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잉여 인간(剩餘人間) /
만기(萬基)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오는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익준은 반가운 낮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흥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 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 저고리를 벗어 붙이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기 때문이다.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닥에 물을 뿌리고 방구석이나 테이블 밑까지도 말끔히 쓸어내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을 서는 그의 성품은 이런 데도 잘 나타났다. 청소가 끝나면 익준은 작달막한 키에 가로 퍼진 그 둥실한 몸집을 대합실 의자에 내어 던지듯 털색 걸터앉아서 신문을 본다. 그러노라면 원장과 천봉우가 대개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도 간호원을 도와 실내 청소를 마치고 난 익준은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펴들었다. 아마도 세상에 그처럼 충실한 신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 구독하고 있는 두 종류의 신문을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시간을 소비해 가며 첫줄 첫자에서 끝줄 끝자까지 기사고 광고고 할 것 없이 하나도 빼지 않고 죄다 읽어버리는 것이다. 익준은 또한 그저 신문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거기 보도된 기사 내용에 대해서 자기류의 엄격한 비판을 가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익준은 신문을 보다 말고 앞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격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천하에 이런 죽일 놈들이 있어?”
참지 못해 신문을 든 채 벌떡 일어섰다. 익준은 진찰실로 달려 들어가서 그 신문지를 간호원의 턱 밑에 들이대며,
"미스 홍, 이걸 좀 봐요. 아니 이런 주리를 틀 놈들이 있어 글쎄!"
눈을 부라리고 치를 부르르 떨었다. 신문 사회면에는 어느 제약 회사에서 외국제 포장갑을 대량으로 밀수입해다가 인체에 유해한 위조품을 넣어 가지고 고급 외국약으로 기만 매각하여 수천만 환에 달하는 부당 이득을 취하였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인숙이가 그 기사를 읽는 동안 익준은 분을 누르지 못해 진찰실과 대합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혼자 투덜거렸다. 이윽고 인숙에게서 신문지를 도로 받아든 익준은 그것을 돌돌 말아가지고 옆에 있는 의자를 한번 딱 치고 나서,
"그래 미스 홍은 어떻게 생각해. 이놈들을 어떻게 처치했으면 속이 시원하겠느냐 말요?"
마치 따지고 들 듯했다.
"그야 뻔하죠 뭐. 으레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 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익준은 한층 더 분개해서 흡사 인숙이가 범인이기나 한 듯이 핏대를 세우고 대드는 것이었다.
"뭐라구?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 게라? 아니 그래 이 따위 악질도배들을 그 뜨뜻미지근한 의법 처단으루 만족할 수 있단 말요? 미스 홍은 그 정도루 만족할 수 있느냔 말요. 무슨 소리요, 어림없소. 이런 놈들은 그저 대번에 모가질 비틀어 버리구 말아야 돼, 아니 즉각 총살이다. 그저 당장에 빵빵 하구 쏴 죽여 버리구 말아야 돼. 그러구두 모가지를 베어서 옛날처럼 네거리에 효수를 해야 돼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단 말요!"
"어마, 선생님두 온. 끔찍스레 그렇게까지 할 게 뭐예요!"
"끔찍하다? 아 그럼 그 놈들을 몇만 환의 벌금이다, 몇 년 징역이다 하구 감방 속에 피신시켜 놓구 잘 처먹구 낮잠이나 자게 하다가 세상에 도로 내놔야 옳단 말요?"
익준은 잠시 인숙을 노려보듯 하다가,
"이거 봐요, 미스 홍.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못 사는지 알우? 우리나라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피폐해 가는지 알우? 모두가 이 따위 악당들 때문이요. 이거 봐요, 그런 놈들은 말야 이완용이나 마찬가지 역적이요! 나라야 망하든 말든 동포들이야 가짜 약을 사 쓰구 죽든 말든 내 뱃대기만 불리면 그만이라구나 생각하는 그딴 놈들은 살인강도 이상의 악질범이오. 그런 놈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으니까 유사한 사건이 꼬리를 물구 발생한단 말이오. 난 그 놈들의 뼈를 갈아 마셔두 시원치 않겠소……."
익준은 아직도 분을 끄지 못해 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는 대합실 의자에 돌아가 앉아서 다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잠자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푸 내쉬고는,
"천하에 죽일 놈들 같으니……."
내뱉듯 하고 비참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가 나머지 기사를 죄다 주워 읽고 차츰 흥분도 가라앉을 때쯤 해서야 이 병원의 주인이 나타났다. 서만기 원장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가방을 들고 문 안에 들어선 것이다.
"어서 나오게!"
익준은 늘 하는 식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서 만기가 횐 가운을 걸치고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여보게 만기, 세상에 그래 이런 날도둑놈들이 있나!"
그렇게 개탄하고 신문을 펴들고 만기 곁으로 가 앉는 익준의 얼굴은 흥분으로 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만기는 여전히 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지 않아두 집에서 신문을 보구 자네가 또 몹시 격분했으리라구 짐작했네."
그러면서 담베 케이스를 열고 먼저 익준에게 권하였다. 권하는 대로 익준은 손을 내밀어서 한 대 뽑아 들었다.
"이게 나 혼자만 격분할 일인가? 그럼 자네나 딴 사람들은 심상하다. 그 말인가?”
"아니지. 남달리 정의감과 의분이 강한 자네니까 남보다 몇 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말일세. 그렇지만 혼자 흥분해서 펄펄 뛰면 뭘 하나!"
만기도 탄식하듯 하였다. 둘이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정의감의 강약이 문젠가, 이 사람아. 그래 이런 극악무도한 놈들을 보구 가만하구 있을 수 있겠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데 잠자쿠 있을 수 있느냐 말야!"
익준은 만기가 함께 흥분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봉우가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문 안에 들어섰다. 언제나 다름없이 수면 부족이 느껴지는 떠름한 얼굴이다. 그는 먼저 인숙이 쪽을 바라보고 다음에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면서 멋쩍게 씩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거의 자기 자리로 정해진 대합실 소파의 맨 구석자리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그러자 자기의 흥분을 같이 나눠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듯이 익준은 탁자 위에 놓았던 신문을 집어서 봉우 눈앞에 바루 가져다 댔다.
"봉우, 이거 봐. 글쎄 이런 능지처참할 놈들이 있느냐 말야."
익준은 핏대를 세우며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봉우는 선잠을 깬 사람처럼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익준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흥미 없이 신문을 받아들었다.
"뭐 말이야?“
"뭐 말이야가 뭐야, 이런 빙충이 같은 녀석, 아 그래 자네 눈깔엔 이게 안 뵌단 말야?”
화가 동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익준은 손가락 끝으로 톱 기사의 먹 같은 활자를 찔렀다. 봉우는 강요하듯이 제목을 입속말로 읽었다. 내용은 마지못해 두어 줄 읽다가 말았다. 이어 딴 제목들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봉우는 도로 신문을 접어서 탁자 위에 얹었다. 그러더니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쳐다보고 웃으려다가 말았다. 익준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봉우는 동정을 구하듯 하는 눈동자로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았다.
"임마, 그래 넌 아무렇지두 않단 말야? 눈뜬 채 코를 베어 먹히구두 심상하단 말야?”
"누가 코를 베어 먹혔대? 난 잘 안 봤어."
봉우는 얼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익준은 그 신문지를 낚아채서는 탁자 위에다 힘껏 동댕이를 리고 나서,
"이런 쓸개 빠진 녀석……. 에잇, 난 다신 자네들과 얘기 않네!"
우뚤해 가지고 홱 돌아서더니 댓바람에 문을 차고 나가 버리었다.
익준이 다시는 안 올 듯이 밖으로 사라지자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있던 봉우는 다시 신문을 집어 들고 기사 제목을 대강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봉우는 언제나 그랬다. 게슴츠레한 낯으로 대합실에 나타나면 익준이 한 자 빼지 않고 샅샅이 읽고 놓아 둔 신문을 펴들고 건성건성 제목만 되는 대로 주워 읽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처럼 말없이 우두커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자주 간호원에게로 갔다. 그때만은 그의 눈도 노상 황홀하게 빛난다. 그러다가 간호원과 시선이 마주치면 봉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빼빼 말라붙은 몸집에 키만 멀쑥하게 큰 그는 언제나 말이 적고 그림자처럼 조용하다. 어딘가 방금 자다 갠 사람 모양 정신이 들어 보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는 대합실 구석자리에 앉은 채 곧잘 낮잠을 즐긴다. 봉우의 낮잠 자는 모양이란 아주 신기하다. 소파에 앉은 대로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얹고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고 자는 것이다. 그는 밤에 집에서 잘 때에도 자세를 헝클지 않는다고 한다. 천장을 향하고 반듯이 누우면 다음 날 아침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잔다는 것이다. 그러한 봉우는 언제나 수면 부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6.25사변을 치르고 나서부터 현저해졌다는 것이다. 전차나 버스를 타도 자리를 잡고 앉기만 하면 그는 으레 잠이 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자다가도 그는 자기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다. 자면서도 그는 차장의 고함 소리를 꿈속에서처럼 어렴풋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밤에 집에서 잘 때에도 그렇다. 자는 동안에도 그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 재깍재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 천장이나 부엌에 쥐 다니는 소리, 아내나 아이들의 잠꼬대며 바깥의 바람 소리까지도 들으면서 잔다. 말하자면 봉우는 오관 중 다른 감각기관은 다 자면서도 청각만은 늘 깨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자연 깊은 잠을 이루지 못 한다 그렇게 된 연유를 그는 6.25사변으로 돌리는 것이다. 피난 나갈 기회를 놓치고 적치 삼 개월을 꼬박 서울에 숨어 지낸 봉우는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잠시도 마음 놓고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밤이나 낮이나 이십사 시간 조금도 긴장을 완전히 풀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처럼 불안한 긴장 상태가 어느덧 고질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꼬집어 말하면 그는 자면서도 깨어 있고, 깨어 있으면서도 자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는 밤낮없이 자면서도 항시 수면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오는 증상이기보다는 더 많이 정신적인 데서 결과하는 심리적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봉우는 자연 무슨 일에나 깊은 관심과 정열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중학 시절에는 그토록 재기 발랄하고 야심가였던 그가 일단 현실 사회에 몸을 잠그고 부대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무슨 일에나 시들해지기 시작하더니 전란통에 양친과 형제를 잃고 난 다음부터는 영 딴 사람처럼 인간 만사에 흥미를 잃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자기 아내에게까지 남편다운 관심과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달이면 절반은 사업을 합네, 혹은 친정에 가 있습네 하고 집을 비우기가 일쑤인 봉우 아내는 여러 가지 불미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었다.
