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독 짓는 늙은이 / 황순원 (2020.06.26)

푸레택 2020. 6. 26. 14:25

 

 

 

 

● 독 짓는 늙은이 / 황순원

이년! 이 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 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 속에서 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 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 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들이 그냥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잠꼬대에서 송 영감을 깨워 놓았다.

송 영감은 잠들기 전보다 더 머리가 무겁고 언짢았다. 애가 종내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오, 오, 하며 송 영감은 잠꼬대 속에서처럼 애를 끌어안았다. 자기의 더운 몸에 별나게 애의 몸이 찼다. 벌써부터 이렇게 얼리어서 될 말이냐고, 송 영감은 더 바싹 애를 껴안았다. 그리고 훌쩍이는 이제 일곱 살 난 애를 그렇게 안고 있는 동안 송 영감은 다시 이 어린것을 두고 도망간 아내가 새롭게 괘씸했다. 아내와 함께 여드름 많던 조수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아들 같은 조수에게 동년배의 사내와 사내가 느끼는 어떤 적수감이 불길처럼 송 영감의 괴로운 몸을 휩쌌다. 송 영감 자신이 집증 잡히지 않는 병으로 앓아 누웠기 때문에 이 가을 마지막 가마에 넣으려고 거의 혼자서 지어 놓다시피 한 중옹 통옹 반옹 머쎄기 같은 크고 작은 독들이 구월 보름 가까운 달빛에 하나 하나 도망간 조수의 그림자같이 느껴졌을 때, 송 영감은 벌떡 채방망이를 들어 모조리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받았으나, 다음부터라도 자기가 독을 지어 한 가마 채워 가지고 구워 내야 당장 자기네 부자가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면서는, 정말 그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지그시 무거운 눈을 감아 버렸다.

날이 밝자 송 영감은 열에 뜬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일어나 앉아 애더러는 흙이길 왱손이를 부르러 보내 놓고, 왱손이 올 새가 바빠서 자기 손으로 흙을 이겨 틀 위에 올려놓았다. 송 영감의 손은 자꾸 떨리었다. 그러나 반쯤 독을 지어 올려, 안은 조마구 밖은 부채마치로 맞두드리며 일변 발로는 틀을 돌리는 익은 솜씨만은 앓아눕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왱손이가 흙을 이겨 주는 대로 중옹 몇 개를 지어 냈다.

그러나 차차 송 영감의 솜씨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조마구와 부채마치로 두드려 올릴 때, 퍼뜩 눈앞에 아내와 조수의 환영이 떠오르면 짓던 독을 때리는지 아내와 조수를 때리는지 분간 못하는 새 그만 얇게 못나게 지어지곤 했다. 그리고 전을 잡는 손이 떨 제일 힘든 마무리의 전이 잘 잡혀지지를 않았다. 열 때문도 있었다. 영감은 쓰러지듯이 짓던 독 옆에 눕고 말았다.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녁때가 기울어서였다. 왱손이도 흙 몇 덩이를 이겨 놓고 가고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바깥 저녁그늘 속에 애가 남쪽 장길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거리라. 언제나처럼 장보러 간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저녁때면 조수에게 장감을 지워 가지고 돌아올 줄로만 아직 아는가 보다. 밖을 내다보던 송 영감은 제 힘만이 아닌 어떤 힘으로 벌떡 일어나 다시 독짓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겨우 한 개를 짓고는 다시 쓰러지듯이 눕고 말았다.

