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을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이대흠, '수문 양반 왕자지' 전문
시인의 짓궂은 시선이 발견한 낙서 하나가 독자에게 유쾌한 선물을 던져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수문댁 옆에 이미 수문 양반은 없다. 갑작스런 병을 얻었거나 사고를 당해 예순에 채 이르지도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고된 삶을 이끌고 혼자 사는 수문댁은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다. 수문댁의 기억속에 남편은 "왕자거튼 사람"으로 오롯이 박혀 있다. "왕자거튼"이라는 말 속에는 지금은 옆에 없는 남편을 향한 한없는 존경과 신뢰의 감정이 실려 있다. 그것은 수문댁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농투성이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 표시이기도 하다.
[출처]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이가서, 2013)
/ 2020.11.17 택..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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