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 5가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東大門)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少年)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俗離山),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두만강 / 김규동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 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 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 보련다.
● 4월의 가로수 / 김광규
머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토르소: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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