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소설읽기] 「오마니별」김원일 (2020.04.08)

푸레택 2020. 4. 8. 21:55

 

 

 

 

 

 

 

● 오마니별 / 김원일

 

"조씨 있는가?"

하고 부르는 소리가 길 아래쪽에서 들렸다. 전지 불빛이 마당 입구를 스쳐 갔다. 어스름은 늘 골짜기 아래에서부터 바람을 몰아왔고, 등성이를 타고 오른 바람이 펼친 치마폭인 듯 산을 흔들며 훑어 나갔다. 느릅나무와 개암나무가 스산스레 잎을 지웠다. 마당을 덮은 가랑잎이 아이들 줄 세우듯 가지런히 선 참깨 묶음을 비껴 언덕 아래로 쓸려 갔다. 전지 불빛이 마당까지 올라오자 불빛과 인기척을 알아챈 염소 우리의 염소들이 기척을 내며 수런댔다. 울은커녕 삽짝조차 없는 마당으로 당주골 이장 황씨가 들어섰다. 이장 손에 들린 전지 불빛이 뒷마루에 나앉은 조씨를 집어냈다.

 

"귀신 나오겠군. 왜 불도 안 켜고우두커니 앉았어."

가는귀먹은 조씨라 황 이장이 큰 소리로 나무라곤, 마루로 올라와 손수 형광등을 켰다. 전구가 몇 번 깜박거리더니 흐릿한 빛을 냈다.

"전구를 갈아야겠군. 저녁은 먹었어?"

"암, 한술 떴지."

시무룩한 조씨 말에 황 이장이 전기 코드가 꽃힌 전기밥통 뚜껑을 열었다. 두 끼니쯤 밥이 남아 있었다. 흠투성이 낡은 두레상에는 치우지 않은 먹다 남긴 밥그릇에 찬이라곤 김치, 멸치조림, 새우젓이 고작이었다. 홀아비 노인의 지지리 궁상에 이장이, 나이도 있는데 이렇게 먹어서야 어떻게 힘을 써, 하곤 혀를 찼다. 저녁 찬으로 먹고온 김치찌개며 된장국이 남았다면 처에게 가져다주라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네 어디 갔더랬어?"

"뭐라구?"

"낮에 말야."

목을 빼고 꾸부정히 앉은 조씨가 대답을 않다 허리 뒤를 가만가만 주물렀다. 이장이 허리가 아프냐고 물었다. 조씨가 아니야, 괜찮아 하며, 호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낮참에 조씨는 염소들을 몰고 범바위로 올라갔다가 새끼 염소 한 마리가 엇길을 놓기에 그놈 뒤를 쫓다 허방에 발을 접질려 바위에 허리를 찧은 게 시큰하게 둔통이 왔던 것이다. 조씨는 풀을 한짐 베어서 지게에 지곤 여덟 마리 염소를 몰고 절름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예 일을 작파해 참깨털이도 제쳐 두고 방 안에 늘어져 누웠다가 저녁밥 한술도 뜨다 말다 했다. 한 해 다르게 염소치기며 밭농사가 힘에 부치는 조씨에게 그런 실수는 이제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낮에 말일세 분교 선생이 마을로 올라왔어. 자네 만나러 집에 들렀더니 없더라며 내일 다시 오겠다더군."

"뭐라구, 선생이?"

"그래, 선생이."

황 이장이 뜸을 들였다가 조씨 결에 바투 앉아 큰 소리를 내질렸다.

"자네한테 손위 누이가 있었다고 했지? 전쟁 때 잃었다는 누님 말야? 그건 기억하고 있잖은가."

"암, 누이가 있었어. 폭격 맞고 죽었지. 그런데 왜?"

조씨가 머리를 틀고 침침한 눈을 닦으며 물었다.

 

1951년 초다듬 그해 첫겨울, 조씨는 손위 누이가 비행기 폭격에 죽었다 믿고 있었다. 엄마도 그렇게 폭격 맞고 운신 못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조씨는 엄마가 숨 거두는 순간을 누이와 함께 지켜보았기에 다른 기억은 다 망가졌어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만은 색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땅이 꽝꽝 얼어 오마니를 묻어 줄 수도 없다며 누이가 오랫동안 섭게 울었다.

"만약에 말일세, 그 누님이 아직 살아서 자네를 찾는다면 어떡하겠나?"