그 여자는 본시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봉우와 결혼한 지 여덞 달 만에 낳은 첫 아기가 봉우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둘째 아이 역시 누구의 아인지 알게 뭐냐고 봉우 자신 신용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둘이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만기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활동 의욕과 생활력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한 봉우는 아내의 부양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경제 활동이 비범한 봉우 처는 무슨 짓을 하며 나가 돌아다녀도 말썽을 부리지 않으니 어쨌든 봉우가 편리한 남편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봉우는 그만큼 가정에 대해서나 세상일에 무관심한 인간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단 한 가지 간호원인 인숙 양을 바라볼 때만은 잠에서 덜 깬 사람같이 언제나 게슴츠레하던 그의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의 눈다웁게 빛나는 것이었다. 봉우는 인숙을 사랑하고 있는 성싶었다.
그러고 보면 봉우가 날마다 이 병원 대합실을 찾아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로지 인숙을 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거동으로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만기와 인숙이가 병원문을 잠그고 한길로 나서면 물론 봉우도 그림자처럼 따라나선다. 그러면 인숙은 만기와 봉우에게 인사를 남기고 헤어져 전차 정류장 쪽으로 간다. 거기서 인숙이가 전차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봉우가 옆에 척 따라와 서 있는 것이다.
"어마, 선생님 어디 가셔요?”
인숙이가 의외란 듯이 물으면 봉우는 아이들 모양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어기 좀……."
그러고는 자기도 같이 전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인숙이가 전차를 타면 얼른 봉우도 따라 오른다. 전차 안에서도 봉우는 별로 말이 없이 인숙이 곁에 서 있다가 인숙이가 내리면 그도 따라 내리는 것이다. 인숙은 한참 와서 걷다가 자기 집 골목 어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그럼 안녕히 다녀 가세요."
머리를 숙이고 나서 인숙이가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면 봉우는 처량한 표정을 하고 서서 인숙의 뒷모양을 지켜보다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풀이 죽어서 발길을 돌이키는 것이었다. 봉우는 거의 매일 그러하였다. 어떤 기회에 인숙에게서 우연히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만기는 단순히 웃어 버릴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만기와 익준이와 봉우는 중학 시절에 비교적 가깝게 지낸 사이지만 가정 환경이나 취미나 성격이나 성장해서의 인생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만기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활동적인 타입도 아니지만 봉우처럼 유약한 존재는 물론 아니었다. 반대로 외유내강한 사내였다.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함부로 부딪히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자기의 능력과 노력과 성의로써 차근차근 자기의 길을 뚫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일에 부닥치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대해서도 도리어 반감을 느낄 만큼 그는 침착하고 기품 있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본시 천성의 탓이라고도 하지만 한편 그의 풍부한 교양의 힘이 뒷받침해 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문벌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화초 가꾸듯 정성어린 어른들의 손에서 구김살 없이 곧게 자라난 만기는 예의범절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을 뿐 아니라 미술, 음악, 문학을 비롯해서 무용, 스포츠, 영화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와 고급한 감상안을 갖추고 있었다. 크레졸 냄새만을 인생의 유일한 권위로 믿고 있는 그런 부류의 의사와는 달랐다. 게다가 만기는 서양 사람처럼 후리후리한 키와 알맞은 몸집에 귀공자다운 해사한 면모를 빛내고 있었다. 또한 넓고 반듯한 이마와 맑고 잔잔한 눈은 그의 총명성과 기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누구를 대해서나 입을 열 때는 기사(碁士)가 바둑돌을 적소에 골라 놓듯이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을 한 마디 신중히 골라 썼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와 침착한 언동으로 남에게 친절히 대할 것을 잊지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 그는 영국풍의 신사였다. 자연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이면 군계일학 격으로 그의 품격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한편 같은 치과 의사들 가운데서도 기술이 출중한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근방에 있는 딴 치과에게 많은 손님을 뺏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단지 시설이 빈약하고 병원 건물이 초라한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만기로서는 딴 도리가 없었다. 좀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해서는 목 좋은 곳에 아담한 건물을 얻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는 길밖에 없는데 현재의 경제 실정으로는 요원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나마도 병원 건물은 물론 시설 일체가 만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건물이나 기구 일부분이 봉우 처가의 소유물인 것이다. 봉우의 장인이 생존했을 당시 빚값에 인수했던 담보물이었는데 막상 팔아치우려고 하니 워낙에 구식인데다가 고물이어서 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6.25사변 이래 줄곧 세를 놓아오던 터였다. 그것을 봉우의 소개로 만기가 빌려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달이 그 셋돈을 받으러 오는 것은 봉우 처였다. 친정에서도 도리어 오빠들보다 발언권이 강한 봉우 처는 종내 오빠를 휘어잡아 병원 건물과 거기에 딸린 시설을 거의 자기 소유나 다름없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봉우 처로 말미암아서 만기는 난처한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봉우 처는 툭 하면 병원을 찾아왔다. 한 달에 한 번씩 셋돈을 받으러 들르는 외에도 치석(齒石)이 끼었느니 입치(入齒)가 어떠니 충치가 생기는 것 같다느니 핑계를 내걸고 걸핏하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봉우 처는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풍요한 육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경우 물론 봉우 부부는 대합실에서 서로 얼굴을 대하게 마련이나 잠간 보고는 그만이다. 모르는 사이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일조차 거의 없다. 봉우는 이내 도로 반수반성(半睡半醒) 상태에 빠지고 그 아내는 만기에게 친밀한 미소를 보내며 다가앉는 것이다. 얼마 전 치석 소제를 하러왔을 때 일이다. 얼굴을 젖히게 하고 만기가 열심히 잇사이를 긁어내고 있노라니까 눈을 감고 가만하고 봉우 처가 슬며시 만기의 가운자락을 잡아당기었다. 그러면서 눈을 감은 채 배시시 웃었다. 만기는 내심 적지 아니 당황하여 얼른 봉우 아내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여인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서 끌어당기었다. 만기는 할 수 없이 봉우나 딴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몸으로 가리듯이 하며 다가서서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대강 치석을 긁어내고 양치질을 시켰다. 봉우 처는 그제야 만기의 가운 자락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놓고 컵에 준비된 물을 머금고 울렁울렁 입을 부셔냈다. 그러더니,
"아파서 그랬어요?”
만기를 쳐다보며 변명하듯 하고 애교 있게 웃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충치가 생긴 것 같아 들렀다고 눈이 부시게 차리고 나타난 봉우 처는 만기의 지시도 없이 치료 의자에 성큼 올라앉았다. 만기가 다가가 어디 입을 벌려 보라고 하니까 봉우 처는 지긋이 눈을 찌그리며 웃어 보이고는 일부러 그러듯이 입술을 오물오물하다가 겨우 삼 분의 일쯤 벌리고 말았다,
"좀 더 힘껏, 아ㅡ"
그래도 여자는 다시 입술을 오물오물해 보이고는 역시 삼 분의 일쯤 벌리고 그만이었다. 그리고는 미태(媚態)를 담뿍 담은 눈으로 연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부터 만기는 의식적으로 봉우 처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본시가 만기에게는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편이었다. 여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만기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이려고 애쓰곤 하였다.
사철을 가리지 않고 국산지 춘추복 한 벌로 몇 년을 두고 버티어 오는 가난한 치과 의사지만 귀공자다운 그의 기품 있는 풍모와 알맞은 체격과 교양인다운 세련된 언동이 여자들로 하여금 두말없이 매혹케 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그의 처제까지도 그를 사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 그 부인이 가끔 농담삼아 만기에게 이런 말을 걸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코 잘난 남편을 섬길 게 아닌가 봐요?”
"그게 무슨 소리요? 대체."
"모두들 당신에게 눈독을 들이구 있으니, 미안하기두 하고, 민망하기두 해서 그래요!"
"온 별소릴 다……. 그래 내가 그렇게 잘났던가?”