다음에 송 영감이 정신이 든 것은 아주 어두운 속에서 애가 흔들어 깨워서였다. 울먹이던 애가 깨나는 아버지를 보고 그제야 안심된 듯이 저쪽에서 밥그릇을 가져다 아버지 앞에 놓았다. 웬 거냐고 하니까 애가, 앵두나믓집 할머니가 주더라고 한다. 송 영감은 확 분노가 치밀어, 누가 거랑질해 오라더냐고 밥그릇을 밀쳐 놓자 애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송 영감은 아침에 어제의 저녁밥 남은 것을 조금 뜨는 것처럼 하고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는, 애도 아직 저녁을 못 먹었을지 모른다고 밥그릇을 도로 끌어다 한 술 입에 떠 넣으며 이번에는 애 보고, 맛있으니 너도 먹으라는 것이었으나, 자신은 입맛을 잃은 탓만도 아닌 무엇이 밥 넘기려는 목에서 치밀어 올라오곤 해, 좀처럼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송 영감이 죽인지 밥인지 모를 것을 끓였다. 여전히 입맛은 없었으나 어제저녁처럼 목이 메어오르는 것은 없었다. 오늘도 또 지어올리는 독을 말리느라고 처음에는 독 밖에 피워 놓았다가 독이 한 반쯤 지어지면 독 안에 매달아 놓은 숯불의 숯내까지가 머리를 더 무겁게 했다. 사십 년래 없이 숯내를 다 먹는 듯했다. 송 영감은 어제보다 더 쓰러져 넘어지는 도수가 많았다. 흙 이기던 왱손이가 이래서는 도무지 한 가마 채우지 못하리라고 송 영감에게 내년에 마저 지어 첫가마에 넣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몇 번이고 권해 보았으나 송 영감은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하면서도 독 짓기를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송 영감이 한번 쓰러져 있는데 방물장수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와서, 앓는 몸을 돌봐야 하지 않느냐고 하며, 조미음 사발을 송 영감 입 가까이 내려놓았다. 송 영감은 어제 어린 아들에게 거랑질해 왔다고 고함을 쳤던 일을 생각하며, 이 아무에게나 친절한 앵두나뭇집 할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어제만 해도 애한테 밥이랑 그렇게 맘이 줘 보내서 잘 먹었는데 또 이렇게 미음까지 쑤어 오면 어떡하느냐고 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그저, 어서 식기 전에 한 모금 마셔 보라고만 했다. 그리고 송 영감이 미음을 몇 모금 못 마시고 사발에서 힘없이 입을 떼는 것을 보고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정말 이 영감이 이번 병으로 죽으려는가 보다는 생각이라도 든 듯, 당손이를 어디 좋은 자리가 있으면 주어 버리는 게 어떠냐고 했다. 송 영감은 쓰러져 있던 사람같지 않게 눈을 흡떠 앵두나뭇집 할머니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어느 새 송 영감의 손은 앞에 놓인 미음사발을 앵두나뭇집 할머니에게로 떼밀치고 있었다. 그런 말하러 이런 것을 가져 왔느냐고, 썩썩 눈앞에서 없어지라고, 송 영감은 또 쓰러져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고함쳤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송 영감의 고집을 아는 터라 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가자, 송 영감은 지금 밖에서 자기의 어린 아들이 어디로 업혀가기나 하는 듯이 밖을 향해 목청껏, 당손아! 하고 애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애가 뜸막 문에 나타나는 것을 이번에는 애의 얼굴을 잊지나 않으려는 듯이 한참 쳐다보다가 그만 기운이 지쳐 감아 버리고 말았다. 애는 또 전에 없이 자기를 쳐다보는 아버지가 무서워 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섰다가, 아버지가 눈올 감자 더 겁이나 훌쩍이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송 영감은 독짓기보다 자리에 쓰러져 있는 때가 많았다. 백 개가 못 차니 아직 이십여 개를 더 지어야 한 가마 충수가 되는 것이다. 한 가마를 채우게 짓자 하고 마음만은 급해지는 것이었으나, 몸을 일으키다가 도로 쓰러지며 횐 털 섞인 노랑수염의 입을 벌리고 어깨숨을 쉬 곤 했다.

