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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이조년과 투금탄 이야기 (2020.11.15)

푸레택 2020. 11. 15. 16:56










































■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이조년과 투금탄 이야기

허준박물관 근처에는 있는 쉼의 공간 허준근린공원에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감상하고 허가바위라고도 부르는 공암바위를 둘러본 후 양천향교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등포공고 앞을 지나는데 길가에 만화로 그려진 '투금탄 이야기'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읽어보았다.

길에서 주은 금덩이를 강물에 버린 두 형제의 이야기인데 어린 시절부터 읽고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일화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조년과 그의 형 이억년이라고 적혀 있다.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다. 이조년이라 하면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라는 고려가요를 지은 사람이 아닌가?

고려 말기 때 이야기다. 어느 날 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우연히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한 덩이를 건네주었다. 어려운 형편에 황금 덩이를 줍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횡재를 한 것이다. 형제는 기쁜 마음으로 길을 재촉했고 곧 양천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던 아우가 돌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깜작 놀란 형이 물었다. "아니 금덩이를 버리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 아우가 대답하기를, "형님! 금덩이를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줄곧 형님이 없었더라면 황금 두 덩이를 몽땅 내가 가질 수 있었을 것이란 욕심이 솟구쳐 형님이 원망스러웠고, 심지어 형님이 가진 금덩어리를 다시 뺏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습니다. 우리 형제가 갑자기 생긴 금덩어리로 우애가 사라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미처 그런 생각을 못한 형도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후에 사람들은 이 양천나루를 투금탄(投金灘)이라 했다. 금덩이를 던진 여울이란 뜻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우는 이조년이고 형은 이억년이다. 고려 중기의 호족이었던 이조년의 부친 이장경은 아들들의 장수(長壽)를 빌며 이름을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이라 지었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이억년과 이조년의 '투금탄 (投金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고려 말 투금탄 이야기는 실화일까, 실존 인물 이조년과 이억년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데 사실일까,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투금탄과 이조년에 관한 자료를 검색을 해 보았다. 투금 형제가 바로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라는 글도 있고, 고려말 어느 이름 모를 형제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글도 보인다. 황금 덩어리를 버렸다는 투금탄은 방화대교 남측에 있고 그곳에 두 형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두 형제의 황금색 조형물 사진도 올려져 있다.

오늘은 한강의 가을 풍경도 구경할 겸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의 조형물을 찾아 나섰다. 서남물재생센터 강서둘레길을 따라 한강쪽으로 산책을 했다. 방화대교에 이르니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듯 낚시를 한다. 드디어 '투금탄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강가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도 두 형제의 조형물이 안 보인다. 분명 방화대교 아래 투금탄 그 자리는 맞는데, 이조년과 이억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방화대교 남쪽 다리 아래에 세워져 있는 투금탄(投金灘) 안내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어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던 중 아우가 금덩어리 두 개를 주워서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楊川江, 지금의 한강 공암나루터, 강서구 가양2동 근처)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이상히 여겨서 물었더니 아우가 대답하기를 "내가 그동안 형을 매우 사랑했는데,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갑자기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금덩어리를 차라리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형도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고는 동생을 따라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ㅡ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고려사절요

이 투금탄 안내판에는 이조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무엇보다 두 형제의 금덩이 이야기가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라고 적혀 있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을 찾아보니 1351년~1374년으로 나온다.

다음백과에는 이조년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이조년(李兆年)은 1269년에 태어나서 1343년에 생을 마쳤다. 고려 때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원로이고 호는 매운당, 백화헌이며 충렬왕 20년에 향공진사로 급제한 후 안남서기, 예빈내급사 등을 거쳐 비서랑이 됐다. 왕유소와 송방영의 이간으로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의 다툼이 치열할 때 진퇴를 삼가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억울하게 연루돼 유배당했다. 이후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돼 있을 때 원나라에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 충숙왕을 환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숙위할 때에는 방탕하게 생활하는 것을 경계해 글을 올려 왕을 달아나게 했다. 충혜왕에게 방탕을 멈추기를 간청했지만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 죽었다.

투금탄의 투금형제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조년 선생이 지은 고시조를 읊어본다. 한밤중 달이 걸린 배꽃을 보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든다고 노래한 '이화에 월백하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옛시조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흘러서 자정을 알리는 때,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애틋한 마음을 두견새야 알겠느냐마는 정이 많은 것도 병인 것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는 일명 다정가(多情歌)라고도 일컫는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해설이 수없이 많다. 그중 몇 개만 옮겨 본다.

‘다정가’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자연을 소재로 한 동시대의 작품들이 자연에 대한 단순몰입에 그쳤던 것과 달리 자연물을 통해 현대적 의미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과 시 전편을 통해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받는 작품이다. 또한 충렬왕의 계승 문제로 당론이 분열되었을 때 작가가 모함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이 작품을 지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금에 대한 걱정과 유배 생활의 애상을 읊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어로 풀이해 보면 이렇다.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꽃 나뭇가지에 어려 있는 봄날의 정서를 두견새가 알고서 저리 우는 것일까마는 다정다감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고려말인 이조년 선생은 매우 강직한 분으로 원나라에 예속된 당시 고려왕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쓴소리를 주저치 않았고 결국 뜻이 맞지 않아 낙향했지만, 우국충정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어느 봄날 밤, 선생은 여느 때와 같이 잠 못 들고 서성이다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밤 환한 달빛 속에서 더욱 하얗게 빛나는 배꽃의 향기에 절로 취했을 것이다. 마침 하늘에서는 은하수가 바다처럼 흐르고 두견새의 울음 소리가 무척 구슬프게 들려왔을 것이다. 참으로 아련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아닐 수 없다.

퇴계 이황 선생은 이조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이조년은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다"

/ 2020.11.15(일) 깊어가는 가을날.. 김영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