물론 그러고 둘이 다 농담으로 웃어넘기고 마는 일이었으되 만기 자신 이상히도 여자들이 자기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병원을 찾아오는 단골 환자의 거개가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도 무심히 보아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많은 여자 환자 가운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기에게 호감을 보이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한 주일이면 끝날 치료를 자진해서 열흘 내지 보름씩 받으러 다닌다거나 완치된 다음에도 사례라고 하며 와이셔츠나 양복지 같은 것을 사들고 일부러 찾아오는 여자가 결코 한둘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여자들의 단순하지 않은 호의를 물리치기에 만기는 진땀을 빼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성들 가운데는 외모로나 교양으로나 퍽 매력적인 상대가 없지도 않아서 만기는 맑고 잔잔한 마음 속에 뜻하지 않았던 잔물결을 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저 그것뿐이었다.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비극이 두려웠다. 더구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현처양모인 아내를 생각하면 부질없는 마음 구석의 잔물결도 이내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십 년 가까이나 가난한 살림에 들볶이면서도 한결같이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로써 남편을 섬기었고 심혈을 쏟아 어린것들을 보살펴 오는 아내의 쪼들인 모습을 눈앞에 그려볼 때 만기는 꿈에라도 딴 생각을 품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 아름다운 여성 환자의 지나친 호의를 물리친 날이면 만기는 으레 아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무엇이고 사들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혼 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대문께까지 달려나와 남편을 맞아들이는 아내에게 사갖고 온 물건을 들려주고 나서 까칠해진 아내의 손을 꼭 쥐어 주며,
"고생시켜 미안허우!”
혹은,
"나이 들면 더 예뻐지는구려!"
그러고는 봄볕처럼 다사로운 미소를 아내 얼굴에 부어 주는 만기였다.
그러한 만기라, 봉우 처에 대해서는 항시 경계해 오고 있었지만 요즘 와서 은근히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만기에 대한 봉우 처의 접근공작이 너무나 집요하고 대담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제만 해도 만기는 봉우 처를 딴 장소에서 만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병원 건물과 시설에 관해서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좀 만나달라는 연락이 오곤 했다. 그때마다 만기는 바쁘기도 하고 몸도 좀 불편해서 지정한 장소까지 나갈 수가 없으니 안 되었지만 병원으로 내방 해줄 수는 없느냐는 회답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봉우 처에게서는 자기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찾아갈 수가 없으니 꼭 좀 나와 달라는 쪽지를 사람을 시켜서 거푸 보내오는 것이었다. 어제는 마침내 자기와의 면담을 고의적으로 회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라는 위협조의 연락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만기는 할 수 없이 퇴근하는 길로 지정한 다방에 봉우 처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여자는 역시 여왕처럼 화장을 하고 먼저 와 있었다.
"고마워요. 귀하신 몸이 이처럼 행차를 해주셔서."
만기에게 맞은쪽 자리를 권하고 나서 여자는 친밀한 미소와 함께 약간 비꼬는 어투로 인사를 던져왔다,
"퍽 재미있는 농담이십니다."
만기가 그랬더니,
"선생님은 농담을 덜 좋아하실지 모르겠군요. 워낙 고상한 신사이시니까."
그래서,
"너무 기교적인 용어에는 전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만기는 그러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봉우 처는 만기 의향을 묻지도 않고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시키었다. 그것을 마셔 가면서 대체 의논할 일이란 무엇이냐고 만기 편에서 먼저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병원 건물이 하두 낡아서 전면적인 수릴 해야겠어요."
그래서 병원 옆에 있는 사무실이나 아래층 가게에서들은 셋돈을 인상하는 동시에 삼 개월 분씩 선불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점으루 선생님께만은 말씀드리기가 안 되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솔직히 의논해 보려구 뵙자구 헌 거예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만기의 얼굴을 살짝 치떠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만기로서는 아픈 이야기였다. 현재도 매달 셋돈을 맞춰 놓기에 쩔쩔매는 판이었다. 게다가 석 달 치 선불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얼마나 올려 받으실 예정이십니까?
"삼 할은 더 받아야지요. 그 근처에서들은 다들 그 정도 받는걸요."
"그럼 우리 옆 사무실이나 아래층 가게에서들은 이미 양해를 얻으셨습니까?”
그러자 여자는 만기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선생님, 우리 그런 사무적 얘기는 딴 데 가서 하십시다. 이런 장소에선 싫어요. 제가 저녁을 대접하겠어. 늘 폐를 끼쳐왔으니까요."
그러고는 만기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여자는 일어서 카운터로 가더니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만기가 어리둥절해서 따라 나가자 봉우 처는 어느 새 택시를 불러 세웠다.
"먼저 오르세요!"
만기는 다음 날 다시 만나 사무적으로 타협하기로 하고 우선 빠져 돌아가려고 했으나,
"고의로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신사도가 아니에요.”
여자는 만기를 차 안으로 떠밀 듯이 했다. 번잡한 길거리에서 실갱이를 할 수도 없고 해서 만기는 시키는 대로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십 분도 채 달리지 않아서 택시는 어느 음식집 앞에 닿았다. 여염집들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음식집은 외양과 달리 안에 들어가 보면 방도 여러 개 있고 제법 아담하게 꾸려져 있었다. 봉우 처는 그 집 마담과는 친숙한 사이인 모양이라 허물없는 인사를 나누고 나서,
"별실 비어 있니?”
하고 물었다. 마담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만기를 힐끔 쳐다보고,
"별실 삼 호가 비어 있을 거야. 그리루 모셔."
그리고는 안을 향하고,
"별실 삼 호실에 두 분 손님!"
소리를 질렀다.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녀가 조르르 달려 나와 안내를 했다. 자그마한 홀을 지나 긴 복도를 휘어 도니 저쪽으로 돌아앉은 참한 방이 있었다.
"이 집 마담, 여학교 동창이에요. 그래서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가끔 오죠."
여자는 묻지도 않는 말을 하고 다가와서 만기의 양복 저고리를 벗기려 했다. 만기는 얼른 제 손으로 벗어서 벽에 걸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것을 낚아채듯 뺏어서 옷걸이에 얌전히 걸었다, 조그만 식탁을 사이에 하고 마주앉아 여자는 만기를 쳐다보며 피로한 듯한 미소를 짓고 가늘게 한숨을 토했다. 소녀가 물수건과 찻물을 날라 왔다. 봉우 처는 이집은 갈비찜이 명물이라고 하고 약주와 함께 안주와 음식을 시키었다. 소녀가 사라지자 여자는 식탁에 기대어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한동안 가만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몹시 피로해 보였다. 삼십을 한둘 남긴 여자의 무르익은 모습은 어떤 요염한 독소조차 느끼게 해주었다. 만기도 까닭모를 피로감과 함께 저절로 긴장해졌다.
"병원 시설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헐값이지만 고물이라서 차라리 팔아치울까 생각해요!"
여자는 만기를 빠끔히 쳐다보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만기는 속으로 놀랐다. 여자의 마음을 얼른 파악하기 힘들었다. 진담인가, 그렇지 않으면 야비한 복선인가, 어느 쪽이든 만기에게는 타격이었다. 그 시설은 지금의 안기에게 있어서 생명선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는 그러한 내심을 조금도 표면에 내비치지 않고 태연히 듣고만 있었다.
"낡아빠진 그 시설을 쓰기에는 선생님의 탁월한 기술이 아까워요. 그래서 작자가 나선 김에 팔아치우고 선생님에게는 현대적인 최신식 시설을 갖춰드리구 싶어서 그래요. 제게 그 정도의 자금은 마련되어 있어요!"
여자의 음성과 표정이 왜 그렇게 차분차분할까? 거기에는 심리적 호흡의 기술이 필사적으로 착용되고 있었다. 그러기 아까 다방에서 내논 말과는 아주 다른 딴 얘기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지적해 줄 수가 없었다.
"경제적 면에서 제게는 그런 최신 시설을 빌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셋돈 말씀이죠?"
여자는 간격 없이 웃고 나서,
"선생님이 독립하실 수 있을 때까지 오 년이구 십 년이구 그냥 빌려 드려두 좋아요!"
만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상대편에서 이렇게 자꾸 엉뚱하게만 나오니 더욱 조심해질 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건 없어요. 이왕 놀고 있는 돈이 있으니까 제가 존경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편리를 봐드리구 싶은 것뿐예요!"
순간 여자의 표정이 놀랄 만큼 진지한 빛으로 변했다. 만기는 봉우 처의 이러한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봉우 처는 소매를 걷고 마치 남편에게 하듯 잔시중까지 들었다. 만기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기의 그러한 예감은 마침내 적중하고야 말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봉우 처는 상 밑에서 한쪽 발을 슬며시 만기 무릎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지긋이 힘을 주며 요염한 웃음을 쏟았다. 그 눈이 불같았다. 만기는 꽤 당황했지만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물러앉았다. 여자는 발끝으로 움추리는 만기의 무릎을 쿡 찌르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잠시 멋쩍게 앉아서 먹다 남은 음식들에 공연히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여자는 갑자기 자리를 떠서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한참 동안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만기는 어지간히 불쾌하고 불안한 생각에 앉았다 섰다 하며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십 분 이상 지나서야 여자는 돌아왔다. 대번 알아보게 얼굴에는 주기가 돌았다. 여자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안으로 문고리를 잠갔다. 짤그락 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도전적이었다. 여자는 다시 창문의 커튼까지 내리고 제 자리에 가 앉았다. 초가을 저녁 무렵이었지만 밀폐되다시피한 실내는 한증 속처럼 더웠다. 여자는 술잔을 들어 만기 앞으로 내어밀며,
"따라 주세요!"