그러한 어느 날, 물감이며 바늘을 가지고 한돌림 돌고 온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찾아와서는 마침 좋은 자리가 있으니 당손이를 주어 버리고 말자는 말로, 말이 난 자리는 재물도 넉넉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 마음씨가 무던하다는 말이며, 그 집에 전에 어떤 젊은 내외가 살림을 엎어 치우고 내버린 애를 하나 얻어다 길렀는데 얼마 전에 그 친아버지 되는 사람이 여남은 살이나 된 그애를 찾아갔다는 말이며, 그때 한 재물 주어 보내 고서는 영감 내외가 마주앉아 얼마 동안을 친자식 잃은 듯이 울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며, 그래 이번에는 아버지 없는 애를 하나 얻어다 기르겠다더라는 말을 하면서, 꼭 그 자리에 당손이를 주어 버리고 말자고 했다. 송 영감은 앵두나뭇집 할머니와 일전의 일이 있은 뒤에도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애를 통해서 먹을 것 같은 것을 보내는 것이, 흔히 이런 노파에게 있기 쉬운 이런 주선이라도 해 주면 나중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어 그걸 탐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그저 인정 많은 늙은이라 이편을 위해 주는 마음에서 그런다는 것만은 아는 터이지만, 송 영감은 오늘도 저도 모를 힘으로, 그런 소리를 하려거든 아예 다시는 오지도 말라고, 자기 눈에 흙들기 전에는 내놓지 못한다고 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영감이 살아서 좋은 자리로 가는 걸 보아야 마음이 놓이지 않겠느냐는 말로, 사실 말이지 성한 사람도 언제 무슨 변을 당할는 지 모르는데 앓는 사람의 일을 내일 어떻게 될는지 누가 아느냐고 하며, 더구나 겨울도 닥쳐오고 하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송 영감은 그저 자기가 거랑질을 해서라도 애를 굶기지는 않을 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돌아간 뒤, 송 영감은 지금 자기가 거랑질을 해서라도 애를 굶기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사실 아내가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이 살다가는 거랑질을 할 게 무서워 도망갔음에 틀림없지만, 자기가 병만 나아 일어나는 날이면 아직 일등 호주라는 칭호 아래 얼마든지 독을 지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한 가마 독만 채워 전처럼 잘만 구워 내면 거기서 겨울 양식과 내년에 할 밑천까지도 나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서 한 가마를 채우자고 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하루는 송 영감이 날씨를 가려 종시 한 가마가 차지 못하는 독을 왱손이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지어진 독만으로라도 한 가마 구워 내리라는 생각이었다. 독말리기, 말리기라기보다도 바람쐬기다. 햇볕도 있어야 하지만 바람이 있어야 한다. 안개 같은 것이 낀 날은 좋지 못하다. 안개가 걷히며 바람 한 점 없이 해가 갑자기 쨍쨍 내리쬐면 그야말로 걷잡을 새 없이 독들이 세로 가로 터져 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좀 치는 게 독말리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독들을 마당에 내이자 독가마 속에서 거지들이, 무슨 독을 지금 굽느냐고 중얼거리며 제가끔의 넝마 살림들을 안고 나왔다. 이 거지들은 가을철이 되면 이렇게 독가마를 찾아들어 초가을에는 가마 초입에서 살다, 겨울이 되면서 차차 가마가 식어 감에 따라 온기를 찾아 가마 속 깊이로 들어가며 한겨울을 나는 것이다. 송 영감은 거지들에게, 지금 뜸막이 비었으니 독 구워 내는 동안 거기에들 가 있으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전에 없이 거지들을 자기 집에 들인다는 것이 마치 자기가 거지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가마에서 나은 거지들은 혹 더러는 인가를 찾아 동냥을 가고, 혹 한 패는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웠고, 몇 이는 아무 데고 앉아서 이 사냥 같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송 영감도 양지에 앉아서 독이 하얗게 마르는 정도를 지키고 있었다. 독들을 가마에 넣을 때가 되었다. 송 영감 자신이 가마 속까지 들어가 전에는 되도륵 독이 여러 개 들어가도록만 힘쓰던 것을 이번에는 도망간 조수와 자기의 크기 같은 독이 되도록 아궁이에서 같은 거리에 나란히 놓이게만 힘썼다. 마치 누구의 독이 잘 지어졌나 내기라도 해 보려는 듯이.

