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건강산책] (2) 고봉누리길: 안곡습지공원의 초여름 풍경, 고양팔현 추만 정지운(鄭之雲) 선생묘 (2019.06.03)

푸레택 2019. 6. 3. 17:26

 

 

 

 

 

 

 

 

 

 

 

 

 

 

 

 

 

 

 

 

● 고봉누리길 걷기: 안곡습지공원, 영천사

 

식사동위시티- 동국대병원- 사단앞- 안곡초등학교- 안곡습지공원- 고봉산갈림길- 영천사- 중산마을 5단지- 일산시장- 일산역

 

● 안곡습지공원

 

고봉산 아래에 위치한 생태공원으로 개발에 밀려 이 일대에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을 때 온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켜낸 습지이다. 원래는 '고봉산습지'로 불렸으며, 입구에는 2003년 택지개발로 베어진 70년생 목련나무로 세워진 솟대가 있다.

 

안곡습지는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한 '산림계획형 천연용출습지'로 물이 맑아 도심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가재, 맹꽁이, 개구리 등이 살아가고 있으며 항상 일정한 수온과 유량으로 한겨울에도 새파란 해캄을 볼 수 있다. 생태학습원, 묵논학습원, 생태보존습지원, 야생초화원이 있다.

 

● 안곡습지공원에 사는 조류들

 

솔부엉이, 소쩍새, 아물쇠딱다구리, 흰뺨검둥오리, 직박구리, 멧비둘기, 곤줄박이,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동고비

 

● 안곡습지공원에 사는 곤충들

 

호랑나비, 암먹부전나비, 늑대거미, 호박벌, 밀잠자리, 남색초원하늘소,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중국청람색잎벌레, 풀꽃꽃무지, 무당벌레

 

●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선생 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경기도 고양 출신. 정인필(鄭寅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김정국(金正國)·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중에 이황(李滉)에게 『심경』·『역학계몽』 등을 배웠다.

 

2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지극한 효심으로 예를 다하였다. 스승 김정국이 죽은 뒤에도 심상(心喪) 3년을 지냈다. 집이 너무 가난해 끼니를 걸러도 개의치 않았으며, 마음이 바르고 악을 매우 미워하는 성격이었다. 일찍이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어도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구명하고, 그 뒤 1553년(명종 8) 이황의 의견을 따라 다시 정정하였다. 먼저 지은 것을 「천명구도(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정정한 것을 「천명신도(天命新圖)」라 해 현재까지 전해 온다. 우리 나라에서 「천명도설」을 시도한 것은 정지운이 처음인 것으로 본다.

 

물론 권근(權近)의 『입학도설(入學圖說)』과 같은 도상학(圖象學)이 있기는 하나 「천명도설」은 정지운의 독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천명도」가 있다고 그 선후를 논하기도 하나, 정지운의 「천명도설」의 구도(舊圖)는 독창적이어서 최초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뒤에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제자인 풍덕군수 안홍(安鴻)의 주선으로 천마산(天磨山)에 유람갔다가 병이 들어, 돌아오는 도중에 승평부(昇平府: 지금의 개풍군 풍덕리)의 강구(江口)에서 죽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정식(鄭軾)·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40년(인조 18)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천명도설(天命圖說)』이 있다.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안국(金安國)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했다. 동몽학(童蒙學)에 학행으로 천거받았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37년(중종 32) 주희(朱憙)의 〈성리대전 性理大全〉에 있는 인물지성을 논하는 설을 취하고 그밖에 여러 설을 참고하여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문답을 더하여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지었다. 두 스승에게 질정을 구했으나 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1553년(명종 8) 이황(李滉)을 만나 그의 의견을 따라 수정했는데, 먼저 지었던 것을 〈천명구도 天命舊圖〉라 하고, 뒤에 수정한 것을 〈천명신도 天命新圖〉라 했다.

 

그는 이 도설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분속(理氣分屬)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는데, 처음에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고 했다가 이황의 수정을 받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뒤에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칠논변(四七論辯)을 불러일으킨 발단이 되었다. 1561년 천마산(天磨山)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승천부(昇天府)에서 죽었다. 제자로는 정지림(鄭之霖)·정식(鄭軾)·김은휘(金殷輝) 등이 있다.

 

저서로는 1640년(인조 18) 간행된 〈천명도설〉 1권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지운 선생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이다. 1986년 6월 16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묘는 일산동 중산(中山) 마을 고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配) 정부인(貞夫人) 충주 안씨(忠州 安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모두 3기(基)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을 각각 설치했다.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秋巒居士鄭之雲之墓)’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李滉)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57cm, 폭 61cm, 두께 32cm이다. 1981년 2월에 건립한 2기의 묘비는 대리석 비신에 화강암 이수를 갖추었다.

 

정지운은 조선시대 중기 고양이 않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고양 8현 중의 한사람이다. 중종 4년(1509)에 출생하여 명종 6년(1561)에 돌아갔다. 자는 정이(靜而)며 호는 추만(秋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서 인필(仁弼)의 아들이다.

 

일찍이 모재(募齋) 김안국(金安國)과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써 성리학을 깊게연구하였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조화의 이치를 규명한 뒤에 한성에서 퇴계를 만나 수정을 받았다. 이것은 훗날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된 중요한 학설인데 이 천명도설의 진본(眞本)은 일본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마이크로 필름화한 것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만은 주희의 성리론을 한층 심화시켜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다.’고 주장하며 사단은 리에 그리고 칠정은 기에 배분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Daum 백과 사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