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북동 역사 문화 탐방 골목길 산책
* 2019.05.02(목) 10~15시
* 천왕님, 대장님, 성춘샘, 호헌샘, 택 5人
* 탐방 일정
1 한성대입구역(4호선) 6번 출구 am 10:00
2 혜화문 / 한중 평화의 소녀상 ☆
3 마을버스 2번
4 길상사 ☆
5 천주교성북동성당 ☆
6 선잠단지(공사중)
7 성북선잠박물관 ☆
8 최순우 옛집(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1호) ☆
9 간송미술관(전형필) ☆
10 마을버스 3번
11 북정마을 / 비둘기공원(김광섭) ☆
12 심우장(만해 한용운) ☆
13 성북누룽지백숙 수제비(점심) pm 1:00
14 이태준 수연산방 ☆
15 서울성곽(한양도성)
16 서울과학고 / 보성(普成)옛터 (나의 母校)
17 장면 가옥 ☆
18 혜화동주민센터
19 혜화역(4호선) pm 3:30
20 집으로 Go home~!
●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의 추억(追憶)
중학생 시절,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뒷동산이고 뒷동네였다. 쌍다리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땐 하천에 물이 콸콸 흘렀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울창한 숲 커다란 돌틈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다다른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면 그곳은 흔적도 없다.
짙푸른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서울 성곽 아래쪽 산꼭대기 북정마을 산동네에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친구의 집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할머니처럼 늙으신 친구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밥을 해 주시곤 했는데 어찌 그리도 밥이 맛있던지.. 그 시절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곳 무릉도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때묻지 않은 그 때 그곳이,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 오늘 신현 5人 모임의 <성북동 역사문화탐방> 후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옮겨와 싣는다.
● 성북동(城北洞) 골목길을 거닐며
또다시 신록의 계절 5월이 돌아왔다. 오늘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와서 먼저 혜화문(惠化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 성곽 아래쪽 길을 걸으면 경신고등학교 뒷담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최순우 옛집이 나타난다. 길을 건너면 선잠단지(先蠶壇址)*가 보인다. 성북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천주교 성북동 성당이 나그네를 맞이해 준다. 계속 길을 따라 걸으니 그 유명한 길상사(吉祥寺)*가 보인다. 오색찬란한 연등이 온 절을 뒤덮고 있다.
백석(白石)과 김영한(金英韓)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아름다운 길상사를 뒤로 하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거처하셨던 심우장(尋牛莊)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고교 시절 암송하던 <님의 침묵>을 중얼거려 보며 선인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심우장을 둘러본 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와서 조금 더 걸어가면 소설가 이태준이 거주했던 수연산방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간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린 시절 성북초등학교 옆 숲속에서 친구들과 도토리도 줍고 뛰놀기도 했었는데 그 아름드리 나무 빽빽하고 석탑이 서 있던 그곳이 간송미술관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신 분은 그 유명하신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다. 그분은 나의 모교 보성중, 보성고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간송미술관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해례본)을 보았다고 자랑하셨다. 몇 년 전엔 고교 동문들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간송 특별전'을 관람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3월 말까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코콜랙숀'을 개최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보성고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을 뒤로 하고 유년 시절 뛰놀던 혜화동과 명륜동 그리고 성북동에 접해 있는 서울 성곽길을 걸어 보았다. 혜화동 1번지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는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빠알간 벽돌 건물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는 이제 그곳에 없다. 서울과학고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천년바위'(千載岩)에 올라가서 놀곤 했는데 그 바위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잡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씨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며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개인적으로는좋아하지 않지만당시 정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성리학자)이 쓴 글씨라고 한다.
수 년 전 서울과학고에서 과학 실험 연수를 받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년바위'를 바라보며 철없던 중학교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옛 보성고 자리인 올립픽기념 국민생활관 근처엔 '송시열 집터'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전국 불교인과 학생들의 3.1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한 기념터 안내판도 보인다.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간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우선 먼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녹음 짙어가는 5월, 역사와 문화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거닐며 앞서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겨본 오늘 하루는 더없이 뜻깊고 멋진 날이었다. / 김영택 (2019.04.01)
* 몇 년 전 성북동 길상사와 심우장을 둘러보면서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 이 글은 그 때 사진과 함께 써서 올린 글을 다시 다듬고 내용을 더 추가 혼합하여 새롭게 작성한 것이다.
