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단풍 드는 날 도종환,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김현태, 가을 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20.09.22)

푸레택 2020. 9. 22. 18:02












■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를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 김현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낙엽 하나 뒤척거려도 내 가슴 흔들리는데
귓가에 바람 한 점 스쳐도
내 청춘 이리도 쓰리고 아린데
왜 눈물겹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한다기에
그저 한번 훔쳐본 것 뿐인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메스꺼운 너울 같은 그리움
왜 보고 싶은 날이 없겠습니까

하루의 해를 전봇대에 걸쳐놓고
막차에 몸을 실을 때면
어김없이 창가에 그대가 안녕하는데
문이 열릴때 마다
내 마음의 편린들은 그 틈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데
왜 서러운  날이 없겠습니까

그립다는 말
사람이 그립다는 말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저 달빛은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두고두고 오래도록 그리워해야 한다는 말
어찌 말처럼 쉽겠습니까

달빛은 점점 해를 갉아먹고
사랑은 짧고 기다림은 길어지거늘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비라도 오는 날엔
기댈 벽조차 그리웠습니다

■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 2020.09.22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