이 있었으나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임사홍은 부귀영화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 자식의 목숨까지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심지어 자식이 죽임을 당하는 날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임사홍 부자는 머리를 맞대고 날밤을 새워가며 쥐어짠 끝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에 착안하여 절세가인들을 많이 모아 미인계로 왕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무한한 능력을 보유해 노력만큼 발달하고 좋은 방향보다는 나쁜 방향으로 더더욱 빨리 발달한다는데 필시 임사홍 때문에 생겨난 말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1505년 임사홍 마침내 왕의 전용 기쁨조를 만들기 위해 어명까지 받아 내자 곧 새로운 프로젝트를 운영할 채홍사(採紅使)라는 TF(Task Force)팀, 즉 특별 전담반을 만들었습니다. 채홍사의 채(採)는 발굴해내다, 홍(紅)은 여자(女子), 준(駿)은 좋은 말(馬)을 뜻하며 채홍준체찰사, 채홍준종사관, 채홍준순찰사 등 직위에 자신들의 수족들을 앉혀 운영했습니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채홍준사(採紅駿使) 불렀으며 조선팔도 전국의 각 지방마다 미색이 뛰어난 기생이나 여인을 찾아내 한양으로 데려오라는 특별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채홍사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즉 예쁜 여자와 명마를 많이 찾아온 자에게는 벼슬은 물론 토지와 노비까지 주었다니 출세에 눈이 먼 이들의 행패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 채홍사 가운데 성적이 가장 으뜸인 자는 바로 임사홍으로 자그마치 3천여 명의 여인들을 찾아내고 데려온 공로로 포상도 제일 많이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지에서 차출된 1만여 명의 여인들에게는 운평(運平)이라 명칭을 내렸으며 1차에 선정된 여인들 가운데 기예와 미색이 출중한 절세 미녀 300명을 연산군이 직접 심사를 했습니다.
연산군의 심사에서 합격한 여인들에게는 더러운 것은 씻어내고 맑고 깨끗함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담긴 흥청(興淸)이라 작호를 하사하여 특별 교육을 시키며 특별 관리를 받았습니다. 또 흥청들 가운데서도 연산군을 모시는 흥청들의 품계(品階)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부르고 왕의 주변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며 모시도록 했으나 잠자리는 같이하지 않았답니다.
연산군의 관심을 끌어 합방까지 하더라도 흡족하게 만족시킨 흥청에게만 하늘처럼 높다는 뜻을 담은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는 품계의 작호를 내렸으며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최고에 가까운 천과흥청 가운데서도 연산군의 총애를 독차지한 여인으로는 장녹수와 전비(田非, 숙용 전 씨)가 있었으나 장녹수의 기교(?)가 훨씬 더 뛰어났던가 봅니다.
당시 임사홍이 전국 팔도에서 징발해온 여인들의 숫자가 무려 1만여 명에 달했다는데 인원이 너무 많다 보니 궁궐 내에는 수용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숙소 부족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연산군은 매부(妹夫) 남치원(南致元)의 집을 빼앗아 함방원(含芳院), 형제인 제안군의 집은 뇌양원(뇌陽院), 견성군 집은 진향원(진香院)이라 명명하고 흥청들을 기거토록 했습니다.
과유불급이라 했는데 매일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연산군의 샘솟던 정력이 고갈되고 쇠하자 백마(白馬)가 최고의 정력제라고 여긴 연산군은 말고기와 피를 즐겨 마셨습니다. 급기야 1505년 요즘 부총리급인 정일품 우찬성(右贊成) 이계동(李季仝)을 전라도, 교육부 장관 격인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 임수제는 경상도-충청도에 파견, 명마를 찾아오게 했습니다.
간신 임사홍의 일당들이 전국 팔도를 뒤져가며 미녀와 준마를 징발(徵發) 했는데 특히 행정구역이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탐라도(제주)에 미녀와 준마가 가장 많은 것으로 손 꼽혔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해안지방 여인들은 해산물 섭취량이 내륙지역보다 훨씬 많으므로 혈액이 청정하여 귓불이 늘어지지 않고 생리 활성이 뛰어나 미녀가 많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흥청들은 특별 교육을 받았는데 방중술(房中術)을 통한 건강증진 법을 배웠으며 2차 관문까지 통과한 흥청들은 연회장 여흥을 북돋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문제는 연일 이어지는 잔치로 탕진되는 엄청난 비용은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해결책으로 공신 책봉을 받은 공신들과 신료들의 재산을 몰수하려 계획했습니다.