"날 찾는다구? 실없는 소리 말게. 내가 본걸. 갑자기 비행기가 나타나 총을 쏘아 대구 폭탄이 떨어지자 그 통에 사람이 많이 죽었어. 나중에 보니 누이가 없어졌어. 아무리 찾아도 누이가 없어. 그때 폭격 맞구 죽은 거야."

"자네는 누님을 늘 누이라고 불러 헷갈리네. 자네 말대로라면 손위로 누님 맞지, 그렇지?"

"그래 맞아, 내 위 누이야."

 

(중략)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하염없이 걷고 걸었던 그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을 나는 이날 이때까지 하루도 잊어 본 적 없답니다. 그럼 내가 묻겠어요.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던 겨울밤은 생각납니까?"

줄리 여사 통역을 듣던 황 이장이 답답해 미실 지경이란 듯 조씨 무릎을 혼들며 조씨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건 기억난다고 했잖아. 꾸물대지 말구 어서 말해 봐"

"그래, 그래. 기억나. "

그제야 조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숨 거둔 그날 밤, 하늘을 보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안나 리 여사도 답답했던지 프랑스 말에 달아 천장을 쳐다보며,

"별, 별 말입니다!"

하고 분명한 한국 발음으로 강조했다. 그네는 터지려는 울음을 손수건으로 막았다. 한순간에 실내는 숙연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조씨 얼굴에 쏠렸다.

조씨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추위를 타듯 어깨을 움츠리고 온몸을 떨어 댔다.

"하늘에 별?"

"별 보구 내 뭐라 말했어?"

봇물이 터진 듯 안나 리 여사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터졌고 낮춤말을 썼다. 그네가 팔걸이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훨체어가 흔들렸다.

 

"오마니별, 거기 있어..."

허공을 보는 조씨 입에서 꿈결이듯 그 말이 흘러나왔고 눈동자가 뿌옇게 풀어졌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 격한 감정을 다스리던 안나 리 여사의 비탄이 터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마니별을 알다니! 내 동생이 틀림없어!"

엄마가 숨을 거둔 겨울밤이었다. 폭격으로 반쯤 허물어진 빈집의 무너진 천장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고, 찬 별들이 하늘 가득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헌 이불을 둘러쓰고 서로 껴안아 체온으로 밤을 새울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누이가 말했다. 중길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 두 개를 봐. 아바지별과 오마니별이야. 천지 강산에 우리 둘만 남기구 아바지가 오마니 데빌구 하늘에 가서 별루 떴어. 저기, 저기 오마니별 보여?

 

"중길아! 네 이름은 이중길이야. 여기루 오라구!"

안나 리 여사가 떨리는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외쳤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현 선생이 앞으로 나서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안나 리 여사 며느리는 뒤쪽에 따로 준비해 둔 한 아름 생화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으며 조씨 쪽으로 걸어왔다.

 

[출처] 중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 작가 소개

 

김원일(1942~ ): 민족 분단의 비극을 주로 다룬 대표적인 작가, 1968년 (현대문학>에 단편 「소설적 사내」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현대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소설가 김원일이 6 · 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소재로 쓴 역사 소설이다. 등단 이후 꾸준히 분단과 그로 인해 헤어진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많은 소설을 쓴 작가답게, 이 작품에서도 역시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돋보인다.

 

주인공인 조평안 노인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56년을 살아왔는데 이는 죽지 않고 나름대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생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행기 폭격으로 인해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어 가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던 어린아이는 전쟁의 상처를 혼자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 조평안 노인이나 성환 사는 이씨 노인 모두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커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억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누나인 안나 리 여사 또한 똑같은 전쟁 경험을 했는데 미군들이 이유를 묻지 않고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현장상을 목격했기에 자신을 입양해서 키워 준 양부모의 나라 미국을 떠나 전쟁이 없는 제3국 스위스에서 사는 것을 선택한다. 또한 의도적으로 한국말을 하지 않아 56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어를 잊어버렸다. 안나 리 여사가 평화 집회에 나가며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 어렸을 때 겪은 끔찍한 전쟁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의도적으로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중립국인 스위스를 선택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이름 이수옥과 이중길 두 남매의 이러한 사연은 주변 인물들인 현 선생, 황 이장, 줄리 선생 등의 눈으로 보다 다양하게 서술되었다. 특히 외국인인 줄리 선생이 6· 25전쟁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슬픈 가족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보다 객관적으로 6.25전쟁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출처] 검인정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 중1 교과서 소설

 

/ 2020.04.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