늦저녁 때 쯤해서 불질이 시작됐다. 불질. 결국은 이 불질이 독을 못 쓰게도 만드는 것이다. 지은 독에 따라서 세게 때야 할 때 약하게 때도, 약하게 때야 할 때 지나치게 세게 때도, 또는 불을 더 때도 덜 때도 안 된다. 처음에 슬슬 때다가 점점 세게 때기 시작하여 서너 시간 지나면 하얗던 독들이 흑색으로 변한다. 거기서 또 너더댓 시간만 때면 독들은 다시 처음의 하얗던 대로 되고, 다음에 적색으로 탔다가 이번에는 아주 샛말갛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쇠가 녹는 듯. 하늘의 햇빛을 쳐다보는 듯이 된다. 정말 다음날 하늘에는 맑은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곁불놓기를 시작했다. 독가마 양옆으로 뚫은 곁창 구멍으로 나무를 넣는 것이다. 이제는 소나무를 단으로 넣기 시작했다. 아궁이와 곁창의 불길이 길을 잃고 확확 내쏜다. 이 불길이 그대로 어제 늦저녁부터 아궁이에서 좀 떨어진 한곳에 일어나 앉았다 누웠다 하며 한결같이 불질하는 것을 지키고 있는 송 영감의 두 눈 속에서도 타고 있었다.

이렇게 이날 해도 다 저물었다. 그러는데 한편 곁창에서 불질하던 왱손이가 곁창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분주히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송 영감은 벌써 왱손이가 불질하던 곁창의 위치로써 그것이 자기의 독이 들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왱손이가 뭐라기 전에 먼저, 무너앉았느냐고 했다. 왱손이는 그렇다고 하면서, 이젠 독이 좀 덜 익더라도 곁불질을 그만두고 아궁이를 막아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그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냥 불질을 하라고 했다.

거지들이 날이 저물었다고 독가마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송 영감이,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속을 죄고 있을 때였다. 가마 속에서 갑자기 뚜왕! 뚜왕! 하고 독 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송 영감은 처음에 벌떡 반쯤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으며 이상스레 빛나는 눈을 한 곳에 머물린 채 귀를 기울였다. 송 영감은 가마에 넣은 독의 위치로, 지금 것은 자기가 지은 독, 지금 것도 자기가 지은 독, 하고 있었다. 이렇게 튀는 것은 거의 송 영감의 것뿐이었다. 그리고 송 영감은 또 그 튀는 소리로 해서 그것이 자기가 앓다가 일어나 처음에 지은 몇 개의 독만이 튀지 않고 남은 것을 알며, 왱손이의 거치적거린다고 거지들을 꾸짖는 소리를 멀리 들으면서 어둠 속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송 영감이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자기네 뜸막 안에 뉘어 있었다. 옆에서 작은 몸을 오그리고 훌쩍거리던 애가 아버지가 정신 든 것을 보고 더 크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송 영감이 저도 모르게 애보고 안 죽는다, 안 죽는다, 했다. 그러나 송 영감은 또 속으로는, 지금 자기는 죽어가고 있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이튿날 송 영감은 애를 시켜 앵두나뭇집 할머니를 오게 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오자 송 영감은 애더러 놀러 나가라고 하며 유심히 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치 애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앵두나뭇집 할머니와 단둘이 되자 송 영감은 눈을 감으며, 요전에 말하던 자리에 아직 애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된다고 했다. 얼마나 먼 곳이냐고 했다. 여기서 한 이삼십 리 잘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보낼 수 있느냐고 했다. 당장이라도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치마 속에서 지전 몇장을 꺼내어 그냥 눈을 감고 있는 송 영감의 손에 쥐어 주며, 아무 때나 애를 데려오게 되면 주라고 해서 맡아 두었던 것이라고 했다.

