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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민의 탈출, 미술 왕초보(12) 이름 비슷한 모네와 마네, 가장 뚜렷한 차이는?

푸레택 2022. 8. 24. 00:00

왼쪽부터 끌로드 모네와 에두아르 마네.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는 두 사람을 잘 구분하는 방법은 무얼까?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인상주의를 개척하며 알게 된 뒤로 평생을 가깝게 지냈다.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는 두 사람을 잘 구분하는 방법은 무얼까.

모네와 마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미술을 거부한 점이다.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대에 화가로 성공하려면 파리 ‘살롱전’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인정받던 화풍은 정형화한 틀에 맞추어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꾸민다는 것은 마치 디지털카메라로 색감과 신체비율 등 원하는 모습으로 꾸미는 것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흐름에 맞서 모네와 마네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반 아카데미 화가였다.

그 예로 1865년 마네가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모델을 그대로 꾸밈없이 생생하게 그린 것에 대해 “올랭피아는 목욕해야한다”는 조롱을 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 1863). 1865년 마네가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사진 위키피디아(퍼블릭 도메인)]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1863)’에 영향을 받은 모네, 바자르 시슬리 등은 1874년 전시회를 열었다. 빛을 반영하여 그린 결과 붓질이 고전 기법과는 달라서 ‘밑그림 같다’ ‘그리다 만 것 같다’는 혹평을 받았다. 프랑스 잡지 ‘르 샤리바리’의 기자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의 이름을 인용해 전시회 모든 작품을 본질보다 인상을 그렸다고 조롱을 섞어 ‘인상주의’라 기사화했다. 인상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째, 두 사람은 빛에 대한 관심 정도가 달랐다. 모네는 빛에 대한 인상을 시시각각 반영하여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렸다. 하루에 14점까지 그리기도 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1890년부터 연작을 그려낸다. ‘건초 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 수련 연못’ 등은 하루 빛의 변화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씨를 반영하며 빛을 탐구한 결과다.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의 건초더미(1886)'. 모네는 하루 빛의 변화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씨를 반영하며 빛을 탐구했다. [사진 예르미타시박물관]

반면 인상주의 개척을 도운 ‘인상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는 그리는 순간의 빛의 상태를 반영하는 정도여서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리지는 않았다.

둘째, 두 사람은 관심을 가진 대상이 달랐다. 모네는 실외 그림이었다. 산과 바다, 강, 정원, 들판 등 주로 자연이 소재였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꽃과 함께할 것이다.” “나에게 빛과 대지는 곧 끌림이자 회화의 모든 주제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리며 잠시 머문 도시 생활조차 힘들어했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이 가끔 등장했다. 드물게 마네의 작품과 비슷한 이름으로 모네는 ‘생라자르역(1877)’ ‘풀밭 위의 점심(1865~1866)’을 그렸다. 이 동명의 작품에서도 모네는 빛에 중점을 두어 풍경을 그릴뿐 인물의 표정 등에는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

2017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역(1877)'. 모네는 산과 바다, 강, 정원, 들판 등 주로 자연을 소재로 했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이 가끔 등장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모네와 달리 마네의 관심사는 파리 도시의 변화와 도시에 살아가는 주변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연은 배경일 뿐이어서 대부분 실내에서 그렸다. 마네는 평생 파리 북서쪽에 살며 도시생활을 관찰했다.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조르주외젠 오스만이 현재의 파리 도시로 개발하는 것을 마네는 찬탄하며 바라보았다.

19세기 후반 공원 음악회를 즐기는 도시인의 여가생활을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에, 피크닉을 즐기는 여가생활이 유행해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그렸다.


그는 “루브르에 다녀오며 기관차에 올라보니 곁에 기관사와 소방관이 있었다. 이들은 삶은 고되지만 현대의 영웅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마네는 ‘생라자르역(1874)’을 그린다. 마네는 도시인의 삶을 반영하려 인물의 표정까지 애써 그렸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생라자르역’을 보면서 초상화인지 풍경화인지 혼란스러워했다.

마네는 “나는 이 생활을 사랑한다. 살롱, 소음, 빛, 파티, 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말년에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라는 역작을 남긴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 마네는 살롱, 소음, 빛, 파티 등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말년에 이 작품을 남겼다. [사진 위키피디아(퍼블릭 도메인]

셋째, 쓰는 색이 달랐다. 모네는 빛에 의한 색을 표현하다 보니 검은색을 거의 쓰지 않았고, 마네는 검은색을 즐겨 쓰는 편이었다. 그림자를 표현할 때도 모네는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마네는 검정색으로 표현하는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모네의 그림은 야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이해하기 쉽다.

모네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다. 여신을 그린 신화와 역사화 흐름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태양 빛을 탐색한 업적을 남긴다. 모네와 우정을 나누며 많은 영향을 준 마네는 그가 살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화가였다. 그는 급진적인 미술가로 난해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에서 마네는 고전의 대표작을 차용하여 고전과 현대화의 차이점을 동시대에 명확히 알린 업적으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네와 마네 두 사람은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 세잔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현대미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송민 갤러리32 대표ㅣ중앙일보 2018.10.20

/ 2022.08.2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