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보목리 사람들' '수평선' '서귀포에 와서는' 한기팔

푸레택 2022. 8. 14. 20:10

 

 

■ 서귀포(西歸浦)에 와서는 / 한기팔

서귀포(西歸浦)에 와서는
누구나 한 번은 울어버린다
푸른 바다가 서러워서 울고
하늘이 푸르러서 울어버린다

촉새야 촉새야
소남머리 거벵이 바위틈에 앉아 우는
외짝눈이 촉새야
바람이 불면 어찌하리요
노을이 지면 어찌하리요

물결은 달려오다 무너지며
섬 하나를 밀어올린다
하얀 근심이 이는
날 저문 바다

먼 파도 바라보며 울고
사랑이 그리움만큼
수평선(水平線) 바라보며
울어버린다

○ 한기팔 시인

* 1937년 제주 서귀포 보목 출생
* 1975년 『심상』 1월호에 『원경』 『꽃』 『노을』 등이 박목월 시인 추천으 로 신인상에 당선하여 등단
* 시집으로 『서귀포』 『불을 지피며』 『마라도』 『풀잎소리 서러운 날』 『바람의 초상』 『말과 침묵 사이』 『별의 방목』 『순비기꽃』 『섬,우화』 등이 있고 시선집 『그 바다 숨비소리』 펴냄
* 서귀포시민상, 제주문학상, 문학아카데미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 수평선 / 한기팔

서귀포에서는
어디서나
수평선이 보인다

솔동산 오르막길을 가노라면
수평선이 따라와
내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섶섬과 문섬
범섬과 새섬 사이
지는 해의 온기로 남아 있는,

우성宇城과 소암素菴
광협光協과 성찬成贊
그들이 두고 간 수평선과
정축년丁丑年 류하榴夏 지귀地歸로 와서
보리누름 속에서 '고을나高乙那의 딸'과
술래잡기를 하던 미당未堂과
1974년 가을 세미나에서 돌아와
밤바다에 배를 대고
'밤구름'을 낚던 목월木月과
6.25 때 피난 오면서
황소 한 마리 몰고 와
알자리동산에서 코뚜레를 풀던
중섭仲燮이 데리고 온 수평선

서귀포에서는
어디를 가나
바다는 없고
돌담 너머로
아득히 수평선만 보인다

■ 별의 방목

영혼이 따뜻한 사람은
언제나 창가에
별을 두고 산다

옛 유목민의 후예처럼
하늘의 거대한 풀밭에
별을 방목한다

우리의 영혼은 외로우나
밤마다 별과 더불어
자신의 살아온 한 생을 이야기 한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은
나의 목동이다

연못가에 나와 앉으면
물가를 찾아온 양떼처럼
별들을 몰고 내려와
첨벙거리다 간다

■ 선창

외등(外燈) 하나
외롭게 서 있는 선창이 있다

이따금 지나는
윤선소리에도
부우옇게 울려오는 선창이 있다

아!
이처럼 허전하게 돌아서야 한다면
돌아서서 이처럼 억울한 것이면
묶인 채로 뒤척이는 바다 옆에서
온 밤을 불을 켜는
선창이 있다

■ 자리물회

자리물회가 먹고 싶다.
제주 사투리로
‘아지망 자리물회 하나 줍서’ 하면
눈물이 핑 도는,
가장 고향적이고도 제주적인 음식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톡 쏘는 제피 맛에
구수한 된장을 풀어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여름 날 팽나무 그늘에서
한담을 나누며 먹는 음식
아니면
저녁 한 때 가족들과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먼 마을 불빛이나 바라보며
하루의 평화를 나누는
가장 소박한 음식
인생의 참
뜻을 아는 자만이
그 맛을 안다
한라산 쇠주에
자리물회 한 그릇이면
함부로 외로울 수도 없는
우리 못난이들이야
흥겨워지는 것을

■ 섬, 우화寓話 3(두꺼비)

세상 살면서
울어야 할 일 너무 많다
비가 오면
어머님 무덤 떠내려간다고
울고,

바람이 불면
아버님 무덤가에
산나리꽃 진다고
운다

가랑잎 하나
물그림자에 얼씬거려도
울고,

물장오리* 물웅덩이에
별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물달개비 꽃그늘에 몸을 감추고 앉아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먼 산 바라보고,

괙괙 북북
북북 괙괙…

세상 살면서
지은 죄 많다고
울고,

빚 갚을 일 많다고
울어버린다

*물장오리 : 제주 섬을 창조한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한라산 늪지

■ 미악산米岳山 안개꽃(4.3이후)

심심하면
바람과 논다

구름을 불러
구름의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안개꽃 자욱이 피어
때때로 바람이 와서
깃털 같은 작은 흔들림 하나
세워놓고 가면

저녁 햇살이 켜 드는
초록별 아래
미악산 서쪽
까마귀 울음소리 벼랑을 깨니

오늘은
어찌하여
산짐승의 생피 냄새가
그리운 것이냐

■ 보목리(甫木里)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사는 맛나게 사는 거 있지
이 나라의 남끝동
보목리甫木里 사람들은 그걸 안다

보오보오
물오리 떼 사뿐히 내려앉은
섶섬 그늘
만조 때가 되거든 와서 보게

가장 큰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 있고
이 시대時代의 양심良心인 양
아무 말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

다만 눈으로만 살아가는
이웃들끼리
먼 바다의 물빛
하늘 한쪽의 푸른빛 키우며
키우며 마음에 등燈을 켜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사는 맛나게 사는 거 보려거든
이 나라의 남끝동
보목리甫木里에 와서 보면 그걸 안다

/ 2022.08.14 제주 월정리에서 옮겨 적음

[사진 촬영] 제주 서귀포에서 2022.08.13

https://youtu.be/MjCgI0xAOMQ

https://youtu.be/vFF2KkW6pLY

https://youtu.be/8hiQao02pbE

https://youtu.be/ItIhxYSU9Ys

https://youtu.be/qf6ivDdT0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