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단편소설 베스트 100(휴이넘)에 실려있는 이청준의 소설 '줄광대'를 읽었다. 오래전에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 줄광대 / 이청준
운이 열한 살 되던 해였다.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엘 갔다가 시들해져 돌아온 운을 보고 허노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ㅡ세상에는 줄광대가 밟을 만한 땅이 흔찮을 게 당연하지.
그러고는 운에게 줄타기를 가르치기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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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때 이미 그는 언뜻 보기에 허 노인과 다름없이 줄을 탔다. 그러나 허 노인은 운을 사람들 앞에서 줄을 오르게 하려는 눈치가 안 보였다. 하지만 운은 그 허 노인에게 섣불리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운은 허 노인을 무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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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해 운이 어느 날 아버지 허 노인에게 속마음을 떴다.
ㅡ아버지, 저도 이젠 사람들 앞에서 줄을 탔으면 합니다.
♤ 줄거리
'나'는 부장의 명령으로 '승천한 줄광대'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C읍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예전에 서커스단에서 트럼펫을 불던 사나이로부터 줄광대 부자(父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내가 서커스 단장과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아내의 목을 졸라 죽게 한 아버지 허 노인으로부터 운은 엄격하게 줄타기를 배운다. 그런데 아들에게 줄타기를 가르친 지 5년 만에 허 노인은 아들과 줄을 타다가 줄에서 떨어져 죽는다. 어느 날 공연을 마쳤을 때, 한 여인에게서 꽃다발을 받은 운은 그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여인은 이를 거부한다. 여인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줄 타는 모습이었음을 깨달은 운은 줄 위에 올라 최후의 연기를 하다 죽는다. 줄광대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다음 날 C읍을 떠나기 전 트럼펫 부는 사내에게 인사하러 가던 중 그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 이해와 감상
이청준의 '줄'은 줄광대로서의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허 노인의 모습과 그러한 삶 속에서 갈등하는 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장인 정신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신문 기자인 '나'를 중심으로 한 바깥 이야기와 2대에 걸친 줄광대의 삶을 중심으로 한 안 이야기로 구성된 액자 소설이다. 줄광대 허 노인과 아들 허운은 줄을 탈 때에는 오직 줄타기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철저한 장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허 노인은 줄타기를 삶의 절대적인 가치로 인식하고 실천하며, 허운 역시 그런 아버지의 가치관을 이어받아 줄타기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전달자로 머무르지 않고, 줄광대 부자와 대조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허 노인의 삶에 담긴 진지함이나 몰입을 '나'에게서 찾기란 어렵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살았던 허 노인, 재주를 부리면서 줄타기의 절대적 가치에 회의하고 갈등하던 운,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일상에 젖어 있는 '나'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하고 있다.
♤ 작가 이청준 별세 (2008.7.31)
1965년 '퇴원'으로 등단, 120여 편의 중단편과 11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수편의 판소리동화에 이르기까지 서구 소설 장르의 한국적 갱신의 과정이라는 평을 들었던 소설가 이청준. 그가 지난 31일 새벽 1시경 향년 6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로 더 잘 알려진 소설가 이청준 씨는 '밀양'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1939년 8월,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60년대 우리나라 소설 문학의 한 장을 연 이청준은 지난해 폐암을 선고 받고 그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며 병마와 싸워오다 최근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약물 치료를 받아왔다.
♤ 31일 타계한 이청준의 삶과 문학
자유와 절망, 토속과 예술… 다양하고 뚜렷한 주제의식 ‘인간존재’의 의미에 천착
31일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씨는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로 꼽힌다. 장편 ‘당신들의 천국’, 단편 ‘벌레이야기’ 등의 작품에서 보듯 그는 40여년 문단생활 동안 인간 존재의 의미를 특유의 성찰적 시선으로 천착해왔다. 문학평론가 우찬제(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 현대소설사를 가장 빛낸 대표적인 ‘지성 작가’로 이청준 선생을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현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난 작가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여섯살 때 세살짜리 아우를 홍역으로, 반년 뒤에는 형을 결핵으로 떠나보냈다. 그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 같은 불행은 훗날 더없는 문학적 자양이 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두운 다락방에서 형이 남긴 소설책과 메모, 독후감 등을 읽으며 죽은 형과 ‘영혼의 대화’를 나눴다. 이때 죽음이 결코 죽은 자와의 관계를 끊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는 형을 대신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끝간 데를 모르는 지성의 저력
광주서중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 ‘대처(大處)’로 나오게 된 작가는 도회(都會)에 대한 동경과 절망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됐다. 이는 그가 문학청년이 되는 동기가 됐다.“도회지의 현실에 끼어들지 못하니 문학으로라도 끼어들고 싶어 문학에 정진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청준의 문학 세계는 여느 작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다양하다. 토속적 민간신앙에서부터 산업화사회의 인간 소외, 언어에 대한 탐색, 예술과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쏟아낸 지성의 저력은 끝간 데를 모른다. 문학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어떤 주제든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 고인은 작가로서의 직업의식이나 지성으로서의 작가 의식에서나 괄목할 만한 저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청준 문학의 뿌리이자 키워드는 고향과 어머니다.‘눈길’ ‘새가 운들’ ‘연’ ‘빗새 이야기’ ‘축제’ 등 많은 작품들은 바로 ‘망향가’이자 ‘사모곡’에 다름 아니다. 일찍 아버지를 떠나보내 어머니로부터의 곡진한 모정을 한층 절실히 느끼게 된 작가는 산문 ‘이 나이의 빚꾸러미’에서 “내 삶과 문학에 대한 은혜를 따지면야 그 삶을 주고 길러준 고향과 그 고향의 얼굴이라 할 어머니를 앞설 자리가 없다.”고 고백했다. 심정섭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는 이청준에 대해 쓴 글에서 “그가 판소리와 남도창을 좋아하는 것은 애초부터 고향의 땅과 밭두렁 논두렁에 맺은 약속으로 인해 이뤄진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서울대 독문과에 입학하면서 곧바로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경험한 만큼 그의 초기작품에는 자유와 절망의 긴장감이 넘친다.4·19혁명에서 자유의 단초를 봤다면,5·16쿠데타에서 절망의 현실을 경험한 셈. 그런 맥락에서 ‘퇴원’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같은 작품은 정치의식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대신 그의 작품은 환자들의 고통에 주목하고 상처를 위무하는 쪽으로 기운다.
‘서편제´ 등 영화화… 대중과 더 가까이
작가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전통적 장인의 세계를 파고들기 시작, 판소리의 세계를 서사화한다. 현실의 한을 소리로 풀어낸 ‘남도사람’ 연작과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울러 절망적인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담론으로서의 소설’을 선보이기도 한다. 말과 현실이 어긋나고 안과 밖이 어우러지지 못하는 현실을 형상화한 ‘언어사회학서설’ 연작과 ‘당신들의 천국’ 등이 그런 경향을 대표한다.
/ 2020.11.05(목) 편집 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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