● 서울 혜화문(惠化門)
서울 종로구의 혜화로터리에서 동소문로(東小門路)를 따라 낮은 언덕을 오른다. 그런데 도로 이름대로라면 이 길 어딘가에 있어야 할 듯한 동소문이 선뜻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 대신 망루처럼 높은 축대 위에 떡하니 서 있는 커다란 건축물 하나가 보인다. 그 이름은 혜화문(惠化門). 1994년에 다시 만든 동소문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혜화문은 서글픈 역사를 지녔다. 이 성문이 처음 지어진 1397년에 붙은 첫 이름은 홍화문(弘化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석성(石城)의 통행문으로, 4대문(大門) 중 북쪽 문(숙청문·肅淸門, 나중에 숙정문으로 개칭)과 동쪽 문(흥인문·興仁門) 사이에 낸 4소문(小門) 중 하나였다. 그래서 동소문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1483년 창건된 창경궁의 동문 이름이 홍화문으로 정해지면서, '설움'이 시작됐다. 창경궁의 문에 왜 이미 있던 성문의 이름을 갖다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같은 이름의 두 문이 공존하며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30년 가까이 지난 1511년, 동소문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의 '혜화'란 새 이름을 가지게 됐다. 풍수지리에 의해 정북문(숙청문)이 사실상 거의 폐쇄되다시피 한 관계로 혜화문은 한양에서 의정부와 포천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 구실을 했다. 당시 문을 지키던 병사의 수도 대문급의 병력인 30명이나 됐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인 고난이 닥쳐왔다. 경성부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총독부가 새 도로를 내면서 혜화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 다행히 반세기가 지난 뒤 성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복원됐지만, 그 위치도 다르고 편액의 글씨 등 작은 오류들도 있어 혜화문의 설움은 끝이 없는 듯하다. 게다가 과거의 흔적이 어디에도 섞이지 않아 '연륜'도 느껴지지 않는데, 성문마저 늘 굳게 닫혀 있다. 자고로 다리는 건너봐야 알고, 문은 지나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을.
한 바퀴를 빙 돌아, 끊어진 성벽 옆에 작게 만든 계단을 겨우 찾아 올라간다. 그리고 성벽 위를 따라 혜화문 안쪽에 다다랐다. 안쪽 닫힌 성문 위로 홍예개판(虹霓蓋板·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의 상부에 덮는 판자)에 그려진 봉황이 보인다. 보통 성문에는 용 그림이 많은데 혜화문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옛날 혜화문 밖으로는 넓은 분지와 함께 오래된 소나무 숲이 가득했고, 도화동이라 불릴 정도로 복숭아나무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새들이 많아 농사에 피해가 커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서울의 옛 풍경들이다. 문득 이 문을 열고 나가 지금의 삼선동 일대에 드넓게 펼쳐진 솔숲을 걷는 상상을 해본다. 짙은 녹음의 서울, 그리고 복숭아 향기. 이내 그 꿈같은 풍경이 굳게 닫힌 문과 그 틈 사이로 비치는 회색빛 아파트 숲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때 이른 무더위 속 서울에서는 성문 너머 도시의 아우성만이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Daum 뉴스 발췌)
● 평화 소녀상의 상징과 의미
*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 :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된 것을 상징한다.
* 꽉 쥔 주먹 :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빈 의자
- 과거: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들의 빈자리이다.
- 현재: 지금 내가 같이 앉아 위로하고 공감하는 자리이다. 성북동 평화의 소녀상 빈자리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위안부소녀상의 자리이기도 하다.
- 미래: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를 잊지 않고자 맹세하며 앉을 자리이다.
* 어깨에 앉은 새 :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지금의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이다.
*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 :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다 풀지 못한 가슴앓이와 한(恨)이다.* 그림자 속의 하얀 나비 :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라는 염원이며 영혼의 환생이다.
* 맨발과 발꿈치가 들려 있는 모습 :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발을 빼앗 긴 모습이자,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음 편하게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2011년 12월 14일 1000회가 되는 수요시위를 기념하여 평화의 비를 기획하고 작가 김서경·김운성에게 의뢰하였다. 최종적으로 소녀상 형태의 조각상이 만들어졌으며,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소녀는 불규칙하게 잘라진 단발머리로 의자 위에 손을 꼭 쥔 채 발꿈치를 살짝 든 맨발로 앉아 있다.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새가 앉아 있고 소녀상이 있는 바닥에는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가 있다. 소녀상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다.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 새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소녀상 옆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 피해자를 위한 자리다. 빈 의자에는 일반인이 앉을 수도 있다. 아픈 과거, 문제를 해결해야 할 현재, 함께 평화를 지향하는 미래 등의 상징을 담아 형상화한 것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 명예와 인권회복, 그리고 평화 지향의 마음을 담았다.
평화의 소녀상은 첫 제작 이후 국내외 여러 군데에 세워졌는데, 형상이 동일하지는 않다. 서있는 모습도 있고, 서울 성북동의 ‘한중 평화의 소녀상’처럼 중국인 소녀와 조선인 소녀가 함께 있는 것도 있다. 또 군'위안부' 피해자를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도 있는데, 예컨대 나눔의 집에 설치된 소녀상 <못다 핀 꽃>은 군‘위안부’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을 기초로 피해자를 형상화한 첫 작품이다. 이외 여러 작가들에 의해 기념비가 만들어졌고,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 그리고 워싱턴의 비처럼 국외에도 세워져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의미를 세계인에게 알리고 있다. (Daum 백과 발췌)
/ 2019.05.02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