명령조였다. 원래 만기는 한두 잔밖에 못하기 때문에 주전자에는 술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기는 한 손으로 주전자 뚜껑을 누르고,
"인제 그만 돌아가실까요. 오늘은 정말 오래간만에 포식했습니다."
달래듯 했다.
"내버려 두세요. 거룩하신 선생님 눈엔 제가 사람같이 안 보일 테니까요"
여자는 무리로 주전자를 뺏어서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시었다. 안주도 안 먹고 거푸 물마시듯 했다. 만기는 겁이 났다. 이 이상 취하면 어떤 추태를 부릴지도 모른다. 버려 둘 수가 없었다. 만기는 간신히 술 주전자를 뺏어 감추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것을 도로 뺏으려고 덤벼들었다. 앉은 채 잠시 붙잡고 돌아갔다. 주전자를 떨어뜨려 술이 엎질러졌다. 여자는 그것을 훔칠 생각도 않고 만기 무릎 위에 쓰러지듯 푹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골샌님!"
여자는 어린애처럼 어깨를 추며 울기 시작했다.
대합실 문밖에서 웬 소년이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넌 웬 아이냐?"
간호원이 먼저 발견하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 없이 조심히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남은 살 먹었을 그 소년의 얼굴은 제법 귀염성 있게 생겼지만 거지 아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병원이죠?"
소년은 어릿어릿하며 조그만 소리로 간호원에게 물었다.
"그래. 너 어째서 왔니?"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을 않고 대합실과 진찰실 안틀 두리번거리고 나서,
"울 아버지 안 오셨어요?"
영문 모를 질문을 했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외국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만기가,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
물으니까,
"울아버지, 채익준 씨야요."
그리고 소년은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 너 익준이 아들이구나!"
만기는 일어나 소년 옆으로 다가갔다. 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섰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서 옆 의자에 앉히고 만기도 소파에 마주 앉았다.
"너 아버지 찾아왔구나. 이름이 뭐지?"
"채갑성이에요!"
"나이는?"
"열한 살예요!"
만기가 친절히 말을 걸어 주는 바람에 안심이 되었는지,
"울 아버지 안 오셨어요?"
소년은 걱정스레 다시 물었다.
"아버진 아침에 잠간 다녀 나가셨는데……. 그래 너 왜 아버질 찾아왔니?"
"어머니가 아버지 찾아오랬어요. 어머니 죽을 것 같대요!"
소년에게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가 있어서 외할머니까지 합치면 모두 여섯 식구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집안 살림의 중심이 되어 오던 모친이 반년 가까이나 병석에 누워 지낸다는 것이다. 모친은 자리에 눕기까지 생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꼭두새벽에 첫 차로 인천에 가서 생선을 한 광주리 받아 이고는 서울로 되돌아와서 행상을 하였다는 것이다. 모친이 병으로 누운 다음부터는 오십이 넘은 외할머니가 어머니 대신 생선 장사를 해서 간신히 가족들 입에 풀칠을 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 보지도 못한 채 집에 누워서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세는 나날이 더 심해만 갔는데 아까 점심때쯤 해서 어머니는 소년을 불러 놓고 숨이 자꾸 가빠오는 걸 보니 곧 죽을 것 같다고 하며 얼른 가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만기가 차근차근 캐어묻는 말에 대충 이상과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하고 난 소년은 별안간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만기는 우선 소년을 달래 놓고,
"그래, 너 이 병원은 어떻게 알았니?"
"접대 아버지하구 돈 꾸러 왔댔어요."
"돈 꾸러? 여길?"
"네, 아버지 엄마하구 무슨 얘기하다가 울었어요. 그리구 나 데리구 여기까지 왔댔어요."
"그래서 돈은 꾸어 갔니?"
"아니요. 나보구 길 거리에 서서 기다리라구 해서 한참이나 이 앞에서 기다리구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와서 그냥 돌아가라구 했어요. 그러면서 저녁에 돈을 마련해갖구 돌아갈 테니 집에 가서 엄마 보구 조금만 더 참구 기다리라구 했어요."
만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괴로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옷이라고는 언제나 탈색한 사지 군복 바리에 퇴색한 해군 작업복 상의만을 걸치고 다니는 초라한 익준의 몰골이 감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익준은 병원에 와서 돈을 꾸려고 한번도 손을 내밀어본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 한 마디도 딱한 집안 사정을 입밖에 비치어 본 일조차 없었다. 만기도 그의 가정 형편이 그렇게까지 말이 아닌 줄은 모르고 있었다.
"너 몇 학년이니?"
"학교 그만뒀어요."
"그럼 놀고 있어?"
"신문 장사해요."
만기는 그런 말까지 캐어물은 것을 도리어 후회했다. 그는 소년을 위로해서 돌려보내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남의 시설을 빌려서나마 개업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만기 자신 생활에는 극도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그만치 열 식구에 버는 사람이라 곤 만기뿐이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대가족이 먹고 입는 일만도 숨이 가쁠 지경인데 동생들의 학비까지 당해 내야만 했다. 대학이 하나, 고등학교가 둘, 거기에 국민학교 다니는 자기 장남까지 합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지출이었다. 피를 짜내듯 해서 거의 기적적으로 감당해 오고 있었다. 그 밖에 늙은 장모와 어린 처남 처제들만이 아득바득하고 있는 처가에도 다달이 쌀말 값이라도 보태 주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하기는 그런대로 개업을 하고 있는 만기에게는 다소라도 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동란 이래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익준네 생활이 그만치라도 지탱되어 왔다는 것은 한편 수수께끼 같은 일이기도 했다. 익준은 취직을 단념하고 있었다. 왜정 때 겨우 중학을 나왔을 뿐 특수한 기술도 빽도 없는 데다가 나이마저 삼십고개를 반이나 넘어섰고 보니 취직이란 말 그대로 별따기였다. 게다가 남달리 정의감과 결백성이 세기 때문에 사소한 부정이나 불의를 보고도 참지 못하는 그는 설사 어떤 직장이 얻어 걸렸다 해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변 전에도 직장다운 직장을 오래 가져 보지 못했던 것은 오로지 그러한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밑천도 없었거니와 이 또한 고지식한 그에게 될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생각다 못해 노동판에도 섞여 보았다. 그 역시 해보지 않던 밀이라 한몫을 감당할 수도 없었거니와 사무실에서 인부들의 임금을 속여 먹는 줄 알게 되자 대뜸 쫓아가서 시비 끝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기 최근 일 년 동안은 양심적이고 동지적인 자본주를 얻어 먹이고 살 수도 있고 동시에 국가 사회에도 비익할 수 있는 사업을 스스로 일으켜야 하겠다고 하며 그는 철마다 거리를 휘젓고 다니었다.