송 영감이 갑자기 눈을 뜨면서 앵두나뭇집 할머니에게 돈을 도로 내밀었다.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없으니 애 업고 가는 사람에게나 주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애 업고 가는 사람 줄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송 영감은 그래도 그 사람을 주어 애를 잘 업어다 주게 해 달라고 하면서, 어서 애나 불러다 자기가 죽었다고 하라고 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저고릿고름으로 눈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송 영감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물일랑 흘리지 않으리라 했다. 그러나 앵두나뭇집 할머니가 애를 데리고 와 저렇게 너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을 때, 감은 송 영감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홀러 내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앵두나뭇집 할머니는 억해 오는 목소리를 겨우 참고, 저것 보라고 벌써 눈에서 썩은 물이 나온다고 하고는, 그러지 않아도 앵두나뭇 집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 더 아버지에게 가까이 갈 생각을 않는 애의 손을 끌고 그곳을 나왔다.

그냥 감은 송 영감의 눈에서 다시 썩은 물 같은, 그러나 뜨거운 새 눈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러는데 어디선가 애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을 떴다. 아무도 있을 리 없었다. 지어 놓은 독이라도 한 개 있었으면 싶었다. 순간 뜸막 속 전체만한 공허가 송 영감의 파리한 가슴을 억눌렀다. 온몸이 오므라들고 차 옴을 송 영감은 느꼈다. 그러는 송 영감의 눈앞에 독가마가 떠올랐다. 그러자 송 영감은 그리로 가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거기에만 가면 몸이 녹여지리라. 송 영 감은 기는 걸음으로 뜸막을 나섰다. 거지들이 초입에 누워 있다가 지금 기어 들어오는 게 누구이라는 것도 알려 하지 않고, 구무럭거려 자리를 내주었다. 송 영감은 한옆에 몸을 쓰러뜨렸다. 우선 몸이 녹는 듯해 좋았다. 그러나 송 영감은 다시 일어나 가마 안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지금의 온기로써는 부족이라도 한 듯이. 곧 예삿사람으로는 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송 영감은 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덮어놓고 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이 발산하는 듯 어둑한 속에서도 이상스레 빛나는 송 영감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열어제친 곁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늦가을 맑은 햇빛 속에서 송 영감은 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찾던 것이 예 있다는 듯이. 거기에는 터져나간 송 영감 자신의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송 영감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단정히, 무릎을 끓고 앉았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터져나간 자기의 독 대신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1950년 作)

☆ 황순원(1915~2000)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1915~2000)은 시인으로 출발해 단편 작가를 거쳐 장편 작가로 나아가는 문학적 궤적을 보인, 해방 이후 이 땅의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순원 문학 세계의 특성은 시적 서정성, 언어의 조탁, 고품격의 간결한 문체,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집약할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신변적 소재를 주로 다루었는데, 토속 정서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중기로 넘어오면 수난과 격변의 시대 현실이 작품의 배경으로 자주 깔리면서 격동하는 역사와 현실이 개인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해 삶의 무늬를 만드는가 하는 문제가 탐색된다.

