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역사산책] (2) 고양 원당종마목장과 보경지, 철종이 잠든 서삼릉을 찾아서 (2019.06.22)

푸레택 2019. 6. 23. 08:56

 

 

 

 

 

 

 

 

 

 

 

 

 

 

 

 

 

 

 

 

 

 

 

 

 

 

 

 

 

 

 

 

 

 

 

 

 

 

 

 

 

■ 농부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철종 이야기

1
2019년 6월 22일 나의 '예릉 탐방기'
[역사산책]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철종이 잠든 서삼릉-예릉을 찾아서

오늘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다. 요즈음 날씨가 참 좋다. 미세먼지도 없고 하늘도 청명하다. 오늘은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西三陵)을 찾았다. 작년에 일산으로 이사 온 후 첫 왕릉 나들이다. 몇 년 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어 길도 익숙하고 산책도 할 겸 3호선 윈흥역에서 내려 도보로 찾아갔다. (삼송역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원흥역 6번 출구로 나와서 터널쪽으로 걸어가면 '농협대학교 1km'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한참을 걸어가니 청정지역에 농협대와 농장이 나타난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너른마당이 나온다. 카카오지도를 검색해 보니 2.7km 41분 거리로 나오는데 빠르게 걸어서 갔더니 버스 종점까지 30분 만에 도착했다.

너른마당 입구에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imitation)가 우뚝 서 있다. 중국 길림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크기의 돌을 구해 비문까지 똑같이 본떠 옮겨왔다고 하니 실로 놀랍다. 보경지에는 연꽃이 시원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연못 둘레에는 온갖 동물의 석상과 조각 예술품들이 즐비하다.

너른 마당에서 작은 언덕을 넘으니 목가적 풍경이 나타난다. 경주마를 훈련시키고 기수를 교육하는 원당종마목장이다. 하얀 나무울타리 너머 시원스런 초원에 듬성듬성 보이는 말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인 듯 참으로 평화롭다. '1.5km 30분 산책로'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오르니 6월 한달 주말 축제 기간이라 갖가지 체험 부스와 무료 승마 체험장이 열리고 있다. 포토존 너머로 또 하나의 드넓은 목장 초원이 펼쳐진다.

원당종마목장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인 서삼릉으로 들어선다. 서삼릉은 3기의 왕릉과 3기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 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박씨의 능은 효릉, 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은 예릉, 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은 소경원, 추존 장조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원은 의령원, 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은 효창원이다, 이 중 효릉과 소경원은 공개 제한으로 들어갈 수 없다.

먼저 종마목장 안에서도 보였던 희릉부터 둘러본다. 희릉은 11대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의 주요 상설(象設)에 관한 설명을 읽어 보았다. 왕릉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인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기둥 위에 살을 박아놓은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서는 향로가 아닌 어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향로(香路)는 제향시 향과 축(祝)을 모신다 하여 붙여졌고 어로(御路)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각은 정(丁)자 모양의 건물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고 비각은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희릉의 봉분이 너무 높고 깊숙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희릉을 뒤로 하고 예릉으로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도령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철종 임금, 시골 농사꾼에서 임금이 된 철종 이야기는 영화로 드라마로 숱하게 소개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강화도령이 임금이 된 흥미로운 사실만 기억할 뿐 정작 세도정치의 폐해에 관심 갖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리거나 무식한 사람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놓고 뒤에서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부(富)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세력들은 조선의 순조, 헌종, 철종 시대 이후 사라진 것일까? 노론(老論)의 후예들이 친일파로 변신하여 여전히 기득권을 움켜쥔 채 개혁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말인데도 찾는 사람들이 없어 왕릉은 고요하고 호젓하기만 하다. 주위에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만이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능을 지켜본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아는가? 슬픈 운명의 주인공들을. 자고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아는가?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잡초처럼 살다간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예릉 바로 옆쪽에 의령원과 효창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의 원인데, 의소세손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3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 원이다. 문효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경원을 비롯하여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소현세자의 두 아들 묘, 후궁들의 묘는 그 땅이 사유지란 이유로 공개를 제한하고 있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더불어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비운(悲運)의 세자라고 한다. 왕이 되지 못한 그러나 여느 왕들보다 훌륭했던 슬픈 운명을 안고 태어난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의 원인 소경원을 못 본 것이 아쉽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선의 왕릉과 원, 묘를 많이 둘러보았다. 구리에 있는 동구릉과 고양에 있는 서오릉, 남양주에 있는 홍릉과 유릉, 사릉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선릉과 정릉,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과 건릉, 남양주에 위치한 세조의 능 광릉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 있는 서울의 태릉과 강릉, 의릉은 아직 탐방을 못했다.

오늘은 서오릉을 찾아 조선왕릉을 유유자적 둘러보았다. 덤으로 원당종마목장에서 목가적 풍경을 보며 산책도 하고 연꽃 넘실대는 보경지(寶慶池)와 조각석상, 광대토대왕비도 보았다. 쾌청한 날씨에 왕릉의 호젓함이 더해져 몸도 마음도 절로 가볍다. 돌아올 때는 종점인 서삼릉·종마목장 입구 정류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041 A번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는 매 시간 10분과 40분에 삼송역을 향해 출발한다.

