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동네 목사님 / 기형도 시인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 나무 그늘에서 / 조병화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노라니 이 편안함, 많은 고난의 그 속세를 벗어난 고마움이어라 나무도 그 많은 고난의 속세에서 살아 남아, 이 만큼의 큰 그늘을 내리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인내로운 세월을 견디어 냈으리, 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 한량 없어라 나무는 매서운 생존의 세월을 견디어 내면서 이렇게 무성히 자라나 길 가는 나그네에게 자비로운 그늘을 내리고 있는데 나는 지금 인생 마지막 세월을 가면서 몇 평의 그늘로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의 세월을 키우는 것이려니 스스로 키운 만큼의 세월의 나무로 있으려니 나의 세월의 나무 그 그늘에서 쉬어 가는 나그네 있으려나 아, 세월은 가고 나는 여기 있고
/ 2020.06.16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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