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농무 신경림, 사평역에서 곽재구,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2020.05.28)

푸레택 2020. 5. 28. 19:51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농무 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기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사평역에서 (곽재구)

이 시는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기차역 대합실의 정경을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추억, 아픔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와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밤늦게 막차를 기다리며 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에 지친 군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피곤에 지쳐 조는 모습, 감기에 걸려 쿨럭거리는 모습, 침묵하는 모습들에서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통찰하게 된다.
화자는 이들의 삶의 애환에 연민을 느끼며 ‘한 줌의 톱밥, 한 줌의 눈물’을 ‘난로에 던지는 행위’를 통해 이들을 위로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노동자로 대표되는 민중이 처한 현실과 삶의 비애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정희성이 1978년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노동자는 중년의 사나이다. 일이 끝나고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흐르는 강물에 삽을 씻고, 하루의 삶과 나아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며, 힘겹게 살아야만 했던 지난 날들의 아픔을 털어내고자 한다. 그에게 하루의 고단함을 떨쳐내는 유일한 위로는 오직 담배 한 대뿐이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난 뒤, 그가 가야할 곳은 삶의 재충전은 고사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그런 마을이다. 이와 같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힘겨운 현실 아래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비애 어린 현실을 ‘흐르는 물’이라는 자연물과 연계하여 절제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삽은 노동의 신성함과 그것에 의지해 삶을 꾸려가는 노동자 자신의 운명을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다. 날이 저문 뒤 노동자는 그 삽을 흐르는 물에 씻고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간다. 뛰어난 서정성과 고전적 품격이 조화를 이룬 이 시의 문면이 실어 나르는 것은 아무리 일해도 곤궁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노동자 계급의 분노와 실의다. 1970년대의 민중시는 지식인이 현실에서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돌려 그들의 애환과 분노를 노래하는 것이 큰 흐름을 이룬다. 이 시는 지식인이 쓴 것이지만, 과감하게 그 화자로 날품팔이에 기대어 곤궁한 삶을 꾸려가는 노동자를 내세워 기층 계급의 고단한 삶과 생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비평가 서준섭은 “시선(화자)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이고 새로운 인식 내용은 새로운 형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노동자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운 것은 시인의 현실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징후다.

♤ 농무 農舞 (신경림)

이 시는 농촌의 절망적인 현실을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에는 ‘농무(農舞)’라는 놀이가 등장하나 이것은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다. 농무는 농민들의 한풀이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시는 농민들에게 밀려오는 것은 허탈감뿐이다. 삶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와 ‘이까짓/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라는 구절을 통해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허탈감과 원통함, 울분을 안고 농무를 추면서 쇠전을 거쳐 도수장까지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들이 지닌 한(恨)은 ‘신명’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신명’은 분노를 삭이면서 형성된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겉으로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문학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울분과 한의 정서에 공감을 하게 된다.

[출처] Daum 백과

/ 2020.05.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