/ 2019.06.22 김영택 씀

 

● 문화재청 서삼릉 홍보물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 희릉(禧陵)

조선 제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윤씨의 능. 장경왕후(1491-1515)는 윤여필의 딸로, 1506년 중종의 후궁 숙의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 사이에서 1남(인종) 1녀(효헤공주)를 낳았으며,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희릉은 처음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537년(중총 32)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능침은 병풍석고를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장명 등 혼유석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 예릉(睿陵)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은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의 아들로,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순조의 왕비)의 명으로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1863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철인장황후(1837-1878)는 김문근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철총 9)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 효릉(孝陵) (공개제한)

조선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은 중종과 장경왕후 의 아들로, 1520년(중종 1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창경궁 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9개월만에 1545년(인종 1)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1514-1577)는 박용차의 딸로 1524년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릉은 쌍릉의 형식으로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서쪽이 인종, 동쪽이 인성왕후의 능침이다.

 

* 의령원(懿寧園)

추존 장조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원. 의소세손 (1750-1752)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 28) 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령원은 처음에는 의소묘라고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의령원이라 하였다. 원은 1949년 서울 북아현동에서 옮겨왔다.

 

* 효창원(孝昌園)

조선 제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 문효세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에 태어났다. 2년 뒤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처음 효창묘라고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효창원이라 하였다. 원은 1944년 서울 청파동(현 효창공원)에서 옮겨왔다.

 

* 소경원(昭慶園) (공개제한)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 소현세자 (1612-1645)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612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주로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인과 동생(봉림대군, 효종)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심양에 머무는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9년 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어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경원은 처음 소현묘라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소경원이라 하였다.

 

● 강화도령 / 박재란 (1963)

 

두메산골 갈대 밭에 등짐 지던

강화도련님 강화도련님

도련님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

음 말도 마라 사람팔자

두고 봐야 하느니라 두고 봐야 하느니라

 

음지에도 해가 뜨고 때가 오면

꽃도 피듯이 꽃도 피듯이

도련님 운수 좋아 나라님이 되시었네

음 얼싸 좋다 좋구 말구

상감마마 되셨구나 상감마마 되셨구나

 

● 철종(哲宗, 1831~63, 재위1849~63), 조선 25대 왕

 

반란에 휘둘린 불행한 집안

 

조선 말기는 사회적으로도 격변기였고 왕실 내부에서도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던 때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를 살았던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哲宗, 1831~63, 재위1849~63)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비록 33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14년 동안이나 왕위를 누렸으니 비운의 왕이라 부를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를 비운의 왕이라 하는 이유를 다음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849년 헌종(憲宗)은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었다. 왕이 아직 23세의 나이였기에 비록 왕자는 없었지만 후사를 염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왕이 갑작스레 죽자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은 허둥댔다. 젊은 대비인 김씨와 왕비인 조씨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왕의 6촌 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먼 일가라고 할 수 있는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계의 왕은 원래 항렬로 따져 동생 또는 조카뻘로 왕통을 잇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안동 김씨들은 조씨들을 누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을 한 뒤, 강화도에 살던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원범(元範)을 왕위에 추대했다. 철종은 종묘에서 조카뻘 되는 헌종에게 절을 하는 꼴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이때가 세조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가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했다. 봉건왕조의 처지에서 볼 때에 이런 처사는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음을 뜻한다. 이때 철종의 나이가 19세였다. 철종의 증조부는 저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아들 다섯을 두고 죽었다. 그 다섯 아들 중 혜경궁 홍씨에게서 난 첫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 아래 세 아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세력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정조를 세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칼을 들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때 세손 반대세력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일이 발각되어 막내아들 은전군(恩全君) 찬은 정조의 명에 의해 자결했고, 은언군(恩彦君) 인과 은신군(恩信君) 진(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 도중 그곳에서 병사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은언군의 후손들은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은언군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또한 음모에 걸려 죽었고, 둘째 아들 당(瑭)과 셋째 아들 광(㼅)이 살아남아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1812년 홍경래의 주도로 관서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이들은 또 한번 역모에 휘말렸다. 곧 서울에 있는 박종일(朴鍾一) · 이진채(李振菜) 일파가 당과 광을 추대하여 변란을 꾸민 것이다. 이때 변란세력들은 형제간에 왕위다툼이 벌어질 것이니 동생 광을 죽여 없애자는 공론을 꾸미기도 했다. 이 광이 바로 철종의 아버지이다. 이 변란이 진행될 때에 철종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일이 발각되어 두 형제는 죽음을 당할 뻔했으나 사촌뻘 되는 순조의 간곡한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뒤 이들 형제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자유민이 되었다. 철종의 아버지인 광은 서울에 돌아와 경행방(慶幸坊)에서 살았다. 왕족으로 여러 번 역모에 걸리기도 하고 귀양살이도 했으니 재산이 남아 있지 않았고, 일정한 생업도 가지지 못했으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몰아쳤다. 1844년(헌종10), 광의 큰아들, 곧 철종의 맏형인 명(明)을 추대하고 헌종을 몰아내려는 민진용(閔晉鏞) 일파의 음모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이때는 광이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였으며, 명의 나이 18세였고 철종의 나이 14세였다.