후기의 장편 소설 시대에는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시대 현실이라는 외적 요소가 희미해지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탐색으로 회귀한다. 황순원은 일제 강점기, 전쟁과 분단, 개발 독재 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품격을 훼손한 적이 없는 작가다. 그는 이처럼 올곧은 삶을 유지하며 고집스럽게 ‘인간성 옹호’ 또는 ‘인간 중심주의’의 문학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후학들로부터 “작가 정신의 사표(師表)”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황순원은 1942년께부터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고향 집의 골방에 틀어박혀 「기러기」·「병든 나비」·「얘」·「황 노인 ·「머리」·「세레나데」·「노새」·「맹산 할머니」·「물 한 모금」·「독 짓는 늙은이」·「눈」 등을 집필한다. 그러면서도 지상에는 전혀 발표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가 해방 뒤에 비로소 이 작품들을 내놓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예술원 회원과 대학 교수 외에는 정치 활동이나 공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철저한 결벽성을 보여준다. 작품도 신문 소설, 수필, 비평 등은 거의 손대지 않고 시와 소설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는 이처럼 생애와 문학 양면에서 일관되게 염결성을 지켜낸 작가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군 재경면에서 태어난다. 향리의 황씨 집안은 누대에 걸친 명문으로, 조선 영조 때 사람인 '황 고집'이라는 유명한 효자가 그의 8대 방조다. 가문의 이런 기질적 전통은 황순원 자신은 물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맏아들이자 시인인 황동규에 이르기까지 발견된다. 일곱 살이 되던 해 황씨 집안은 평양으로 이사하고 2년 뒤 황순원은 평양 숭덕소학교에 들어간다. 소학교 시절 황순원은 당시로선 드물게 스케이트도 타고 축구도 했으며 바이올린 레슨까지 받았다고 한다. 화가 이중섭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열두세 살 때부터 체증을 다스리기 위해 어른들의 허락하에 소주를 마시기 시작해 소주 애호가가 된다.

1929년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 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난다. 그는 한 학기 뒤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는데, 이 무렵부터 동요와 시를 써서 1931년 『동광』에 처녀시 「나의 꿈」·「아들아 무서워 말라」 등을 발표한다. 193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에서 수학한다. 황순원은 같은 해에 이해랑·김동원 등과 극예술 연구 단체인 '학생예술좌'를 창립해 활동하면서 그 동안 쓴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방가(放歌)』를 펴낸다. 이 시집에는 양주동의 서문과 자신의 짧은 머리말, 27편의 시가 실린다. 이듬해 여름, 그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도쿄에서 이 시집을 간행한 혐의로 평양경찰서에서 29일 동안 구류를 당한다.

1935년 1월, 황순원은 학생 신분으로 역시 일본 나고야 긴세이여자전문의 학생이던 양정길을 일생의 반려자로 맞아들인다. 양정길은 여학교에 다닐 때 문예반장을 지낸 문학 소녀였는데, 그 때부터 황순원과 교제한 것으로 알려진다. 황순원은 뒷날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의 문학이 불가능했다고 돌아볼 만큼 신앙심이 깊고 문학에 조예를 갖춘 양정길의 도움을 받는다. 같은 해 황순원은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삼사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하는데, 『삼사문학』은 모더니즘을 추구하되 김기림이나 김광균 문학의 서정적 요소에 불만을 품고 쉬르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인다.

1936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간 뒤에는 '창작' 동인이 되어 모더니즘 색채를 띤 시들을 쓰며, 얼마 뒤 이들을 모아 두 번째 시집 『골동품』을 펴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뒤 그는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 힘쓴다. 1940년 황순원은 드디어 첫 단편집 『늪』을 내놓는다. 이어 그는 단편 「별」을 통해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후에도 『춘추』에 「그늘」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그는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1942년 낙향, 묵묵히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한다.

해방 뒤인 1946년 황순원은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월남한다. 이후부터 차츰 현실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 1946년 『신천지』에 단편 「술 이야기」, 1947년 「술」 등을 발표한다. 1948년에 나온 두 번째 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는 한결 확장된 그의 시야를 보여준다.