그가 말하는 국가 사회에도 비익하며 먹고 살 수도 있는 사업이란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상대의 일용잡화 및 식료품 상회였다. 그의 친지 가운데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섭이 잦은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 친지 말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민간인들의 대부분이 식료품이나 일용품 같은 것을 거의 도쿄나 홍콩에서 주문해다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실일 뿐 아니라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한국 상인의 물품은 그 가격이나 질에 있어서 도무지 신용을 할 수가 없으니 부득이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외국인을 상대로 식료품과 일용품을 공급해 줄 만한 양심적인 한국 상점의 출현을 누구보다도 외국인 자신들이 절실히 요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익준은 담박 얼굴이 벌개가지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손실을 자초하는 일이냐고 탄식했던 것이다. 그런 지 며칠 뒤부터 익준은 자기 자신이 양심적인 출자자를 구해서 외국인 상대의 점포를 자기가 직접 경영해 보겠다고 서둘러 싸돌아다니었다. 최고의 이득을 목표로 철두철미 신용과 친절 본위로 외국인을 상대하면 자연 잃어진 한국인의 체면도 회복할 수 있고 그들의 신용과 성원을 얻어 사업도 번창해질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뒤 익준은 양심적인 출자자를 찾아내기 위해 맹렬한 열의로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돈 있고 양심적인 동지는 금방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점심 요기조차 못하고 나서지 않는 출자자를 찾아 거리를 휘젓고 다니다가 저녁 때 맥없이 돌아오는 익준은 보기에 딱하도록 지쳐 있었다. 쓰러지듯 대합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그는 비참한 표정으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돈 푼이나 있다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비치어 보았더니 지금 세상에 일할 장사를 위해 돈 내놀 시러베 아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영 상대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양키 상대라면 한두 번에 팔자를 고칠 구멍을 뚫어야지 제정신 가지고 금리도 안 되는 미친 짓을 누가 하겠느냐고 핀잔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모두 도둑놈이 아니냐고 외쳤다.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남을 속이거나 망치는 일쯤 당연하다고 생각할 판이니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끝장에 가서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익준은 비분강개를 금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때마다 그는 행정 당국의 무능을 통매하면서 'D·D·T 정책'이란 말을 내세우곤 했다. 디·디·티를 살포해서 이나 벼룩을 박멸하듯이 해충적 존재에 대해서는 강력한 말살정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매치기나 날치기에서부터 간상 모리배도 총살, 협박 사기한도 총살, 뇌물을 먹고 부정을 묵인해 주는 관리도 총살, 밀수범도 총살, 군용 물자를 훔쳐 내다 팔아먹는 자도 총살, 국고금을 횡령해 먹는 공무원도 총살, 아무튼 이런 식으로 부정불법을 자각하면서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국가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행위를 자행하는 대부분의 형사범은 모조리 총살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양민이 안심하고 살수 없을 뿐 아니라 나라의 앞날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흥분한 어조로 이러한 지론을 내세울 때의 익준의 눈에는 살기에 가까운 노기가 번득거리었다. 그런 때 만일 누가 옆에서 그의 지론을 반박할 말이면 당장 눈앞에 총살형에 해당하는 범법자라도 발견한 듯이 격분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경솔한 외국 기자가 한국을 가리켜 도둑의 나라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대개의 신문이나 명사들이 그 기사를 쓴 외국 기자를 비난하고 한국의 사회 실정을 엄폐 변명하려는 논조로만 치우쳐 있었다. 당시의 익준은 거의 매일같이 흥분해 있었다. 그 외국 기자야말로 당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시하고 가차 없는 비평을 가해 왔다는 것이다. 잠깐 다녀간 외국 기자의 눈에도 도둑의 나라로 비치리만큼 부패한 우리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부끄러울망정 바른 소리를 한 외국 기자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덮어 놓고 외국 기자를 비난 공박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냉정히 반성하고 다시는 외국인으로부터 그처럼 치욕적인 말을 듣지 않도록 전국 국민이 깊은 각성과 새로운 노력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니냐, 결국 도둑놈 소리가 듣기 싫거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만기는 몇 마디 반대 의견을 말해 본 일이 있었다. 어쨌든 그 외국 기자가 한국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보지 않았다는 것만은 사실인 이상 국교상의 우호 관계로 보아서도 경솔한 태도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는 점과 어느 나라치고 도둑이 없는 나라란 있을 수 없을 터인데 정도가 좀 심하다고 해서 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객관적인 원인과 이유를 밝히는 일이 없이 일언지하에 대뜸 도둑의 나라라고 단정해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 관찰에만 치우친 편견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만기는 은근히 익준의 소견을 반박해 보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가지고 만기에게 대들 듯이 덤비었다.
"아니,도둑놈에게 도대체 변명이 무슨 변명야? 그래 자넨 아직두 한국놈이 도둑놈이 아니라구 우길 수 있단 말야? 이 지구상에 우리 나라처럼 도둑이 들끓구 판을 치는 나라가 또 있단 말인가? 이거 봐, 만기, 덮어 놓구 자기 나라를 두둔하구 치켜올리는 게 애국자 애국심은 아닌 거야. 말을 좀 똑바루 하란 말야. 그래 아무리 조심을 해두 전차나 버스를 한번 탔다 내리기만 하면 돈지갑이나 시계 만년필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데 이래두 한국이 도둑의 나라가 아니란 말인가? 백주에 도로상을 걸어가노라면 바람도 안 부는데 모자가 행방불명이 되기 일쑤구, 또 어떤 놈이 불쑥 나타나 골목으로 끌구 들어가서는 무조건 두들겨 팬 다음 양복을 벗겨 가지구 달아나는 판이니, 아 이래두 한국은 도둑의 나라가 아니라구? 알량한 동방예의지국이군 그래. 시장바닥은 물론 심지어는 일국의 수도 한복판에 있는 소위 일류 백화점이란 델 들어가 물건을 사두 가격을 속이구 품질을 속이구 중량을 속여 먹기가 여반장이니 아니 이래두 한국은 의젓한 신사국이란 말인가? 아무리 아전인수라두 분수가 있지 열 놈이면 아홉 놈까진 도둑놈이고 눈뜬 채 코 베어 먹힐 세상인데 그래두 자넨 한국이 도둑의 나라가 아니라구 뻔뻔스레 잡아뗄 셈인가? 그야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구 자네 말대루 도둑질하는 놈에게도 이유야 있을 테지. 이를테면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 있느냐는 식으루 말일세. 그렇지만 남은 사흘은 고사하구 닷새 엿새를 굻어두 도둑질 않구 배기는데 한국놈은 어째서 단 한 끼만 굻어두 서슴지 않구 도둑질 을 하느냐 말야. 아니 한 끼를 굶기는커녕 하루에 네 끼 다섯 끼 배지가 터지도록 쳐먹구두 한국놈은 왜 도둑질을 하느냐 말야. 이러니 죽일 놈들 아냐. 복통할 노룻이 아니냐 말야!"
익준은 홉사 미친 사람 모양 입에 거품을 물고 핏발 선 눈알을 둥굴리었던 것이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다. 미스 홍이 조용히 의논할 말이 있노라고 했다. 그 동안 석 달 치나 밀린 급료 얘기가 아닌가 싶어 만기는 새삼스레 가책을 느끼었다. 홍인숙은 만기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사업의 보조자였다. 치의전(齒醫專)을 나온 이래 십여 년 간의 의사 생활을 통해서 수많은 간호원을 부려 보았지만 인숙이만큼 만족하게 의사를 돕는 솜씨도 드물었다. 가려운 데 손이 가듯이 빈 구석 없이 만기를 받들어 주었다. 눈치가 빠르고 재질도 풍부해서 간호원으로서의 지식이나 기술뿐 아니라 웬만한 의사 못지않게 능숙한 수완을 발휘해 주었다. 중태가 아닌 진찰이나 치료 정도는 만기가 없어도 충분키 대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숙은 자기 직무 이상의 일에까지도 열성을 기울여 묵묵히 만기를 도아왔다. 한 말로 말해서 인숙은 이처럼 시설이 빈약한 변두리의 개인 병원에는 분에 넘칠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하고 성실한 간호원이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얌전하고 귀엽게 생긴 얼굴이어서 환자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한 인숙에게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충분한 물질적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것이 만기에게는 늘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숙은 삼 년 이상이나 같이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불만이나 불평을 말해 본 일이 없었다. 도리어 인숙은 자기 집의 생활이 자기의 수입을 필요로 하리만큼 군색한 형편이 아니라면서 미안해하는 만기를 위로하듯 했다. 그만치 이해하고 봉사해 주는 인숙에게 최근 삼 개월 분의 급료를 지불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뜩이나 미안하던 판이라 만기는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애기할까 했으나 인숙은 굳이 마다고 했다.
"정 그러시문 차나 한 잔 사 주세요."
병원을 잠그고 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물론 대합실 소파에 지키고 앉아 있던 봉우도 따라 나섰다. 그들은 가까운 다방으로 갔다. 역시 봉우도 잠자코 따라 들어왔다. 인숙은 퍽 난처한 기색으로 걸음을 멈추고 만기를 쳐다보았다. 만기는 이내 눈치를 채고 봉우를 돌아보며,
"미안하네, 봉우. 병원 일루 둘이서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어 그러는데……."
사양해 달라는 뜻을 표했더니,
"그럼 문 밖에서 기다릴까?"
봉우는 도리어 어린애같이 솔직한 태도로 반문해 왔다.
만기도 딱해서,
"무슨 딴 볼일이라두 없는가?"
그랬지만,
"딴 볼일은 없어. 그럼 문밖에서 기다리지!"
돌아서 나가려는 것을,
"그래서야 되겠나. 그러면 저쪽 빈 자리에서 기다려 주게나,"
도리어 만기쪽이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우와는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자리잡고 앉아서 만기는 차를 시켜 놓고 인숙의 이야기를 들었다. 급료 독촉이 아니었다. 거북한 듯이 인숙이가 꺼내 놓는 이야기는 봉우에 관한 문제였다. 봉우는 거의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인숙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퇴근하고 돌아가는 인숙을 같은 전차를 타고 집 앞 까지 따라와서는 인숙이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봉우는 처량한 얼굴로 발길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전에도 잠간 귀에 담은 일이 있었지만 어쩌다가 봉우 자신 그 방면에 볼일이 있으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얘길 자세히 듣고 보니 딴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숙을 따라다니는 행동 그 자체가 엄연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날마다 병원 대합실에 나와서 낮잠을 자듯이 저녁 때 마다 봉우가 자진해서 인숙을 집에까지 바래다주는 것은 하나의 일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숙이 자신 처음 얼마 동안은 봉두의 엉뚱한 행동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요즘 와서는 미칠 것만 같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의 이목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동네에서는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집안 어른들에게도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숙은 더러 그러한 봉우를 피하기 위해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부러 반 방향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봉우는 역시 어린애처럼 떨어지지 않고 줄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긋지긋 귀찮게 실없는 수작을 거는 것도 아니다. 고작 꿈을 꾸듯 황흘한 눈을 인숙의 전신에 몰래 퍼부을 뿐이다. 처음엔 그러한 봉우가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 뒤에는 징그러웠다. 요즘 와서는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저를 바라볼 때의 천 선생님의 그 이상히 빛나는 눈이 꼭 저를 어떻게 할 것만 같아요. 소름이 돋아요!"
