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종로 5가 신동엽,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두만강 김규동, 4월의 가로수 김광규 (2019.05.23)

푸레택 2019. 5. 23. 19:02

 

 

 

 

 

 

● 종로 5가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東大門)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少年)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俗離山),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두만강 / 김규동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 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 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 보련다.

 

● 4월의 가로수 / 김광규

 

머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토르소: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