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의 편지 / 허재환
우리 세대는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을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더욱이나 시골에 살다보니 파스텔 구경해 본 것이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되어서였을까. 딸이나 조카들 대부분이 미술이나 디자인 전공을 하고 있어 가끔 아내가 자신은 미술에 너무 재주가 없다면서 딸이 그림을 선택한 것이 아빠 닮지 않았느냐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 얼굴 하나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으니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믿지를 않는다.
고등학교 때 적성검사를 했는데 미술이 99가 나오고 나머지 모두 100이 나왔다. 이러니 내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난감해 졌었다. 어떻게 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지나고 보니 언어, 사학 등 어떤 것을 선택해도 잘 했겠다 하는 생각이 나기도 한다. 물리학을 제외하고.
시골에서 살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초반에 전주로 전학을 갔다. 시골 촌놈이 배운 내용도 다르고 하여 제대로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시험을 보는데 같은 반 친구 몇 명이 컨닝을 하길래 난 시골과 배운 내용도 다르고 해서 나도 보자 하고 책상 밑에 교과서를 펴고 보다가 그만 담임에게 걸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손이 퉁퉁 부어 일주일은 고생을 하였다.
그 후로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며칠 동안 만화방으로 놀이터로 여기저기 다니며 결석을 하다가 공부에 완전 흥미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일류 중학교는 떨어지고 후기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반에서 꼴찌에 가까워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담임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 하는 완전 무척추동물 같은 삶을 살다가 졸업을 했고 고등학교는 바로 옆 전주공고를 들어갔다.
입학은 하였어도 목표가 없으니 매일 친구들과 놀기만 하니 아버지가 "너 뭐하고 싶으니?" 해서 "몰라요"라고 대답을 하니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재환아 너 그렇게 공부하기 싫으니?" 해서 "네" 라고 대답을 했다. 며칠 후 "너 서울 가서 장사할래?" 하시길래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네" 하니 아버지는 등록금을 돌려 받으시려는 생각에 바로 학교에 가셔서 자퇴 처리를 하고 교과서도 반납을 하였다.
그 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친척들이 장사하고 계시던 남대문시장 지하상가의 건어물 좌판대를 혼자 맡아 하라며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하고 도매가와 소매가를 적어서 주셨다. 그런데 공부가 싫어 올라온 내가 장사를 잘 하겠어요? 결국 그것도 얼마 못가서 못하겠다 말씀드리고 때려 치운 후 서울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 때 형이 서울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하였는데 동생은 형의 자취집에서 아무 생각없이 놀며 보냈으니.. 그러다가 고향 임실에 갔다가 내가 초등학교 친구들과 화투치는 것을 친척 어르신이 보시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바람에 전주에서 다시 서울로 도망을 쳤다.
얼마 후 부모님이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첫 장의 아버지 편지에는 "재환아, 이 나쁜 놈아! 널 만나기만 하면 다리를 몽둥이로 부러뜨려 버리겠다"고 쓰셨고, 어머니는 "재환아,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 에미는 네가 공부 잘하길 바라지 않는다. 단지 네가 고등학교 교복 입은 모습만 보고 싶구나!" 하셨다.
그 말에 가슴이 뚝 떨어지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하다가 그래 고등학교를 들어가자 결심하고 10월 말에 밤기차 타고 집으로 내려왔는데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 뭘 알아야 공부하죠? 첫 달은 종합반에 들어갔으나 시간만 흘러서 남은 한 달 반은 고민하다 혼자 '9년 고등학교 입시 문제집'을 사서 통째로 외웠다. 침대에서 공부하고 먹고 자며 미치도록 공부를 처음 해 보았는데, 형이 예전에 공부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나름 흉내를 내서 그 방법대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철이 되어 어머니가 "너 어느 학교 시험 볼래?" 하시길래 "전주고요" 하니, 어머니가 "아니, 전주고?" 하며 핀잔을 주셨지만 그래도 시험을 보겠다고 우겼다. 당시 동일계 무시험 진학을 하고 두 학급 120명을 추가로 뽑았는데 경쟁률이 7.2:1였다. 사실 그당시 나는 경쟁률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내가 55등으로 합격을 하자 모두들 놀라 자빠졌다. 특히 어머님이.
나도 살면서 처음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꼈다. 그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은 교회 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밤 12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고3 때 대학 입학원서를 쓸 때 담임 선생님에게 "저 어디 지원할까요?" 하니 "서울공대 가라" 하셨다. 그래 내가 "전 가난해서 떨어지면 재수 못하는 데.." 하니 "그럼 사대 가라. 넌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셔서 집에서는 공대나 약대 가는 줄 알았는데 사대를 가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물리를 싫어하였는데 어떻게 하다가 이 과에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 때문이다. 난 시험은 잘 치루었다. 그 당시 서울의대 커트라인이 329점이었는데 나는 337점을 얻었다. 서울공대는 322점이었다. 그런데 부모 곁을 떠나 형과 자취하면서 내 주변 친구들이 하나도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 매일 같이 바둑이다 마이티다 같이 놀다 보니 1학년 학점이 형편 없어 수학과에 못 가고 서울로 배정이 쉽다고 형이 추천하여 물리과를 가게 된 것이다.
청소년 시절 내가 아무 생각없이 살며 방황하던 기간이 길어서 그때 일을 친구에게 글로 정리를 해 보낸 적이 있었다. 이 글이 바로 그때 쓴 글이다. / 허재환
ㅡ 충남 서천에서 보내온 수필 편지
♤ 40년 지기 교육 동료 허 박사의 '부모님의 편지'를 읽고..
충남 서천에 귀촌하여 농사도 짓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도 하며 살아가는 40년 지기 교육 동료인 허재환 교장이 오늘 제2탄 수필 한 편을 보내왔다. 혼자 읽기 아까워 내 블로그에 옮겨 싣는다. 허 박사는 전주고와 서울대 물리교육학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교사, 장학사, 교감을 거쳐 고등학교 교장(잠신고)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전형적인 교육자이다.
허 박사와의 인연은 40년 전 젊은 교사 시절 상도중학교 때부터이다. 상도중학교 교사 시절 허 교사는 매사에 성실하고 열정적이었으며 뛰어난 실력과 발군의 리더십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여 내게는 천재성이 있는 반듯한 모범 교사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가 과학과 어학 분야에 재능이 뛰어난 열정적인 교육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청소년 시절 방황하고 도전했던 이야기를 들으니 또다른 그를 만난 듯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과도 같은 드라매틱한 그의 성장 스토리는 이 수필을 읽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리라 믿는다.
허 교장은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옌타이한국국제고등학교(烟台韩国国际学校)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이 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대학 동기 한천옥 선생의 초청으로 산둥성에 있는 태산과 공자의 고향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옌타이한국국제고등학교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교장실에 걸린 역대 교장 중 초대 교장인 허 박사의 사진을 보고 참 반가웠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2017년 6월 허 교장의 정년퇴직을 앞두고 그의 물리교육과 선배인 한천옥 교감과 조 박사와 함께 잠신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잠신고는 20년 전 내가 근무했던 학교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옛 추억이 담겨있는 교정 구석구석을 둘러 보았었다. 교장실 허 교장의 깔끔한 책상 위엔 '야생화 도감'만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귀촌을 꿈꾸는 그의 마음이 그 책 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을 그땐 미처 몰랐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서천에 귀촌한 허 교장의 전원일기를 앞으로도 계속 읽고 싶어진다.
/ 2020.09.14 김영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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