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 만 눈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하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春川)이니까.
―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전문
시인은 1941년생인데, 시는 열서너 살 파릇파릇한 소녀의 마음입니다. 지명을 가리키는 불광동, 냉천동, 문경, 추풍령, 그리고 춘천이라는 말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마음이 천진난만에 가깝습니다. "까닭도 연고도 없이" "느닷없이 불쑥불쑥" 기대하고, 몽롱하게 꿈꾸고, 그러다가 두려워하는, 이 마음의 풍경을 감히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요? 사랑이 문득 설렘과 떨림으로 오듯 봄도 그렇게 옵니다.
당신도 춘천에 가고 싶은가요? 만약에 춘천에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당신의 사랑은 이미 늙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춘천에 가볼 꿈을 꾸십시다. 사철 어느 때라도.
[출처]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문학집배원 안도현의 시배달' (안도현, 창비, 2008)
/ 2020.11.17(화) 택..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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