그래서 인숙은 밖에도 잘 못 나온다는 것이다. 꿈에서까지 그런 봉우의 눈과 마주쳤다가 소스라쳐 깬다는 것이다. 병원이 휴업을 하는 일요일 아침이면 봉우는 직접 인숙이네 집 대문 앞에 와서 우두커니 지키고 섰다는 것이다. 하두 기가 차서 인숙이가 홧김에 쫓아나가,
"천 전생님, 왜 또 여기 와 서 계셔요?"
따지듯 하면,
"오늘은 병원이 노는 걸 어떡해요?"
그러니까 이리로밖에 찾아올 데가 없지 않느냐는 듯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 한 눈으로 인숙을 내려다본다는 것이다.
"이웃이 챙피해요. 집 식구들두 시끄럽구요. 얼른 돌아가 주세요, 네!"
사정하듯 하면 봉우는 갑자기 풀이 죽어서 천천히 골목을 걸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있다 밖을 또 내다보면 봉우는 어느 새 대문 앞에 도로 와서 척 지키고 서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인숙은 자나 깨나 신경이 쓰여 흡사 미칠 것만 같다는 것이다.
"어떡하면 좋겠어요, 선생님."
말을 마치고 만기를 쳐다보는 인숙의 귀여운 얼굴이 아닌게 아니라 이제 보니 핼쑥하게 좀 파리해 있었다.
"천 선생은 가정적으루나 사회적으루나 퍽 불행한 사람이요."
만기는 호젓한 말씨로 그렇게 대신 변명하듯 했다
"저두 대강은 짐작하고 있어요."
"또한 본래 바탕이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요. 중학 때부터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구 피해나 입었지, 전연 남을 해칠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소. 그러니까 미스 홍두 천 선생에게 악의나 증오감을 품구 대하진 말아요."
"저두 알아요. 그러니까 여태 참구 지내다 못해 선생님께 의논하는 게 아니에요."
"천 선생은 분명히 미스 흥을 사랑하구 있나 보오. 그러나 사랑을 노골적으루 고백할 수 있으리만큼 천 선생은 당돌하지 못한 사람이요. 그만치 인간의 자격에 자신을 잃구 있는 분이지. 그러면서두 미스 홍을 떠나서는 못 살겠는 모양이요. 잠시두 미스 흥을 안 보구는 못 배기겠다는 모양이란 말요. 그렇다구 일방적인 천 선생의 애정에 대해서 미스 흥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을 테지. 다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피차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올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요. 물론 미스 흥의 불쾌하구 불안하구 난처한 처지는 알 수 있소만 조금 더 참구 지내요. 적당한 기회에 내가 천 선생하구 조용히 얘길 해볼 테니. 그렇다구 이런 문제를 제삼자인 내가 아무 때나 불쑥 들구 나설 수두 없으니까 좀 기다리란 말요. 그 동안에 자연스럽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볼 테니까."
인숙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얘기를 마치고 나서 만기는 인숙이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인숙이가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만기도 일어나 봉우 자리로 가려니까 봉우는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서 벌떡 일어서더니 만기를 밀치듯이 하고 황황히 밖으로 쫓아가 버리었다. 만기도 할 수 없이 얼른 셈을 치르고 찾아 나가 보았다. 전차정류장 쪽을 향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인숙의 뒤를 봉우는 부리나케 쫓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이 흡사 엄마를 놓칠세라 질겁을 해서 발버등 치며 쫓아가는 어린애 모양과 비슷했다. 그 꼴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던 만기는 저도 모르게 가만한 한숨을 토했다. 계산이 닿지 않는 애정에 저렇게 열중해야 하는 봉우가 - 그리고 저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 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꾸만 엉클어지는 애정과 애욕의 미묘한 혼란이 숨가쁜 까닭이기도 했다. 물론 봉우 처의 저돌적인 육박도 골치 아픈 일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처제인 은주의 문제가 만기의 마음을 더 어지럽게 하겠다.
은주는 어머니를 모시고 밑으로 어린 두 동생을 거느리고 어느 관청에 사무원으로 나가고 있었다. 6·25동란 이후 삼사 년 간은 전적으로 만기에게 얹혀 지냈다. 그러니까 만기는 처가네 식구까지 열네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친동생을 학교에 보내면서 처제들이라고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은주와 그 두 동생까지 모두 여섯 명이 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집어넣었다. 그들의 학비와 열네 식구의 생활비를 위해서 만기는 문자 그대로 고혈을 짜 바쳤다. 물론 동생들은 고학을 한답시고 각자 능력껏 활동들을 해서 잡비 정도는 저희들이 벌어 썼지만 그렇다고 만기의 짐이 덜릴 수는 없었다. 만기는 자연 나날이 쪼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안 되는 병원 수입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참다 참다 급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여기 저기서 돈을 둘러다 썼다. 부모가 남겨 준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 한 채마저 팔아 버리고 유축에 전셋집을 얻어갔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도 만기는 가족들 앞에서 결코 짜증을 내거차 불평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얼굴 한 번 찡그려 본 일이 없었다.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고민이란 영혼까지도 고갈하게 만드는 법이다. 만기는 자기에게 지워진 고통을 혼자서만 이를 사려 물고 이겨 나갔다. 하두 고민이 심할 때는 입맛을 잃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만기의 심중을 아내만은 알았다. 밤새껏 엎치락뒤치락 하며 남편이 잠을 못 드는 밤이면 아내는 말없이 만기를 끌어안고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 때 만기는 도리어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쟝 크리스토프』라는 로랑의 소설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우. '사람이란 행복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여보,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 줄 아내가 있는 이상 나는 결코 꺾이지 않을 테요. 그러니까 나 위해 과히 걱정 말구 어서 울음을 그쳐요. 자 어서, 이게 뭐야 언내처럼."
만기가 그러고 달래듯이 눈물을 닦아 주려면 아내는 참아오던 울음소리를 탁 터뜨리고 발버등치며 더욱 섧게 우는 것이다. 아내는 세상의 어떤 아내보다도 만기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동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에 또 한 여인이 만기 아내에게 못지않게 만기를 존경하고 동정하며 한 지붕 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물론 처제인 은주였다. 은주는 소녀다운 깊은 감동으로 형부를 우러러보고 사모했다. 귀공자다운 풍모, 알맞은 체격, 넓고 깊은 교양, 굳은 의지와 확고한 신념, 강한 의리감과 풍부한 인정미, 어떤 점으로 보나 형부 같은 남성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한 형부가 보잘것없는 가족들을 위해서 노예처럼 희생당하고 있다. 형부를 위해서는 이 따위 가족들이 다 없어져도 좋지 않을까. 아니, 형부를 둘러싸고 있는 너절한 인간들이 온통 사라져 버려도 좋지 않을까.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가족을 위해 죄인처럼 고민하는 형부를 생각할 때 은주는 속으로 혼자 울며 그렇게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은주는 그처럼 형부를 위해 마음이 아팠다. 자연스럽게 형부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경이었다. 은주는 형부를 위해서라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서슴지 않고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주는 오랜 동안 여러 가지로 혼자 궁리한 끝에 대학교 일학년을 마치는 길로 자진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취직해 버렸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셋방을 얻어 나가 자립 생활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형부의 짐을 털어 주고 싶어서였다. 이사해 나가는 날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하고 나서 은주는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언니에게 대담하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나 형부를 사랑해두 좋아?"
다들 웃었다. 물론 농담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와 그의 아내만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은주의 말이 결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작년부터는 가족들 사이에 자주 은주의 결혼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장모가 들를 적마다 사위와 딸 앞에서 은주의 나이 걱정을 해서다. 하기는 아버지 없는 은주에게 대해서 언니나 형부 노릇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까지도 대신해야 할 그들의 처지로서는 은주의 결혼 문제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만기 부처는 기회 있는 대로 은주의 배필을 물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적당한 상대가 나서면 사진을 구해 두었다가 은주가 들를 때 내보이곤 했다. 그러나 은주는 그때마다 사진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안합니다. 누가 시집간댔어요!"
그러고는 장난꾸러기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쿡쿡 웃었다.
"애두, 그럼 평생 처녀루 늙을래?"
언니가 가볍게 눈을 흘기면,
"형부만한 신랑감을 골라 주신다면…….”
또 아까와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보다 몇 갑절 나은 청년야. 우선 사진이나 구경해,"
만기가 남자 사진을 눈앞에 들이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구 시집을 가란 말씀예요!"
정색하고 은주는 사진들 받아 던지었다.
"그렇지만 딱허지 않니? 형부를 이제 와서 둘이 섬길 수두 없구……. 그럼 차라리 내가 형부를 양보할까!"
만기 처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고 미묘하게 웃었다.
"언니, 건 안 될 말씀. 난 언니두 사랑하는 걸요"
그러고는 살며시 다가앉으며 서양사람이 그러듯 언니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보, 세상에 나 같은 행운아가 어딨겠소. 선녀처럼 예쁘구 어진 당신과 비너스같이 황홀한 우리 은주 아가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됐으니 말이요!"
은주의 태도를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추스려 버리려는 만기의 의도를 은주는 묵살해 버리듯,
"언니, 나 꼭 한 번만 형부하구 키스해두 괜찮우?"
어리광 피우듯 해서,
"여보, 이 애 소원을 불어 주시구려!"
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만기를 쳐다보았더니 은주는,
"거짓말, 언니 거짓말!"
