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 사랑

푸레택 2022. 9. 2. 14:23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 사랑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 사랑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기 전보다 더 자주 거울을 보고얼굴을 정성들여 꾸민다얼굴은 자아가 출현하는 장소다'사랑'이라고 인식하는 실체는 실은 이미 흘러간 사랑이다사랑이 지나간 뒤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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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사람들은 사랑에 죽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에 떠도는 거의 모든 유행가요들은 사랑을 노래한다.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남성보컬 2AM의 노래, '죽어도 못 보내')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사랑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사랑은 자가당착이고 정신착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분명하다. 어느 날 사랑은 존재의 어눌함 속에서 피어오른다.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고, 몸통을 돌아 입에서 나아간다. 사랑이 올 때는 항상 어떤 알리바이를 갖고 온다.

수천수만의 사랑 중에서 알리바이가 없는 사랑은 단 하나도 없다. 누군가에게 '홀딱 빠지는' 것에는 그만한 알리바이가 있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의 우아함과 성격을, 혹은 당신의 교양과 미소를?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 존재 자체, 그 있음을? 그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 뭔지를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만, 사랑 안에 있는 나는, 그것의 실존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한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왜 그럴까? 타자는 늘 도망가는 사람이고, 고정되지 않은 채 변화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눈은 초롱초롱하고, 목소리는 달콤하고, 미소는 환상적이다. 그는 늘 늠름하고 관대하며 멋지다. 그렇다면 그의 눈과 목소리와 미소와 늠름함과 관대함과 멋짐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라는 타자지만, '그'가 곧 사랑의 표적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의 표적은 타자라는 수수께끼이다. 즉 타자가 느끼게 하는 거리감, 그것의 익명성, 가장 친밀한 순간에조차 나와 대등하게 되지 않는 타자의 태도"(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이다. '그'와 '그라는 수수께끼' 사이의 거리 때문에 혼동이 생긴다. 사랑이 혼동의 열정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은 경미한 뇌진탕 같은 것이어서 그것에 빠지면 그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 사물의 초점이 흐려지고 의식은 몽롱해진다.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한꺼번에 의미화한다. "그는 도처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항상 의미를 만들어내며, 이 의미가 그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의미의 도가니 안에 있다."(롤랑 바르트) 사랑에 빠진 사람이 무심코 듣던 유행가 가사에 쉽게 몰입하고 그것과 자기동일시를 하며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기 전보다 더 자주 거울을 보고 얼굴을 정성들여 꾸민다.

얼굴이 뭐기에? 얼굴은 자아가 출현하는 장소다. 얼굴은 타자성의 징표, 내게는 없는 바로 그것, 타자가 제 존재를 가두고 집약하는 표면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에 사로잡힌다는 뜻이다. 그와 떨어져서 눈을 감으면 먼저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얼굴은 붙잡을 수 없다. 그 얼굴은 항상 어딘가로 달아난다. 그것은 절대적인 미의 구현이거나 숭고함의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나의 수중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받는 얼굴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도망가기 때문이다. 손에 넣을 수 없는 모든 것은 바로 그 가질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머금고 숭고해진다. 사랑받는 얼굴은 자기 안에서 생성과 해체를 반복한다. 그것이 하나로 고착되어 있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열애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열애에 빠뜨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빠져 괴로워할 때 우리는 연민을 느낀다. 아마도 함께 걱정을 하며 그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어쩌면 그에게 괴로움을 준 그 불행에 자신을 던져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에 빠진 그를 돕는 나의 손길은 불충분하다. 그런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는 "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그는 내게 걱정거리를 준다), 불충분한 어머니이다"라고 말한다. 연인이 불행에 빠졌는데, 나는 그를 도울 수가 없다. 그래서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차갑게 바라보자면, 나와는 무관한 일로 괴로워하는 그는, 사실은 그 불행과 그것이 초래한 괴로움으로 내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성립되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것"(롤랑 바르트)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나와 무관하게 불행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그가 나를 사랑에서 소외시킨 것이니 나쁜 것은 바로 그이다.

우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오직 한 가지. 그 열정의 표적은 당연히 연인이다. 그 열정은 표적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 할 때 그 당신은 저 멀리 있는 존재다. 당신과 나는 동시대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 있는 동안에도 결코 함께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어루만질 때조차 당신은 거기에 없다. 모든 애무는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쓰다듬는 행위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애무가 늘 미래인 것과의 놀이고, 내용 없는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뜻에서다. 그게 사랑의 역설이다.

아울러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늘 소실점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못한다. 모든 사랑은 끝을 향하여 나아간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면서 환상이 하찮은 현실로 바뀌듯 사랑의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랑의 끝이라는 현실이 우리 앞에 당도한다. "사랑은 하찮은 것들로 구성된 귀중한 짓이다. 혹은, 귀중하다고 하는 기표들로 구성된 하찮은 기의다. 고쳐 말하자면, 사랑이란 하찮은 것들이 순간증폭하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정을 키웠던 그 '순간증폭'이 끝나고, 우리가 정녕 하찮은 것을 하찮게 대할 수 있는 날들이 오게 되면 사랑의 오랜 영욕(榮辱)도 마침내 그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우리 마음은 사랑의 '순간증폭'이 끝난 뒤에도 헛되이 그 끝을 유예시킨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인식하는 실체는 실은 이미 흘러간 사랑이다. 사랑이 지나간 뒤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흘러간 사랑은 현재의 사랑이 아니라 과거의 사랑이다. 많은 연인들은 과거의 사랑을 현재의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붙들 따름이다.

사랑은 무쇠 그릇이 아니라 유리그릇이다. 너무 연해서 깨지기 쉽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깊으면 상처도 깊어진다. 그래서 사랑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라. 사랑은 빛, 기쁨, 오아시스, 미래에 관한 약속이다. 하찮은 것에서 시작한 사랑도 사랑하지 않음보다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더 많이 살게 만든다. 그러니 살아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함 속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를 환대하고 거꾸로 환대받는다. 한계와 도착(倒錯)을 넘어서서 서로를 환대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다.

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05.04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1

● 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 마음산책, 2004
● 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옮김, 동문선, 1998
● 앙드레 기고, '사랑의 철학', 김병욱 옮김, 개마고원, 2008

/ 2022.09.0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