1949년 『대조』에 단편 「곰녀」를 발표한 황순원은 이를 장편 형식으로 변형시켜 1950년 「별과 같이 살다」라는 제목으로 내놓는다. 「별과 같이 살다」는 1947년부터 「암콤」·「곰녀」·「곰」 등의 제목으로 여기저기 내놓은 단편에 미발표분을 합쳐 묶은 것으로, 황순원의 장편 소설로는 유일하게 '곰녀'라는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황순원은 이 작품에서 일제 말기부터 해방 직후의 격동기를 거치며 하녀, 창녀 등으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순진성과 건강성을 잃지 않는 곰녀를 통해 다시 한 번 생존에 관한 문제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장편 형식으로 나온 「별과 같이 살다」는 문체나 구성 면에서 아직 단편의 특성이 적잖게 남아 있는 느낌을 준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이듬해 1·4후퇴 때 황순원은 피난지인 부산에서 전쟁 체험 위에 상징과 서정적 음영이 깔린 단편 「곡예사」를 비롯해 「기러기」와 「어둠 속에 찍힌 판화」를 잇달아 발표한다. 그는 전시인 1951년과 1952년에 단편집 『기러기』와 『곡예사』를 펴낸다. 이어 1953년에는 단편 「학」과 「소나기」를 『신천지』와 『신문학』에 각각 내놓는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 그는 해방 직후부터 6·25 직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계급 갈등과 인간성의 파괴 등에 얽힌 역사적 체험을 담아낸 장편 『카인의 후예』를 내놓는다. '견우 직녀' 설화에서 따온 '오작녀'라는 이름과 '카인'이라는 기독교 설화의 운명적 상징의 교차를 통해 휴머니즘을 형상화한 이 소설로 황순원은 '아세아 자유 문학상'을 받게 된다.

1948년에 나온 창작집의 표제이기도 한 단편 「목넘이 마을의 개」는 '신둥이'라는 암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우리 동포가 살 길을 찾아 북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목넘이 마을'에 어느 날 우연히 암캐 한 마리가 흘러든다. 버림받고 굶주려 헤매는 암캐 신둥이를 마을 사람들은 미친 개로 단정짓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로 모의한다. 다행히 갓난이 할아버지에 의해 신둥이는 목숨을 건지고 새끼들까지 낳게 된다. 작가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험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존을 유지하며 번식까지 하는 암캐 신둥이를 통해 생명의 경건성을 환기시키고 나아가서는 삶의 본질적 의미까지 파헤친다.

『목넘이 마을의 개』 외에도 『 늪』·『기러기』·『곡예사』 등 여섯 권의 단편집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작가 황순원의 역량은 단편 소설 분야에서 한결 빛난다. 시대와 사회 자체보다는 인생의 한 단면이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주목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것을 표현할 때 일찍이 시를 쓰면서 익힌 절제와 문장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점 등이 바로 이 작가의 진면목을 반영한다. 간결하고 감각적인 황순원의 문체는 서사성이 중시되는 장편보다는 묘사와 서정성, 정서적 감응력이 중시되는 단편 소설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장편 소설로 선보인 『카인의 후예』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지주 계급이 탄압받는 이야기가 기둥 줄거리를 이루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6·25에 앞서 진행된 토지 개혁을 둘러싼 여러 인물 사이의 갈등을 통해 북한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황씨 가문이 실제로 겪은 바가 적잖게 들어 있으며, 그의 가족이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주의 아들이자 지주인 청년 박훈은 넉 달 동안 운영하던 야학을 예고 없이 접수당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변모하는 주변 인물들을 보면서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농민들은 토지 개혁에 따른 기대감과 죄의식을 동시에 갖게 되며, 특히 박훈 집안의 마름이었던 도섭 영감은 악랄한 변신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바로 이 도섭 영감의 딸 오작녀는 박훈을 연모하며, 나중에 그를 위기에서 건져준다. 『카인의 후예』를 비롯해 황순원의 소설은 흔히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문체에 힘입은 서정성과 낭만성은 이런 내용이 한결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떠받치는 작용을 한다.

