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청보리 문무학, 삶이 나를 불렀다 김재진,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이병률 (2020.05.05)

푸레택 2020. 5. 5. 08:10

 

 

 

 

 

● 청보리 / 문무학 시인

 

도라지꽃 입술로 봄을 씹던 누부야

앞들 논 서 마지기 보릿골 이랑마다

긴긴 해 허기를 물고 꿈을 캐고 있었제

 

꽃불타던 산허리 뻐꾸기 봄을 울면

아지랑이 아물아물 나른한 한 나절을

누부야 청보리같이 그래 살고 싶었제.

 

● 삶이 나를 불렀다 / 김재진 시인

 

한때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다.

남보다 목소리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턱없이 손해보며 살려 하진 않던

그런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이 막 신록으로 갈아입던 어느 날

지금까지의 삶이 문득

목소리 바꿔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고 있는 건가?

반짝이는 풀잎과 구르는 개울

하찮게 여겨왔던 한 마리 무당벌레가 알고 있는

미세한 자연의 이치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며

그렇게 부대끼는 것이 삶인 줄만 알았다

북한산의 신록이 단풍으로 바뀌기까지

노적봉의 그 벗겨진 이마가 마침내

적설에 덮이기까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

 

●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 이병률 시인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꽃향은 두고

마늘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신(神)에게 다가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 2028.05.05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