몇몇 간신배들만 살 만한 세상으로 변해가는 현실에 날이 갈수록 위기감을 느낀 신료들의 반감이 걷잡을 수없이 커지고 끝내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미녀들과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몰락한 연산군의 생을 지켜본 백성들이 흥청은 곧 망한다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ㅡ 이승식의 세상만사 (2020.11.03)
■ 신분 질서에 도전한 정난정
율곡의 '석담일기'에 의하면 정난정(鄭蘭貞, 1506~1565)은 윤원형의 첩이었다가 본처를 내쫓고 부인(夫人)이 되었다. 난정은 윤원형을 움직여 뇌물을 받고 수탈을 일삼아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권력을 농단한 지 20년, 그들이 소유한 저택 10채에는 재화가 흘러넘쳤다. 윤원형이 실각한 뒤 백성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며 죽이려고 덤벼들자 둘은 황해도 강음으로 달아났다. 지은 죄가 워낙 엄청나 난정을 의금부에 하옥시키라는 요구가 빗발치지만 임금은 계속 머뭇거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난정은 자신을 옥죄어 오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살을 하는데, 며칠 후 원형도 죽었다. 당시의 여론이기도 한 이런 모습의 정난정은 사극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즉 몽매한 남성 권력자를 색기(色氣)로 장악하고 배후에서 조종하여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낸 파괴력 쩐 여자이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 체계에서 착취의 대상이었던 한 여성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자기 삶의 조건을 만들어간 것에 주목한다면 정난정은 충분히 새로워질 수 있는 인물이다. 무관인 양반 정윤겸과 관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 집을 나와 기녀로 활동했다고 한다. 주어진 삶을 거부한 첫 행보라 할 수 있다. 윤원형의 첩이 된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기른 것을 보면 스무살을 전후하여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기녀의 신분으로 왕비 동생의 첩 즉 왕실 외척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보통의 수완으로는 불가능하다. 윤원형의 첩으로 지내던 그녀가 본처 김씨를 몰아내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나이 50이 가까워서이다. '경국대전'에 ‘첩은 처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해 놓았지만 당시의 권력 문정왕후의 승인으로 난정은 외명부 정1품 정경부인에까지 오른다. 신분의 수레바퀴에서 신음하던 한 여자의 인간 승리,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란 늘 명암이 있고 아이러니한 것들이 뒤섞인 흥미로운 해석의 장이다.
윤원형(1503~1565)은 누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 농단을 일삼아 사림(士林)의 울분을 자아냈다. 그를 일러 탐욕스럽고 사특하며 독살스러워 얼굴은 늙은 여우 같다고 했고, 기름진 전답은 걸신든 듯 마구 취해 사가(私家)가 나라보다도 부자고 개인이 임금보다도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윤원형의 탐욕은 욕망의 화신 정난정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고 그녀의 악행 또는 한없이 부풀려진다. 본처 김씨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인데, 국왕 명종은 근거 없는 음모라며 단칼에 일축해버린다. 사람들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꿰찬 천민 정난정을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난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편을 찔러 처와 첩, 적자녀와 서자녀를 차별하는 법안을 폐기하도록 한다. 자기 자녀들을 위한 것이지만, 이 일은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서얼허통이 열리자 정난정은 그녀 소생의 자녀들을 사대부 집안과 혼인시켜 주변을 공고히 한다. 또 자녀로 맺어진 인척을 세자빈의 자리에 밀어넣었고,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군의 아들인 정2품의 왕자를 사위로 맞아 세자를 잃은 명종의 보위를 잇고자 기획하기도 한다. 처의 지위를 획득하자 자녀들의 신분 세탁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는 등 금지되었던 자신의 욕망을 하나씩 실현해 간 것이다.
물건과 인간의 경계인(境界人)에서 여자 인간 최고의 자리 정경부인에 오르기까지 격동의 60년을 보낸 정난정. 그녀를 잡아다 법정에 세우라는 아우성을 뒤로한 채 자살로 삶을 마감한 최후의 순간에 정난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난정이 열어 준 서얼허통은 잠시뿐, 강상 윤리의 기치를 내건 적처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정난정의 성공신화를 누구라서 비웃을 것인가. ㅡ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2020.03.27)
/ 2020.12.03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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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의 대상에게 개혁을 맡긴 철종,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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