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정재찬 (시인, 한양대 교수)
ㅡ 시를 잊은 그대에게
억울하고 허무하고 속 답답할 때는 이 시를 읽자.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전문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의 인생이야말로 피리 부는 소년의 나그네 길 그것이었다. 등단 초기부터 가난과 주벽, 해학과 기행으로 고은(高銀, 1933~ ), 김관식(金冠植, 1934~1970) 등과 더불어 문단의 기인으로 알려진 천상병 시인은 원래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하지만 1952년 문단에 등단하고 1954년 학교를 그만둔 그는 세속적인 소유 개념을 초월한 채 가난하면서도 궁색하거나 비겁하지 않게 술을 얻어 마시면서 자유롭게 살아갔다.
이 자유로운 시인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면서부터였다. 반공 냉전 체제가 지배하던 시절의 일이다. 중앙정보부는 천상병이 그의 한 친구가 공산국가인 동독을 방문한 사실을 인지하고, 그를 협박하여 수십 차례에 걸쳐 100원 내지 얼마씩 갈취하여 도합 5만여 원을 착복하고는 수사기관에는 범죄자를 고지하지 않은 죄를 범하였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누구에게나 막걸리 값으로 500원, 1,000원씩 뜯어내던 천상병의 일상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석 달, 교도소에서 석 달씩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비록 그해 1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의 심신은 이미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훗날 그는 거기서 겪은 고통을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했노라고 표현했다. 전기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날로 황폐해져 과대망상증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을 시성(詩聖)이라 일컬었지만 그의 시는 점차 논리와 통일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일상에서도 어눌하게, 한 말을 또 반복하고, 침은 늘 입가에 그득한 채 얼굴은 일그러져 가고, 손도 발도 움직임이 어수룩하기만 한, 더 이상 엘리트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1970년 겨울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문우들은 그가 마침내 육체와 정신의 쇠약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참 아까운 시인 하나가 요절했다고, 그래도 시집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친구들은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시를 묶어 당시로서는 호화 장정의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되기에 이르고, 그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 번져 나갔다. 그러자 시립 정신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행려병자로 끌려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정작 천상병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생 앞에 감히 누가 억울하다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쏘냐? 그 역시 앳된 피리 부는 소년이었다. 누가 그의 얼굴에 그토록 일그러진 주름살을 덧입히고 그의 눈에서 광채를 빼앗아 갔던가? 그런데 바로 그가 그러한 자신의 생애를 아름다웠노라고, 아름다웠던 소풍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이(驚異)이고 감동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긴 ‘죽다’의 높임말이 ‘돌아가다’인 것을 보면, 예부터 죽음이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했나 보다. 그런데 그 돌아가는 곳이 ‘하늘’이라면 죽음도 괜찮을 성싶어지지 않는가? 이때 허무는 자리를 비켜선다. 귀천(歸天)이란 말, 말 그대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되는 말이다. 그러니 이는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아예 성립조차 될 수 없는 말이다.
불행한 사실은 그같이 존귀한 존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악다구니같이 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삶을 위한 투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다. 성공의 조건은 부와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들의 실현 정도에 따라 가늠된다.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런 가치 속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다. 세속적 행복을 누린 자의 편에선 그 행복을 놓고 가야 하니 슬플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의 편에선 평생 불행하게만 살다 생을 마감하고 마니 슬플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잠시 놀다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시인은 그래서 인생을 소풍 나온다고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자기 삶의 근원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자신은 단지 이 세상에 잠시 놀러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이승에서의 삶도 천상에서 내려온 소풍쯤으로 생각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이승에서의 삶은 소풍이기에 아름답고, 소풍에서 돌아가는 천상은 천상이기에 아름다울 터이니, 우리의 생(生)을 이승과 저승의 연속성으로 이해할 경우, 인생 전체가 진정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려면 무엇보다 우리네 삶을 소풍처럼 살아야 한다. 소풍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소풍은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없이 즐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가 아닌가? 세속적 욕망을 초월해야만 삶은 그 자체로 유회가 되고 즐거운 소풍이 된다. 모든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이승에서 행복한 소풍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삶은 천상의 삶과도 다를 바 없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피리 부는 소년 같았던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구나 소풍을 좋아했다. 밤잠을 못 이루며 소풍날을 기다리다가 소풍이 시작되면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마음대로 살 수만 있다면야 소풍을 매일, 아니 최소한 좀 더 오래 하고 싶어 했던 게 우리의 바람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저물면 불안해진다. 몸도 피곤하고 급기야 집이 그리워진다. 집에는 엄마의 따스한 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이 소풍과도 같다면, 죽음 또한 받아들일 만한 그 무엇이 된다. 스러지는 이슬과 노을빛, 소멸하는 모든 것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인생이야말로 이슬과 노을처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소풍은 어디까지나 잠시 다녀오는 것. 영원한 가치는 다른 곳, 곧 하늘에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그는 허무조차 느끼지 아니한다.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 끝날 때도 슬퍼하기는커녕,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비슷한 시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최희준은 '하숙생'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하지만 천상병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행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의 집은 하늘이었다. ‘소풍(消風)’의 대구(對句)는 ‘귀가(歸家)’가 적당하거늘 ‘귀천(歸天)이라 이름하였으니 말이다. 천상병, 그는 천상, 천상(天上)의 시인이던가!
이것이 나그네의 방랑과 소풍의 차이다. 둘 다 집 떠나는 것은 같다. 하지만 전자는 오고 감에 정처가 없고 후자는 분명하다. 그래서 전자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 매력이 있는 반면, 먹을거리조차 스스로 구해야 하는 고달픔이 있고, 후자는 김밥 도시락까지 싸 가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그네에게 소풍은 없다.
[출처] '시를 잊은 그대에게,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Humanist, 2016)'
/ 2020.11.17(화) 택..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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