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봄꽃산책] 일산호수공원 봄꽃, 튤립 작약 비비추 (2020.04.03)

푸레택 2020. 4. 3. 20:31

 

 

 

 

 

 

 

 

 

 

 

 

 

 

 

 

 

 

 

 

♤ 일산호수공원 봄꽃: 튤립 작약 비비추

 

어김없이 봄은 오고 꽃은 피었습니다.

우리네 마음에도 꽃이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발한 꽃들처럼 웃음꽃이 다시 활짝

필 날을 기다리며 조금만 더 힘내요. 우리!

모두 화이팅!

 

● [이유미의 다시 광릉 숲에서] 보춘화와 튤립

 

지난 며칠, 어떤 이야기로 지면을 채울까 참으로 고민이 깊었습니다. 글이란 읽는 사람이 공감하며 마음의 위로 혹은 행복을 주거나 교훈이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그 어떤 순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한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이 어려움 속에 계신 지금, 숲과 나무 이야기로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자칫 철없는 꽃 타령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 식물이야기도 지금의 위기 상황을 반영한 정보를 담을 글을 보태야 하는지, 유사 혹은 가짜 정보의 홍수 속에 정말 꼭 필요한 간결한 팩트가 아니라면 스트레스를 가증시킬 수 있는데 하는 염려들이 꼬리를 물더군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이 생각 저 생각이 깊어질 즈음, 탁자 위에 놓아둔 화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인이 선물해 준 보춘화(흔히 춘란이라고 부르는 우리 난초의 식물학적 이름)의 꽃대가 올라오는 듯 싶어 가까이 놓아두었는데 그새 꽃이 활짝 핀 것이었습니다. 잎만 바라보고 지내다가 모처럼 꽃대를 올려 피워낸, 처음 만난 그 보춘화의 꽃은 녹색 꽃받침잎 세 장 모두에 아름다운 연노란색 무늬가 들어간 참으로 특별한 모습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은은하면서도 매력적인 꽃향기까지 느껴지더군요. 참으로 경이로워 그 순간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이 따뜻하게 올라왔습니다. 꽃이, 나무가 혹은 음악이 그렇게 여러 국민의 위로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난애호가들은 남다른 변이를 가진 난초들을 특별하게 여기며 때론 값비싸게 거래되기도 합니다. 오늘 제가 만난 이 보춘화는 어떻게 꽃받침잎과 잎에 특별한 색과 무늬를 가지게 되었을까? 원예 품종들은 자연적으로 가지는 다양한 유전적 변이들이 서로 표현되는 가운데 원하는 특별한 보습을 골라내는 선발 육종을 하기도 하고, 일부러 돌연변이들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 생기는 돌연변이는 대부분 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 여러 화학적 또는 물리적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때론 바이러스와 각은 생물학적인 요인이 작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튤립에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미 글과 그림으로 비교적 최근에 <튤립피버>라는 영화도 나왔지요, 원래 야생하는 튤립 종류들의 고향은 중앙아시아 톈산산맥을 비롯한 인근 지역인데 페르시아를 거쳐 터키로 왔으며, 오스만 터키인들이 이를 가져다가 재배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튤립을 워낙 좋아한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튤립 모양을 딴 터번을 만들어 머리에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6세기에 유럽 주로 네덜란드로 건너와 재배되었는데 꽃이 워낙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튼튼한 튤립은 인기가 치솟았고 더 특별한 새 품종의 튤립을 만들고자 했으며 많은 이들이 가산을 모두 팔아 작은 땅을 마련하며 구근을 키웠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꽃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꽃값은 폭락하여 파산이 속출했지요. 그중 가장 유명하고 비싼 튤립 품종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로 꽃 한 포기가 집 한 채의 값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빨간 꽃에 흰색의 특별한 무늬가 생기게 된 이유가 바로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생긴 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수백 년 전 네덜란드를 어려움에 빠트렸던 튤립 열풍, 그러나 이제 네덜란드는 이를 극복하고 바로 그 튤립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 당혹스러운 어려움을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극복하여 더 단단하고 강한 대한민국이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이 없이 새봄, 정원에 피어날 고운 튤립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2020.03.03 신문기사 발췌)

 

● 튤립 파동 (Tulip mania)

 

튤립 한 송이, "부자 왕"이란 별명으로 알려짐, 1637년 네덜란드 도록에 실린 것이다. 튤립의 구근은 그 가격이 크기에 따라 3000에서 4200 플로린에 달했다. 당시 능숙한 장인이 한 해동안 열심히 일하면 300 플로린을 벌 수 있었다.