언니를 나무라듯 몸부림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언니 무릎 위에 푹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얼마 뒤에 고개를 드는 은주의 두 눈이 의외에도 젖어 있었다. 신뢰에 찬 미소로 시선을 교환하는 만기 부처의 얼굴에는 똑같이 복잡하고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행한 것은 만기와 단 둘이 만났을 때는 은주는 추호도 연정을 표시하는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처제의 위치에서 형부를 대하는 담담한 태도였다. 은주가 만기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언동으로 표시하는 것은 반드시 언니가 동석한 자리에서 만이었다. 그만큼 은주는 깨끗한 아이였다. 만기 처 역시 그랬다. 형부에 대한 은주의 사랑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남편과 동생의 사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만치 남편과 동생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알뜰한 아내와 은주 사이에 끼어서 만기는 참말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하기를 주위에서들 아무리 달래고 권해도 은주는 영 듣지 않았다. 한평생 만기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깨끗이 혼자 늙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단순한 흥분에서가 아니라 필사적인 각오로 은주 스스로가 택하는 자기 인생의 엄숙한 선언이었다. 그러니만치 주위 사람들도 다 함께 괴로웠고 당자인 만기는 더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봉우 처마저 노골적인 추태로써 만기를 위협해 왔고 봉우와 미스 홍의 어잴 수 없는 문제, 외면해 버릴 수 없는 익준의 암담한 가정 내막, 나날이 더 심해가는 경제적인 고통, 이런 복잡한 관계들이 뒤얽히어 만기의 마음속을 더욱 어둡고 무겁게만 해주었다. 그러나 만기는 역시 외면의 잔잔함만은 잃지 않았다. 한결 같이 부드럽고 품위 있는 미소로서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삼십이 좀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봉우 처의 편지를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다. 만기는 남자에게 의자를 권하고 편지를 펴보았다. 비교적 달필로 남자 글씨처럼 시원스레 내리갈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일전에는 실례했나 봐요, 저를 천한 계집이라고 아마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지극히 인격이 고상하신 도학자님의 옹졸한 취미를 저는 구태여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한편 저 같은 계집에게도 선생님 같이 점잖은 분을 비웃을 권리나 자격이 어쩌문 아주 없지도 않을 거예요. 삶을 대담하게 엔조이할 줄 아는 현대인 가운데 먼지 친 샘플처럼 거의 폐물에 가까운 도금한 인간이 자기 만족에 도취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꼴을 아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표본이야요. 선생님에게도 또 비웃음 받을 이 따위 수작은 작작하고 그러면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날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병원 시설을 작자가 나섰을 때 팔아치울 생각입니다.
이 편지를 갖고 간 분에게 기구 일습(一襲. 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또는 그 전부)을 잘 구경시켜 드리기 바랍니다. 매매 계약은 대개 오늘 안으로 성립 될 것이오며 계약 성립 즉시로 통지해 드리겠사오니 그때는 일주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새로이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드리고 싶었고 현재도 그러한 제 심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제 호의를 침 뱉아버리는 선생님의 인격 앞에 저는 할일 없이 물러서는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러한 본문 끝에 추백(추신과 같은 말)이라고 하고
'만일 제게 용건이 계시면 다음 번호로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에 이어서 전화번호가 잔글씨로 적히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만기는 언제나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로 알맹이를 도로 접어서 봉투 안에 집어 넣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었다. 인숙이만이 재빨리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만기는 편지를 서랍 속에 간직하고 나서 그 편지를 갖고 온 남자에게 친절한 태도로 시선을 보여 주었다. 남자는 의료 기두상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기계에 대한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돌아간 뒤 만기는 자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몹시 피로해 보였다. 얼굴색도 알아보게 창백해져 있었다. 인숙이가 조심히 다가와서,
"이제 그 분 뭐하러 왔어요?"
걱정스레 물었다.
"시설을 보러 왔소,"
"건 왜요?"
"어찌 되면 이 병원의 시설이 그 사람에게 팔릴지두 모르겠소."
그 말에 놀란 것은 간호원뿐이 아니었다. 대합실 소파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봉우가 별안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만기를 건너다보았다.
"정말인가?"
"그런가 보이!"
"그럼 이 병원은 아주 문을 닫아 버린단 말인가?"
"그렇게 되기 쉬울 거야."
봉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만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대체 자네나 미스 홍은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 아직 막연하지!"
봉우는 거의 절망적인 눈으로 만기와 인숙을 번갈아 보았다.
"천 선생님, 이 병원을 팔지 말구 이대루 두라구 사모님께 잘 좀 부탁하세요, 네?"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했다.
"내가? 내가 부탁헌다구 들어 줄까요?"
"선생님 사모님이신데 아무렴 선생님이 간곡히 부탁하면 안 들으실라구요."
"그럼 뭐라구 하문 될까요?"
"어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이 잘 생각해서 말씀하셔야죠."
봉우는 더 대답을 옷하고 고개를 숙여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에게는 아내를 움직이는 일은 하늘을 움직이는 일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는 유일한 휴식처요 보금자리인 이 대합실 소파를 뺏겨 버리고 말 것 아닌가! 봉우는 그만 처참할 정도로 푹 기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마침 환자가 있어서 치료해 보내고 만기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환자 카드를 정리하려는데 허줄한 소년이 대합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전번에 왔던 익준의 아들이었다.
"넌 웬일이냐?"
만기가 직감적으로 어떤 불길한 예감에 쏠리며 물었다. 소년은 먼젓번처럼 가만히 문을 밀고 대합실 안에 들어섰다. 소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소년은 병원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만기를 보았다.
"울 아버지 안 오셨어요?"
"안 오셨다. 이삼일 전부터 통 보이질 않는구나."
소년은 한 발에만 고무신을 신고 왜 그런지 한 짝은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 집에두 안 들어오셔요."
"그래? 언제부터."
만기는 이상해서 다구쳐 물었다.
"어저께두 그 전날두 안 돌아오셨어요."
"웬일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은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만기는 얼른 소년을 도로 붙들어 세운 다음,
"어머닌 좀 어떠시냐?"
묻고서 그 대답이 무서웠다.
"죽었어요!"
소년은 수치스러운 일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예측했던 일이지만 만기는 가슴이 섬찔했다. 언제 돌아가셨느냐니까,
"좀 아까요!"
소년은 그리고 외면을 했다. 더 자세히 얘기를 듣고 보니 소년의 모친은 약 두 시간 전에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집에는 두 동생과 주인집 할머니만이 시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도 아침에 생선 장사를 나간 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만기는 소년의 한쪽 손을 꼭 쥐어 주며,
"대체 아버지는 어딜 가셨올까?"
다정하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년은 슬그머니 손을 빼고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가만 있거라, 나랑 같이 가자."
만기는 횐 가운을 벗고 양복 저고리를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오늘 들어온 돈을 죄다 긁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여보게 봉우, 자네두 같이 가지."
"뭐? 나두?"
봉우는 자다 깬 사람처럼 얼떨결에 놀라 묻고 좀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간호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만기가 앞장서 막 병원을 나서려는 참인데 이십 살쯤 되었을 어떤 청년이 들어섰다. 청년은 원장 선생님을 찾더니 만기에게 한 장의 쪽지를 전하였다. 봉우 처에게서 온 통지였다.
병원 시설은 매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앞으로 일 주일 이내에 병원을 비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언제든 용건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연락을 해달라고 하고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만기는 말없이 쪽지를 편 대로 간호원에게 넘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익준의 아들은 밖에 나와서도 고무신을 손에 든 채 그 쪽은 맨발로 걷고 있었다. 남 보기에도 덜 좋으니 그러지 말고 한쪽 고무신마저 신으라고 권해도,
"발에 땀이 나서 그래요."
소년은 점직한 듯이 그러고 한쪽 손에 든 고무신을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러나 만기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소년이 들고 있는 고무신을 걸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달아서 뒤꿈치가 터지고 코뚜리가 쭉 찢어져서 도무지 발에 걸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만기는 가슴이 찌르르 했다.
전차를 타기 전에 그는 소년에게 고무신부터 한 켤레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고무신 가게가 눈에 뜨이지 않았고 때마침 전차가 눈앞에 와 멎어서 그대로 이내 차에 오르고 말았다.
소년의 가족이 들어 있는 집은 지붕을 기름종이로 덮은 토담집이었다. 소년의 어린 두 동생이 거지 아이 꼴을 하고 문턱에 기운 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역한 냄새가 울컥 코를 찌르는 침침한 방안에는 옆방에 산다는 주인 노파가 역시 이웃 아낙네와 마주앉아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방바닥에 착 달라붙은 듯한 시체 위에는 낡은 담요 조각이 덮여 있었다. 우선 집주인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만기는 할 일을 생각했다. 주인이 없더라도 사망 진단서와 사망 신고 등의 절차는 밟아 두어야 했다. 요행 반장의 협력을 얻어서 그런 일들은 무난히 끝낼 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저녁 때가 되어서야 비린내 나는 광우리를 이고 돌아왔다. 딸이 죽은 것을 알고도 그리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파의 전신에는 보기에 딱하리만큼 심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노파의 말에 의하면 익준은 이삼 일 전에 인천 방면의 어느 공사판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주사 몇 대라도 맞쳐 주면 한이나 풀릴 것 같아서 벌이를 떠났다는 것이다. 부득이 만기가 주동이 되어서 장례식 일을 맡아보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비용이 문제였다. 만기는 자기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당장 사소한 비용을 썼다. 봉우는 그저 시무룩하니 앉아서 만기 눈치만 살피다가 어디를 나가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뿐이었다. 상가에서 밤을 새우고 나서 만기는 이튿날 아침 잠간 병원에 들러 보았다. 물론 봉우도 함께 와서 대합실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만기도 나른히 지쳐 있었다.
