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 군중

푸레택 2022. 9. 2. 20:07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군중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군중

"증가하지 않는 군중이란 단식 상태에 있는 것"2008년 6월 10일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꽉 메운 칠십만 인파가 켜든 촛불은 빛으로 일렁이는 장대하고 거룩한 꽃밭이었다. 촛불은 제 몸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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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하지 않는 군중이란 단식 상태에 있는 것"

2008년 6월 10일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꽉 메운 칠십만 인파가 켜든 촛불은 빛으로 일렁이는 장대하고 거룩한 꽃밭이었다. 촛불은 제 몸을 살라 어둠을 밝힌다. 제 몸을 사른다는 점에서 숭고한 자기희생의 표상으로 맞춤하다.

만해 한용운은 시 '알 수 없어요'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고 노래한다.

촛불은 누군가의 밤을 지키기 위해서 타오르는 나의 가슴이다. 손에 손마다 든 저 촛불들은 나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과 민족을 위해서 타오르는 저마다 뜨거운 가슴이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타오르는 불꽃이요, 우리 안에 숨은 이타적 숭고함을 일깨우는 불꽃이다. 아울러 우리 안의 진리와 정의의 빛이다. 저 일렁이는 촛불들은 저마다 꽃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나아가는 빛의 파동이자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황홀한 군무(群舞)였다.

나는 카메라가 비추는 공중에서 찍은 군중의 모습을 보며 고려가요에 나오는 "이월 보름에, 아으, 높이 켠 등불 같아라. 만인 비취실 모습이시도다."(동동)는 구절과 함께 무수한 별들로 집합체인 은하수를 떠올렸다. 저 촛불들은 모세가 사막 위에 세운 장막 안에 금 촛대를 꽂고 밝힌 불과도 겹쳐진다. 일곱 개의 가지로 뻗은 그 촛대에는 촛불이 타오른다. 일곱 개의 촛대 한가운데 있는 촛대는 은하계를 거느리고 빛나는 태양이다. 그 불꽃들은 저마다 '신의 눈'이고 어둠을 밝히는 '세계의 빛'이다.

◇칠십만 인파가 켜든 촛불은 빛으로 일렁이는 장대하고 거룩한 꽃밭이었다.

무엇이 저 '군중'을 광장으로 불러 모았을까. '민의'라고도 하고, '배후 세력의 불순한 선동'이라고도 하고, '디지털 포퓰리즘'이라고 했는데, 이 해석들은 촛불이 밝히려는 깊은 데를 보지 못하고 표피만을 보는 것이다. 촛불들의 '배후'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좌파도 아니요, 정권에 저항하는 집단도 아니다. 꼭 집어 말하자면 실시간으로 쌍방향 소통을 하며 움직이는 '아고라'와 가상공간에 둥지를 튼 수많은 '블로그'들이다. 형태도 없고 조직도 없고 숫자도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순식간에 바람을 일으키고 폭풍을 일으키며 토네이도로 발전한다. 그 '아고라'에 맞서 이 정부는 광화문 한복판에 컨테이너 철벽을 쌓았다. 늦어도 한참은 더 늦은, 막혀도 한참은 꽉 막힌 저 산업화세대의 무뚝뚝한 발상이라니!

군중은 모이고 흩어지며, 움직이고 멈추며, 커지고 줄어들며, 성장하고 쇠퇴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군중은 제 안의 파괴욕, 무차별적인 파괴로 제 존재를 과시한다. 성난 군중이 지나간 뒤에 집과 건물이 부서지고 난 뒤의 잔해를 목격하는 일은 흔하다. 그들은 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벽을 허문다. 문·유리창·벽으로 된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렇게 개별자를 고립시키고 폐쇄시켰던 경계를 지워냄으로써 군중은 스스로 경계를 넘어섰다는 안도감과 함께 만족감을 얻는다. 군중이 파괴의 수단으로 쓰는 도구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불이다. 불길은 사방으로 퍼지고 여러 불길이 합쳐지며 더 많은 것들을 파괴해버린다. 불은 군중을 은유하는 가장 강력한 기표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뒤 불이 소멸하듯 군중 역시 제 내부의 파괴성의 방출한 뒤에는 소멸한다.