황순원은 6·25 체험을 비롯해 시대와 관련된 모순을 다룬 작품을 많이 내놓는다. 그러면서도 이 작가는 역사 자체보다 그 속에 얽혀 있는 개인의 운명과 인간애의 구현 등에 더 집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즉, 그는 전쟁의 비극을 역사적 조건과 시대적 의미의 맥락에서 설명하기보다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파악해 지독한 현실을 보여줄 뿐 뚜렷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황순원 소설에 묘한 매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면적이며 서사성이 결여되어 장편의 경우도 단편의 확대일 뿐이라는 평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1957년 황순원은 경희대 문리대 조교수로 직장을 옮기고,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된다. 이후 황순원은 정년 퇴임을 하기까지 23년 6개월 동안 아무 보직 없이 평교수로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1956년 단편집 『학』을 펴낸 그는 1957년 전쟁의 참상과 이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양상을 다룬 장편 『인간 접목(人間接木)』을 내놓는다. 1958년 『잃어버린 사람들』을 출간한 데 이어, 1960년 역시 6·25를 소재로 한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펴낸 그는 이 장편 소설로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는다. 그런데 황순원은 이 작품을 내놓은 뒤 평론가 백철과 부딪치게 된다. 작가의 의식과 시대상의 반영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다. 자신의 작품을 평한 백철에 맞서 그는 『한국일보』 1960년 12월 15일치에 「비평에 앞서 이해를」을 투고하고, 이어 「한 비평가의 정신 자세 ― 백철 씨의 소설 작법을 도로 반환함」이라는 반론을 들고 나온다.

1962년 1월 그는 자신의 장편 소설 문학의 만개를 예고하는 「일월」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현대문학』 5월호까지 이 작품의 제1부가 발표되고, 제2부는 10월호부터 이듬해 4월호까지 연재된다. 한 해 넘게 건너뛴 1964년 8월호부터 11월호까지 제3부가 발표되어, 「일월」은 사이를 두고 거의 3년에 걸쳐 같은 잡지에 연재된다. 이 작품은 1964년 ‘창문사’에서 전 6권으로 묶은 『황순원 전집』 가운데 제6권에 모아진다. 창문사에서 펴낸 『황순원 전집』은 생존 작가 최초의 개인 전집으로 우리 문학사에 기록된다. 같은 해 단편집 『너와 나만의 시간』을 펴낸 그는 1966년 장편 「일월」로 3·1 문화상을 받는다.

'삼중당'에서 전 7권으로 묶은 『황순원 문학 전집』이 나온 것은 1973년의 일이다. 같은 해에 내놓은 장편 소설 『움직이는 성(城)』을 통해 그는 외래 종교와 민간 신앙의 한 형태인 무속 등을 매개로 인간의 근원적 심성과 의식 세계를 탐색하고, 실존의 한계와 초극 등 삶의 밑자리에 깔려 있는 문제를 다룬다. 그의 여섯 번째 장편 「움직이는 성」은 「일월」 이후 4년 동안의 구상 끝에 『현대문학』 1968년 5월호부터 1972년 10월호까지 발표된다. 집필에 5년이 걸린 이 작품은 황순원 문학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

1976년 황순원은 단편집 『탈』을 펴낸다. 1977년 그는 자기 문학의 출발지인 시로 돌아가서 『한국문학』에 「돌」·「늙는다는 것」·「고열을 앓으며」·「겨울 풍경」 등을 발표하기도 한다. 1980년 경희대에서 정년 퇴직한 황순원은 이후에도 같은 학교 명예 교수로 있으며, 변모해가는 농촌의 생활상을 통해 삶의 지표를 제시한 「신(神)들의 주사위」 등 7편의 장편을 내놓는다. 1982년에 발표한 「신들의 주사위」로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을 받는다. 1985년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전 12권의 『황순원 전집』이 나온다. 흐트러짐 없이 문학의 길을 걸으며 후배 작가와 제자들의 존경을 받던 황순원은 2000년 9월에 여든다섯을 일기로 숨진다.

/ 2020.06.26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