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골목걷기] (2) 성북동 역사 문화 탐방 골목길 산책 : 길상사 (2019.05.02)

푸레택 2019. 5. 2. 22:35

 

 

 

 

 

 

 

 

 

 

 

 

 

 

 

 

 

 

 

 

● 성북동 역사 문화 탐방 골목길 산책

* 2019.05.02(목) 10~15시

* 천왕님, 대장님, 성춘샘, 호헌샘, 택 5人

* 탐방 일정

1 한성대입구역(4호선) 6번 출구 am 10:00

2 혜화문 / 한중 평화의 소녀상 ☆

3 마을버스 2번

4 길상사 ☆

5 천주교성북동성당 ☆

6 선잠단지(공사중)

7 성북선잠박물관 ☆

8 최순우 옛집(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1호) ☆

9 간송미술관(전형필) ☆

10 마을버스 3번

11 북정마을 / 비둘기공원(김광섭) ☆

12 심우장(만해 한용운) ☆

13 성북누룽지백숙 수제비(점심) pm 1:00

14 이태준 수연산방 ☆

15 서울성곽(한양도성)

16 서울과학고 / 보성(普成)옛터 (나의 母校)

17 장면 가옥 ☆

18 혜화동주민센터

19 혜화역(4호선) pm 3:30

20 집으로 Go home~!

 

●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의 추억(追憶)

 

중학생 시절,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뒷동산이고 뒷동네였다. 쌍다리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땐 하천에 물이 콸콸 흘렀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울창한 숲 커다란 돌틈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다다른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면 그곳은 흔적도 없다.

 

짙푸른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서울 성곽 아래쪽 산꼭대기 북정마을 근처 산동네에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친구의 집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할머니처럼 늙으신 친구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밥을 해 주시곤 했는데 어찌 그리도 밥이 맛있던지.. 그 시절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곳 무릉도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때묻지 않은 그 때 그곳이,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 길상사(吉祥寺)

 

길상사(吉祥寺)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또한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이다.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건립년대 1997년, 창건자 법정 김영한,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번지)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 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Daum 백과 발췌)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오막살이

 

● 고향(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氏) 아느냐 한즉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막역지간(莫逆之間): 거스름이 없는 사이라는 뜻으로, 허물이 없이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

 

●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에게 / 안도현

 

나타샤, 노란 은행잎이 마치 눈처럼 내리는 늦가을입니다. 은행잎들이 사라질 때쯤이면 그 자리에 또 눈이 내려 쌓이는 겨울이 오겠지요. 나는 나타샤, 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이름 뒤쪽으로 왠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고, 눈부신 허벅지의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을 것 같고, 당신이 홀연 나타날 것만 같아서 숨이 막힌답니다.

 

백석의 시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백석이라는 사내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도 백석처럼 가난했으나 내게는 아름다운 나타샤도 흰 당나귀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백석이 되어 보려고 혼자 쓸쓸히 앉아 눈 내리는 북방을 생각하며 밤새워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몇 날 며칠 술을 마셔대도 나타샤 당신은 오지 않더군요.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건 당신이 아름답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한 시인이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그려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은 흰 눈을 닮았을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거나 가까이 가슴에 품으면 금세 녹아 없어지는, 눈물이 되어 녹아버리는 당신은 혹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나타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백석은 당신한테 대체 어떤 사내였나요? 그는 일본 유학파에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이목구비가 준수한 모던보이였지요. 고향에서 세 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집을 뛰쳐나와 뭇 여인들을 안고 싶어하던 바람둥이기도 했구요. 그의 어떤 점이 당신을 홀리게 하던가요?

 

모르긴 몰라도 백석은 우유부단한 성품에 참으로 이기적인 사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여자 저 여자 다 찝쩍거리면서 서울로 함흥으로 만주로 떠도는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과 짧고도 뜨거운 연애를 했던 자야 여사는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직접 받았다 했고, 1938년 당시 '삼천리' 잡지 기자였던 소설가 최정희 선생은 백석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이 시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영 처녀 박경련과의 러브스토리도 공개된 적이 있지요. 과연 이 중에서 나타샤가 누구일까 하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지요.

 

나타샤,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는 그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여인들에게 이 시를 건네주며 사랑의 무기로 활용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이 시에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는 겁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 어쩌고저쩌고 하는 유행가풍의 사랑법을 일거에 격파하는 솜씨가 멋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

 

누군들 이런 목소리에 빨려들지 않겠는지요. 나타샤, 내 말을 서운하게 듣지 마십시오. 어쩌면 백석에게는 나타샤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많은 여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나타샤는 없는 게 아닐까요? 없기 때문에 또 모든 남자들은 나타샤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요?

 

●『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子夜 여사의 회고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의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의 히라다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 《당시(唐詩) 선집》 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 《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은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리 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의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 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소...'라는 식의 하루의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보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의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 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간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 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이 글은 이동순李東洵 시인이 자야 여사를 세 차례 방문하고 나서 그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쓴 백석에 관한 회고담 중의 일부분이다. 백석의 꾸밈없는 인간적 품성과 자상하고 섬세한 마음씨, 30년대 문우들과의 교우기 등과 함께 반백년을 넘어서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야 여사의 백석에 대한 끊이지 않는 그리움이 담긴 글이다.)

 

●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그깟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 합니다."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준 백석, 그를 죽도록 사랑한 김영한, 둘은 지고지순(至高至純) 사랑을 하게 된다. 기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백석 집안의 반대로 둘이 같이 산 기간이 3년뿐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김영한이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지금까지 이승에서 계속되고 있을 듯하다. 김영한의 백석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대원각의 시주(施主)이다. 1985년 시가 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기로 결심한 김영한은 10년 간 무소유의 저자 법정(法頂) 스님을 설득하여 관철시켰고, 2년 후인 1997년 대원각은 길상사(吉祥寺)라는 절로 탈바꿈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시주한 천억이 아깝지 않으냐고 질문을 하자 김영한은 한 마디로 명쾌한 답변을 한다.

"그깟 천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 합니다."

김영한의 백석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