그렇다면 군중은 병리현상인가? 아니면 희망의 실마리인가? 1980년 서울의 봄이나 1997년 6월 항쟁 때 시청 광장을 메운 시민들,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거리응원에 나선 수백만 명의 군중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처음에 몇십 명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삽시간에 수천 명, 수만 명, 수십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때 우리는 군중이 가진 자기증식의 본성을 보았다. 뛰어난 소설가이자 사회학자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증가하지 않는 군중이란 단식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군중의 원형은 '무리'다. 카네티는 부족·혈족·씨족이라는 기왕의 사회적인 개념을 '무리'로 대체하고, 이것을 사냥의 무리, 전투의 무리, 애도의 무리, 증식의 무리로 나누며, 그 본질과 뜻을 규명한다.

군중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군중은 사람 내면의 무의식에 숨은 정신이 특수한 상태에서 집중화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군중은 그것이 나타나는 발현의 위계에서 스스로 이미지의 볼모가 된다. 군중 상징의 볼모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개별적 존재가 갖는 분별력과 이성의 통제력, 자유의지, 도덕성 들을 더는 발휘하지 못한다. 홀로 서 있는 사람과 군중의 일원이 되어버린 개별자는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군중에 휩쓸리면 저 자신을 개별적 존재로 서게 했던 개성, 교육, 사회적 배경, 혈통과 언어들이 평준화하며 타자와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군중은 개별 존재들 사이의 차이들을 없애 균질화하는 내부적 압박 아래에서 더 이상 개별자이기를 포기하고 군중으로 내면 형질을 바꾸는 것이다.

찰스 맥케이의 '대중의 비정상적인 현혹과 군중의 광기'나 르 봉의 '군중'이나 '혁명의 심리학'이 군중의 부정적인 힘, 그 병리학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은 군중 상징의 원형을 고대 종교와 다양한 신화에서 찾는다. 먼저 카네티는 곡식·숲·비·바람·모래·불·바다에서 군중이라는 집합적 단위를 드러내는 '군중 상징'을 읽어낸다. 우선 불은 번지며 전염성이 강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 파괴적인 불은 살아 있는 듯이 활동하며 넓게 퍼지는 속성이 있다. 이는 군중의 속성과 정확하게 겹쳐진다. 군중은 강력한 전염성을 갖고 넓게 퍼져나간다. 불이 그렇듯이 무서운 기세로 먹잇감을 삼켜버린다. 군중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생겨나는데, 그 생성의 자발성과 급작스러움이 불의 속성과 일치한다.

비 역시 군중 상징에 들지만 불과는 다르다. 자기증식성이 미약하고 일관성이 없다. 비는 해방되는 군중이며, 해체되는 군중이다. 그에 반해 강은 허영에 사로잡힌 군중이다. 강은 작은 여울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성, 강기슭의 사람에게 자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기 현시(顯示)로 군중의 은유를 완성한다. "강은 이를테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피부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강과 같은 형태, 예컨대 행렬이나 시위행진은 가능한 한 자기의 모습이 밖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대열을 늘여서 가능한 한 많은 구경꾼에게 자신을 보이려고 한다." 숲은 나무의 참된 밀집성 속에서 저를 드러낸다.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의 부동성(不動性)은 어떤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는 군중의 속성을 드러낸다.

반면에 곡식은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태풍이 지나고 난 뒤 곡식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일어선다. 김수영이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고 노래한 풀은 바람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도 다시 저를 일으켜 세우는 군중의 은유이다. 바람 자체가 군중의 상징이다.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모래는 어떤가. 모래는 개체이면서 언제나 큰 덩어리로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제 존재를 드러낸다. 모래는 출렁이는 파도가 되고 회오리바람이 불 때면 구름으로 변신한다. 아울러 언덕이 되고 산이 되기도 한다. 모래는 운동성과 변신 능력 때문에 유동성 상징과 견고성 상징의 중간에 위치한다.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의 공허와 적의, 그리고 불모성은 군중의 무의식적 속성의 또 다른 측면이다.

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05.18


/ 2022.09.0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