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화본역(花本驛) 박해수, 참숯 정양, 살구꽃 피는 마을 이호우 (2019.05.24)

푸레택 2019. 5. 24. 07:54

 

 

 

 

 

 

 

 

 

 

 

 

● 화본역(花本驛) / 박해수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앉은 자리 꽃 진 자리 꽃자리

선 자리 꽃자리 꽃 뿌리 눈물 뿌리

방울새 어디 가서 우나

배꽃, 메밀꽃, 메꽃

배꼽 눈 보이네, 배꼽도 있네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

흰 겨울 눈꽃에 젖네

어머니 젖꽃 어머니 젖꽃

젖꽃 실뿌리, 실, 실, 실, 웃는 실뿌리

오솔길, 저녁 낮달로 떴네

어머니 삶 꽃, 젖빛으로 뜬 낮달

산모롱 굽이굽이 돌아

오솔길 따라 꽃 진 길 가네

산모롱 굽이굽이 돌아

돌아누운 낮달 따라 가네

낮달 따라 꽃 따라 가네

 

● 참숯 / 정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만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 살구꽃 피는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려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화본역, 그리운 어머니

 

어릴 적 떠나온 고향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고향.

밤새워 달린 완행열차

새벽녘 화본역에서 내려

풀잎 이슬에 바짓가랑이 적셔가며

찾아가던 외갓집, 어머니 고향.

외삼촌과 이모님댁 찾아 순례했던 길.

 

군위군 효령면 화계리 홍골 증조할머니,

울퉁불퉁 버스길 저수지 너머 신령 외삼촌댁

팔공산 자락 대율(大栗) 한밤마을 큰 이모님댁

부계면 구방동엔 누에 키우시던 작은 이모님댁.

어머니와 함께 찾아가면

택이 왔나? 하시며 반가이 맞아 주시던 외삼촌.

하룻밤 자고 갈거면 다음엔 오지 마라 하시며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마냥 섭섭해 하시던 이모님

 

이제는 모두 먼길 떠나가시고

꿈길에서나 찾아가야 하는 외갓집.

따뜻한 정 듬뿍 가슴에 안고 살아가던 그 시절이

외삼촌, 이모님 아니 어머니 살아계시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몹시 그립다

 

십여 년 전, 다시 찾은 화본역엔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어머니 삶 꽃, 젖빛으로 뜬 낮달

산모롱 굽이굽이 돌아

오솔길 따라 꽃 진 길 가네'

박해수 시인이 쓴 시비(詩碑)가 반겨주고

급수탑 여전히 제자리 지켜주어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