인숙이가 걱정스레 만기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말았다. 만기는 한동안 묵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합실 소파로 가서 봉우 옆에 바싹 다가 앉았다.
"여보게, 같이 가서 자네 부인을 좀 만나 보고 올까!"
"아니, 건 또 무슨 소리야."
"당장 장례 비용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두 같이 가서 조언을 좀 해줘야겠단 말이네."
만기는 봉우 처에게서 장례 비용을 좀 뜯어 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간소히 치른다 해도 관은 사야 할 게고, 세 어린 것에게 상복을 입히고 영구차도 불러야 하겠는데 그 비용을 변통할 길이 달리는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찾아가려고 만기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봉우를 끌고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 잠간만……"
무슨 각오를 지닌 듯한 표정으로 인숙이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우?"
인숙은 만기를 진찰실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 병원 결정적으루 팔리게 되었나요?"
캐어 묻듯 했다.
"그런 모양이요!"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었다. 잠시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밀린 급료 문제나 실직될 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줄로 만기는 알았다.
"미스 홍이 삼 년 이상이나 마치 자기 일처럼 성의껏 거들어 준 데 대해서는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겠소. 그런 만큼 헤어지게 될 때는 충분히 물질적 사례를 취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미스 홍도 아다시피 현재의 내 경제적 사정으로는 그건 어렵겠으나 밀린 급료만은 어떡해서든 책임지고 청산하도록 할 테니 그리 알아요. 그리구 미스 홍의 취직 문젠데 나도 딴 병원을 극력 알아볼 테니 미스 홍도 오늘부터라두 아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 두어요."
만기는 한편으로는 사과하듯 한편으로는 위로하듯 했다. 그러자 불시에 고개를 바짝 들고 정면으로 쳐다보는 인숙의 시선에 부딪친 만기는 가슴에 뭉클하는 충동을 받았다. 원망스러이 쳐다보는 인숙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돌았기 때문이다.
"절 그렇게만 보셨어요!"
인숙은 외면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뭉개고 나서,
"건 가혹한 오해세요!"
입술을 깨물었다.
"미스 홍, 내가 피로해 있었기 때문에 실언을 했나 보오. 너무 노골적인 말이어서 노엽거든 용서해요."
"선생님, 저보다두 실상 선생님이 더 큰일 아니에요. 그 숱한 식구의 생활비며 학비며……. 개업 중에두 늘 곤란을 받으셨는데 병원을 내놓게 되면 당장 어떡허세요!"
"고맙소. 그러나 스스로 애쓰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지 않소. 우선 채 선생네 장례식이나 끝내고 나서 나도 백방으로 살 길을 찾아볼 테니 과히 걱정 말아요."
인숙은 이상히 빛나는 눈으로 만기를 쳐다보다가,
"선생님, 새로 병원을 차릴려면 최소한도 얼마나 자금이 필요해요?"
주저하며 물었다.
"아마, 팔십만 환은 가져야 불충분한 대로 개업할 수 있을 게요."
인숙은 잠간 동안 입술을 깨물고 섰다가 불시에 고개를 들고 호소하는 듯한 눈으로 만기를 쳐다보며,
"선생님, 제게 오십 만환이 있어요. 그걸 선생님께 드리겠어요. 그리구 오빠에게 부탁해서 삼십만 환은 어디서 싼 이자루 빌려 오도록 하겠어요. 선생님 병원을 내세요!"
말을 마치자 인숙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인숙은 그것을 씻을 생각도 않고 젖은 눈으로 열심히 만기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만기가 움직이기만 하면 인숙은 쓰러지듯 그대로 만기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어달릴 것 같았다.
"미스 흥이 어떻게 그런 대금을 자유로 할 수 있겠소!"
만기는 그럴수록 냉정한 언동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동안 제가 받은 급료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구 제 몫으루 고스란히 모아왔어요. 어른들은 제 결혼 비용으로 생각하고 계셨지만 저는 선생님께 병원을 채려 드릴 일념으루 모아온 돈이에요."
동일한 자세로 만기의 얼굴을 지켜보고 섰는 인숙의 눈에는 새로운 눈물이 계속해 흘렀다. 그 눈물 저쪽에 타오르고 있는 인숙의 눈에서 만기는 아내의 애정을 보았고 은주의 열정을 느끼었다. 영롱하게 젖은 그 눈 속에는 모든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보여 주는 마음의 비밀이 빛나고 말았다. 만기도 가슴속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참고 눌렀다.
"미스 홍, 입이 있어도 내게는 당장 대답할 말이 없소. 인제 그만 눈물을 닦아요. 어제 오늘은 내 머리도 몹시 복잡합니다. 훗날 머리가 좀 식은 다음에 천천히 얘기합시다. "
겨우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만기는 문간에서 기다리고 섰는 봉우를 따라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봉우 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딴 사람이 전화를 받았지만 이내 만날 수 있게 연락을 취해 주었다. 지정한 다방으로 가보니 봉우 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장서 들어서는 만기를 보고 반색을 하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자기 남편을 보더니 여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마주앉기가 바쁘게 만기는 용건부터 얘기했다. 익준이와 봉우와 자기는 중학 시절 이래 막역한 친구임을 말하고 나서 익준이네 비참한 가정 형편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장례 비용을 희사하거나 빌려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정말이야. 이 친구 말대루야. 나두 보구 가만 있을 수가 없어. 몇 달 동안 내 용돈을 안 타 써두 좋으니까 사정을 봐줘."
봉우는 제법 용기를 내서 아이가 어머니에게 조르듯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사이 봉우 처는 몇 번이나 낯색이 변하였다.
"선생님에게두 저 같은 여자가 소용에 닿을 때가 있군요. 좋아요. 저는 점잖은 선생님의 청을 거절할 용기가 없어요!"
여자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표정으로 나타내고 나서 일어서 저쪽으로 가려다가,
"오만 환 정도라면 당장 되겠어요. 물론 현금이 좋으시겠죠."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 뒤로 사라져 버리더니 좀 뒤에 현찰을 신문지에 꾸려 가지고 돌아왔다. 만기가 치하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이 돈 그냥 드리는 건 아니에요."
여자가 그래서,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일 약속은 할 수 없지만 반드시 책임지고 갚아드리 겠습니다. "
그랬더니 봉우 처는 문간까지 따라 나오며 애교 띤 농담조로,
"고지식한 양반. 그렇다면 원금만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적당한 이자까지 듬뿍, 아시겠어요?"
거의 아양에 가까운 교태였다. 봉우의 눈치를 곁눈질로 살피며 당황히 줄달음을 치듯 나오는 만기 등 뒤에다 대고,
"일간 다시 들러 주세요. 선생님 일루 꼭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요!"
여자는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돈으로 간소하나마 격식을 갖추어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관을 사오고 광목을 떠다 아이들에게 상복을 지어 입히고 고무신도 사다 신겼다. 의논해서 화장을 않고 망우리에 무덤을 남기기로 했다. 장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익준이가 없는 것을 만기가 탄식했더니,
"살아서두 남편 구실 못한 위인, 죽은 댐에야 있으나 마나지!"
익준의 장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좀 늦게나마 남편 구실을 못한 익준이 그날로 집에 돌아오기는 한 것이다. 거의 황혼 무렵이 피어서 산에서 돌아온 일행이 익준네 집 골목 어구에서 차를 내렸을 때였다. 저쪽 에서 머리에 횐 붕대를 감고 이리로 걸어오는 허줄한 사내가 있었다. 아 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 아버지다!"
소릴 질렀다. 아 그러자 익준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고 이쪽에서들도 일제히 그리로 시선을 보냈다.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들 고무신 코숭이가 비죽이 내보이는 종이 꾸레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석상처럼 전연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이구, 차라리 쓸모없는 저 따위나 잡아가지 않구, 염라대왕두 망발이시지!"
익준의 장모는 사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대고 인제야 눈물을 질금거리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제일 반가워했다. 일곱 살 먹은 끝의 놈은,
"아부지!"
하고 부르며 쫓아가서 매어달렸다.
"아부지, 나, 새 옷 입구 자동차 타구 산에 갔다 왔다!"
어린것이 자랑스레 상복 자락을 쳐들어 보여도 익준은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잉여인간, 1959)
☆ 손창섭 소설가
▲ 1922년 펑남 평양에서 출생
▲ 1935년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와 도쿄에서 고학으로 몇 군데 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에서 수년간 수학했으나 학력다운 학력은 없음
▲ 1946년 해방으로 귀국
▲ 1948년 공산치하에서 월남
▲ 1952년 「공휴일」 발표
▲ 1958년 「잉여인간」 발표
▲ 1959년 「잉여인간」으로 동인문학상 수상
▲ 1959년 「비 오는 날」 출간
▲ 1984년 일본에 귀화
[출처] 한국소설문학대계(1995)
/ 2020.06.23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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