 

튤립 파동(Tulip mania)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사실상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였고, 네덜란드에 새롭게 소개되었던 튤립 구근이 너무 높은 계약 가격으로 팔리다가 급락했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높은 값으로 팔렸다. 튤립 파동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투기로 인한 거품이었다. "튤립 파동" 이란 용어는 이제 거대한 경제적인 거품(자산 가격이 내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때)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수입된 지 얼마 안 되는 터키 원산의 원예식물인 튤립이 큰 인기를 끌었고, 튤립에 대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꽃이 피지 않았는데 미래 어느 시점을 정해 특정한 가격에 매매한다는 계약을 사고파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1630년대 중반에는 뿌리 하나가 8만7000유로(약 1억600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격이 하락세로 반전되면서 팔겠다는 사람만 넘쳐났으므로 거품이 터졌다.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튤립에 투자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담보로 잡혀야만 했다. 이러한 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튤립 버블은 남해 거품 사건(잉글랜드)과 미시시피 계획(프랑스)과 함께 근대 유럽의 삼대 버블로 꼽힌다.

 

헨드릭 게리츠 포트가 1640년경에 그린 튤립 열풍에 대한 우화. 꽃의 신인 플로라는 두 얼굴의 여성과 환전상, 술꾼과 함께 차를 타고 바람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뒤를 타락한 하를럼의 직조공들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튤립의 역사는 중앙아시아의 톈산 산맥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만 제국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튤립과 만나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함락시키면서 터키인들은 장엄한 궁전을 세웠다. 그래서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하여 품종이 개량되면서 옷의 문양이나 그림에 등장했다. 16세기가 되면서 상인에 의해 유럽 각지에 전해졌다.

 

튤립은 16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으로 건너 왔으며, 네덜란드(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어 모았다.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튤립 농사는 플랑드르의 식물학자인 샤를 드 레클루제(Charles de l'Écluse)가 레이던 대학교에 소포로 튤립을 보낸 뒤 1593년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세들과 구근 식물을 연구하고 있었던 레클루제는 1593년, 레이던 대학에 초빙되었다. 레클루제는 튤립 구근과 함께 레이던으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튤립 연구 및 재배를 진행했다. 이것이 네덜란드에 튤립을 전달하게 되었다. 레클루제가 발견한 것 중에는 나중에 '브레이크'라고 불리는 돌연변이가 있다. 브레이킹을 일으킨 구근은 아름다운 점박이 꽃을 달고 있었다. 이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구근이 모자이크로 발병했기 때문이었지만, 그 구조가 해명된 것은 20세기가 되고 나서이다.

 

튤립은 단기간에 늘리기 어려운 종류이며, 결국 그것이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가격을 인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튤립은 씨앗에서 육성하는 방법과 모근에서 복제를 통해, 자근을 육성하는 방법이 있다. 씨앗에서 성장하는 교잡에서 신종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꽃을 피우기까지 3~7 년이 소요된다. 모근으로 육성하면 그 해에 바로 꽃이 피기 때문에, 모근에서 생성한 자근은 2~3 개 정도가 모근으로 성장하고, 또한 발아하지 않는 종근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급격한 수요 증가를 생산이 따라잡지 못했다.

 

1610년대, 최초로 튤립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여유 있는 식물 애호가들이었다. 아름다운 튤립 뿌리는 처음부터 고가로 거래되었다. 또한 원예 애호가들은 독자적인 품종개량 및 재배를 통해 다양한 이름의 튤립이 태어났으며

 

리프킨 제독(Admiral Liefken)

폰 데르 아이크 제독(Admiral Von der Eyk)

피세로이(부왕, Viceroy)

제네라리시모(장군, Generalissimo)

 

등이 대표적인 고급 품종이다. 특히 애호가들이 환호했던 품종은 브레이킹을 일으킨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센페이 아우구스투스〉(영원한 황제, Semper Augustus)였다. 단색 유형은 싸게 판매되었고, 이런 아름다운 꽃의 구근은 적어도 1000 플로린의 값이 매겨져 있었다. 그리고 튤립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점점 상승하게 되었다.

 

투기자들이 튤립의 인기에 주목한 것은 1634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튤립을 재배하거나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격 상승을 목적으로 시장에 진입 하였다. 튤립 논란이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 하를럼 등 다른 도시에 전해졌고, 수요 증가로 구근 판매가 활성화되었다. 그 중에는 일확천금을 이루는 사람도 나왔다. 고급 품종 구근 하나로 집이 바뀌는 일도 있게 되었다.