 

이때 명은 죽음을 당했고 경응(景應, 둘째 아들)과 원범(철종)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고아인 이들 형제는 강화도에서 땔나무를 하며 푸성귀로 연명하며 생활했다. 때로는 강화도의 유력자이며 종친인 이시원(李是遠, 한말 명문장가인 이건창의 할아버지) 같은 인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철종은 여느 초동들과 어울려 지게목발을 두들기며 나무를 했고, 공부를 변변히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노동을 하며 자라 몸은 튼튼했다. 철종의 윗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기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것이다. 조정에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강화도로 들이닥쳐 원범을 모셨다. 원범을 연에 태운 행렬이 이어지자 강화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강화도령’은 왕권을 몰랐을까 강화도에서 5년 동안 자란 철종이 궁중으로 들어오자마자, 안동 김씨 세력은 허겁지겁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순원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겼다. 순원대비는 바로 안동 김씨 문벌정치를 이룩한 김조순의 딸이요, 순조의 왕비이다. 철종이 즉위한 다음 해 3월에 순원대비는 재빨리 자기의 친정 조카뻘인 처녀를 골라 철종의 왕비로 삼았다. 헌종의 왕비인 조씨 세력이 왕비자리를 넘볼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왕비를 책봉한 것이다. 이것으로 철종이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놀음의 첫발을 디딘 꼴이 되었다.

 

무식꾼인 철종은 궁중에서 온갖 법도를 배워야 했다. 일정한 시간에 글을 익혀 왕도를 배워야 했고,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정책을 논해야 했다. 그는 거추장스런 곤룡포 따위의 의관을 걸치고, 걸음걸이는 위엄 있게, 말씨는 왕답게, 눈빛은 빛나게 갖기 위해 쉴 틈 없이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정사를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어느 자리에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어느 고을 수령에 누가 마땅한지 인사정책을 적절히 행사할 수가 없었다. 장인 김문근(金汶根)은 이런 왕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 댔다. 실제 왕권을 행사한 자들은 김문근과 그 일파였다. 그런데 철종은 과연 왕권이 무엇인지 왕위가 어떤 자리인지 몰랐을까? 더욱이 14년이나 왕위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철종이 결코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 예를 들어 보자.

 

1860년대에 들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것을 과거에는 ‘삼남민란’이라고 불렀다. 농민들이 삼정의 문란과 같은 봉건적 굴레를 스스로 벗기 위해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몇몇 세도가의 발호, 수령의 부정이 민란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철종은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을 내려 그 수습책을 각 도에서 건의하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그 윤음 속에는 척족세력 등 몇몇 문벌가와 독점적 권력을 누리는 세도가가 그 지탄의 대상임을 은근한 표현을 빌려서 깔아 놓았다. 비록 승지가 대필했다고 치더라도 당시 조정의 정황으로 보아 이런 표현을 쓰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가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심초사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삼정의 개선책만이 아니라 문벌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강한 문벌세력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마 철종은 세도가의 첩자들이 온 궁중에 득실거리는 사정을 알고 있었고,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정이라는 것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왕비조차 믿을 수 없었을 테니 모든 정사에 싫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비단 이불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까? 만사에 힘겨운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궁녀들의 방으로 향했다. 어여쁜 여자를 끼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여색에 깊이 빠져 몸이 쇠약해졌다. 강화도 자연 속에서 발달한 근육이 궁중에 들어와 제대로 몸도 놀리지 못하고 여색에 깊이 빠졌으니 약질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철종은 여섯 왕자와 공주 중 하나만 남고 몇 살을 못 넘기고 모두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사관들은 철종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4세 때부터 글을 배워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철종이 강화도에 들어가면서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운 기색 한 점 없이 오히려 권솔들을 위로했다고 적고 있다. 문벌정치의 꼭두각시였던 사관들이 철종에 대한 칭송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덮어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는 조상 때부터 위태위태하게 살아왔고, 33세의 짧은 생애 동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자리까지 누렸으면서도 제대로 운신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따라서 비극의 왕, 외로운 왕, 또는 허수아비 왕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여지게 된 것이다. 철종을 이렇게 꼭두각시로 만든 안동 김씨 세력은 끝내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 임금 때 흥선대원군의 철퇴를 맞고 주저앉게 된다. 철종의 등장은 조선왕조를 비치는 해가 석양으로 기울고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나라가 잘되려면 권력이 바른길로 나와야 하는데 철종의 경우는 잘못된 길로 간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 Daum 백과사전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