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 채식주의와 차가운 악(惡)

푸레택 2022. 9. 2. 14:20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 채식주의와 차가운 악(惡)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 채식주의와 차가운 악(惡)

한국서 소수자인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은..어느 때부터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떠돌았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이다. 우리 삶이 위험 사회 속에서 방치되고 있는 걸 보면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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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소수자인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어느 때부터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떠돌았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이다. 우리 삶이 위험 사회 속에서 방치되고 있는 걸 보면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그 인문학이 다시 살아나 돌아오고 있다는 징후들이 위기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가 그 뿌리이다.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기초 소양의 보고(寶庫)인 문학·역사·철학을 하나로 아우르는 말이다. 인문학의 가장 큰 미덕은 창의성·통찰력·소통의 힘을 키워준다는 점이다. 세계가 혼란스럽고 나아가야 할 길이 불확실할 때 우리는 인문학에 나아갈 길을 물어야 한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시인 장석주가 인문학이 어떻게 우리 사유에 개입하고 삶에서 작동하는지를,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드높이고, 삶을 메마름에서 구해내 윤택하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지금부터 그와 함께 인문학 산책을 떠나보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지(四肢)와 내부 장기들로 이루어진 몸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힘줄, 혈액, 세포 등을 포함한 육체 상태가 전제되지 않고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몸으로써 비와 바람에 맞서고, 제 생명을 노리는 타인과 동물들, 혹은 질병에 맞서 싸워야 한다. 실로 산다는 것의 본질은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몸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물리적 접면이고, 외부를 향하여 나아가는 생명과 그 경향 일체를 떠안고 있는 가시적 실체다.

몸은 필연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물은 몸과 생명을 위한 에너지의 원료들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것이다. 먹기 위해 고른 음식은 우리의 취향과 가치와 믿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 음식물을 섭취할 때 '나'와 음식물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음식물과 주체 사이에 직접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무엇을 먹는가는 "문화가 생물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드러내고, "문화가 섭취하는 생물들의 유형, 생물들이 준비되고 주문되는 방식은 고도로 조직화된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다. 롤랑 바르트는 음식을 먹는 것이 "의사소통 체계이고, 이미지의 구현체이며 관례와 상황과 행동의 시발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는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잘 먹는다는 것은 건강을 담보하는 행위이며, 무엇보다도 건강은 번식지향적 존재인 사람에게 우월한 경쟁 지위를 얻는 관건이다.

한 출판사의 편집부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나섰다가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채식주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채식주의가 그날의 화제로 올랐다.

스님이나 수행자들 중에 채식을 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요즘 들어 간간이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채식주의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확실히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로 살려고 한다. 그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며 '나는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만일 당신이 달걀과 우유마저 거부하는 절대적 채식주의자라면 당신은 육식문화 일변도인 한국에서 끼니때마다 크나큰 곤란에 빠질 것이다.


채식주의는 추상적으로는 육식주의의 아래에 일렁이는 탐욕적이고 무차별적인 삶에 대한 저항이고, 구체적으로는 "고기와 시체와 살육과 식욕과 포식에의 열망"에 뿌리를 박고 있는 육식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은 육식주의의 이면이 "불꽃처럼 팽배한 생활의 의지, 동시에 금욕에 대한 낯섦과 지독한 거부감"이라고 말한다. 저 탐욕스런 생활에의 의지가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압도해버리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채식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인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자가 어떤 곤경에 빠지는가를 냉정하게 묘사한다.

작중화자의 아내는 어느 날부터 일체의 육식을 거부한다. 아내는 냉장고 속에 들어 있던 "샤브샤브용 쇠고기와 돼지고기 삼겹살, 커다란 우족 두 짝, 위생팩에 담긴 오징어들, 시골의 장모가 얼마 전에 보낸 잘 손질된 장어, 노란 노끈에 엮인 굴비들, 포장을 뜯지 않은 냉동만두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꾸러미들"을 꺼내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린다.

아내는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못 견딘다. 그 칼질하는 행위가 나 아닌 다른 어떤 생명체를 죽이고 포식하기 위한 행위인 까닭이다. 아내는 도마에 칼질하는 행위에 대해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 그리고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아내는 고기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남편의 접근마저 거부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의 태도에 대해 남편인 '나'의 반응은 "미쳤군. 완전히 맛이 갔어"에서 볼 수 있듯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날 '나'는 회사 사장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갔다가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아내와 더불어 "한묶음으로 경원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채식주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은 "육식은 본능이에요. 채식이란 본능을 거스르는 거죠. 자연스럽지가 않아요"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차별의 근거는 채식주의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혹은 채식주의자는 나와 다르며 그가 고기를 먹는 나의 행위를 혐오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다.

채식주의자가 끼어듦으로써 불편해진 식사 자리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한 사람은 "저는 아직 진짜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징그럽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건, 어찌됐든 육식을 혐오한다는 거 아녜요? 안 그래요?"라고 일행의 동의를 구한다. 결국 아내는 가족들의 회식 자리에서 단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제 아버지에게 봉변을 당한다. 딸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에 분개한 다혈질의 아버지가 제 딸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 것이다.

입속에 강제로 들이민 고기를 다 뱉어낸 아내는 자해함으로써 그 폭력에 대응한다. 어머니는 자상(刺傷)을 입고 입원한 딸에게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야"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말은 네가 먹지 않는다면, 거꾸로 세계가 너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러니 먹어라, 라는 전언을 담고 있다. 왜 사람들이 채식주의에 점점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그 의문은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풀렸다. 어쩌면 뜨거운 악보다 더 무서운 게 제도적으로 저질러지는 '차가운 악(cold evil)'이다.

차가운 악은 그것의 더러움과 흉함을 "과학적 객관성, 기계적 환원주의, 실용주의, 시장 효율성" 등으로 가려 눈속임을 한다. 리프킨은 메마른 문장으로 쇠고기를 둘러싼 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악과 협잡이 이루어지는가를 일러바친다. 쇠고기가 얼마나 많은 호르몬과 살충제로 오염되고, 그 운송과 도축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반생명적인가를, 미국산 쇠고기가 위생적일 것이란 믿음이 얼마나 그릇된 환상이라는 걸 까발리며, 축산업자들이 시장에 대량으로 내놓는 쇠고기가 '차가운 악'임을 단박에 꿰뚫어 말한다.

그리하여 육식을 그만두는 것이 소를 "비육장과 도살장에서의 고통과 모욕"에서, 그리고 "뿔 제거, 거세, 발정 억제, 호르몬 주입, 항생제 과다 복용, 살충제 살포, 자동화된 도살장의 해체 공정에서의 무의미한 죽음"에서 풀어주는 "상징적·실천적 의미를 지닌 인도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리프킨은 육식 문화를 그만두는 것이 인류를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별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열등한 행위다. 채식주의자로 살기로 한 사람들이 육식 문화를 넘어서서 "자신을 원상태로 돌리고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징표이자 혁명적인 행동"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03.30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들

●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창비, 2007)
● 배수아 장편소설 '당나귀들' (이룸, 2005)
●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

/ 2022.09.0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