 

비싼 구근은 에이스(aas 1 에이스 = 0.05g) 단위로 값이 올랐다. 그렇지 않은 품종은 개수로 판매되었고, 싼 것은 부대 단위로 정량 판매되었다. 이때까지 튤립 거래는 구근이 현물로 거래되고 있었다. 또한 현물 거래를 위해 튤립 매매가 이뤄지는 겨울 동안에 그쳤다. 그러나 과열된 튤립 인기는 계절을 불문하고 거래할 수 있는 구조를 원하고 있었다.

 

튤립으로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장인과 농민 등에게도 퍼졌고, 그들도 서서히 시장에 참가했다. 밑천이 없는 서민들은 우선 자신도 살 수 있을 정도의 구근에서 시작했다. 그 정도의 품종도 값은 상승하였고, 전매 이익을 얻는 자가 속출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연중 거래와 그에 따른 선물 거래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거래는 정식 증권거래소가 아닌 술집에서 열렸다. 거래에서 현금이나 현물 구근은 필요 없었다. "내년 4월에 지불한다", "그때 구근을 배달한다"는 계약서로 끝낼 수 있고 경미한 중도금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중도금이라고 해도 현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가축과 가구와 같은 환금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통용되었다. 그 계산서가 거래를 반복하는 가운데 몇 사람을 통해 알고 있고 채권자와 채무자가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이 선물 거래 시스템을 통해 자본이 없는 사람도 투기에 참여했다. 빵굽는 사람이나 농민같은 일반인들까지 튤립 시장에 참여하면서 수요가 팽창하여 싼 품종도 급등했다. 그러나 가격 상승에 따라 본래의 구매자인 식물애호가들은 구매를 하지 않게 된다. 특히 서민들이 거래하고 있었던 싼 구근을 애호가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당시의 일화가 몇 가지 남아있다. 영국에서 온 식물애호가가 네덜란드의 친구집을 찾아갔다. 그 애호가는 보기 드문 양파 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 껍질을 벗겨 속을 열어 보았다. 친구가 돌아오자 "이것이 무슨 양파죠?"라고 물었다. "데르 아이크 제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애호가는 노트에 필기까지 해가며 계속 물었다. "이게 네덜란드에 흔한 건가요?" 그러자 친구는 애호가의 목덜미를 잡고 "함께 행정관에게 가보면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애호가는 금화 2000개의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채무자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37년 2월 3일 튤립 거래가가 갑자기 폭락했다. 가격이 떨어졌다기보다는 구매자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어음은 부도가 났으며, 지불을 할 수 없는 채무를 가진 사람이 3000명 정도였다고 했다. 네덜란드 각 도시는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여기저기에서 지불을 하지 못한 채무자와 지불을 하지 않은 채무자들의 말다툼과 도주가 이어졌다. 이제 각 채권자가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 갔다. 채무이행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자들도 있었지만, 채무자에게 이행 능력은 없었고, 사태 해결에 효과적인 수단도 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사태에 직면하자 의회와 시당국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강렬한 로비 전쟁 끝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 거래는 보류한다"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일괄 해결로 치달았다. 계약서에 의한 계약은 일괄 무효가 되었고, 소수의 파산자와 벼락 부자를 남긴 채 튤립 마니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튤립 버블은 네덜란드 경제와 그 역사에 거의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 식물 애호가들은 비싼 튤립을 계속 요구했고, 다른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문화에 미친 영향이다. 절제, 금욕을 취지로 하는 칼빈주의적 미덕관이 부활하였고, 튤립 시장에 참가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소책자가 발간되었다. 튤립을 로마 신화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하여 "욕심많은 플로라에게 바치는 바보들"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일시적으로 튤립을 싫어하게 되었고, 네덜란드 사람 사이에서 교훈으로서 구전되었다.

 

튤립 버블은 이후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검은 튤립》이나 회화에 소재로 그려졌을 뿐, 역사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은 거의 없었다. 스코틀랜드인 찰스 맥케이가 쓴 이야기를 통해 1841년 세계에 알려졌고, 이 사건은 일약 각광을 받게 된다. 그 중, 튤립 버블은 스캔들로 대중의 광기에 의한 것으로 그려졌다. 최근까지 맥케이의 거품론이 받아들여 제대로 된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E. A. 톰슨과 J. 트라자드(2002)는 튤립뿐만 아니라 당시 물가는 항상 불안정했고, 대중의 광기로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계기로 최근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튤립 버블의 개요와 역사적 위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2020.04.03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