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부원(多富院)에서 / 조지훈
한 달 농성(籠城)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攻防)의 포화(砲火)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多富院)은 이렇게도
대구(大邱)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自由)의 국토(國土)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荒廢)한 풍경(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犧牲)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姿勢)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屍體)
스스로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傀儡軍) 전사(戰士)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多富院)
진실로 운명(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者)도 산 자(者)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한국 전쟁 기간에 종군 문인단에 소속되어 있던 작가가 다부원에서의 전쟁의 참상을 보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아픈 상처들이 남아 있는 다부원을 본 시인의 감회가 사실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작품이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면서도 휴머니즘적 시각을 놓치지 않고 전장의 참혹함을 그려 나가고 있다.
전체가 11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4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락(1~3)에서는 치열했던 다부원 전투의 현장을 다시 찾은 감회를, 두 번째 단락(4~7)에서는 전쟁이 남긴 잔혹하고 잔인한 풍경을, 세 번째 단락(8~9)에서는 그 전쟁이 남긴 비인간적인 상처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 단락(10~11)은 이 시의 주제연이라 할 수 있는데, 전쟁이 패배한 쪽에게는 물론이고 승리한 쪽에게도 아무런 '안식'도 '안주'도 되지 못함을 이야기함으로써 전쟁에서의 희생이 무의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전쟁이 주는 참혹함과 생명 말살의 현장을 바라보는 화자의 안타까운 시선에서 전후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인 휴머니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이러한 휴머니즘적 태도는 5연의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라는 질문과 11연의 '무슨 안식이 있느냐', 12연의 '안주의 집이 없고'라는 표현에 짙게 배어 있다.
한국 전쟁은 극단적인 절망감을 가져왔고, 그 결과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에 대해 '죽음'이라는 답밖에는 제시할 수 없었으며 인간성은 황폐화되었다. 한국 전쟁 직후의 전쟁을 주제로 한 시들이 충격적인 전쟁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거나 전쟁의 비극성을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문제로 끌어올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한 비탄이나 자조와 넋두리로 표출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한국 전후 문학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출처] 다음 백과, 교과서 시 여행
/ 2020.06.14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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