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지가 않어" 명랑한 노년으로 사는 법 (daum.net)
ㅣ나이 60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30대, 40대, 50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정경아 기자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후배들에게 가끔 받는 질문이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나도 젊었던 시절엔 그것이 알고 싶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 60 넘어 즐거울 일이 도대체 있기나 할까, 의심했었다.
현재 60대 싱글로 독립 7개월 차. 4인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서울, 대구, 평택에 각각 1인 가구가 된 결과다. 돌이켜 보면, 결혼은 두 사람이 결합한 것이라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 즉 홀로서기는 아니었다. 태어난 지 65년 후 은발을 휘날리며 마침내 쟁취한 독립! 개인사를 통틀어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가?
주민등록상 1인 가구가 된 2021년 후반은 코로나19 집단감염이 가속화되던 때다. 나홀로 집밥에 익숙해지며 새삼 인정했다. 나는 결혼한 독신주의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혼자라는 게 오래 입어 온 옷처럼 딱 맞았다. 30대부터 맞벌이 롱디(장거리) 결혼 상태가 오래 지속됐지만, 내겐 아이들이 떠난 후 진정한 싱글 라이프 시대가 열렸던 거다. 최근 부쩍 늘어난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 클럽 회원이 된 거랄까.
대구 어느 골짜기에서 신나게 자연인 놀이 중인 남편을 '방문'하는 일은 빼놓지 않는다. 그동안 독립한 30대 딸과 아들에게 적용하던 '최소 개입 원칙'을 드디어 남편에게도 확대 적용하고 있다. '가장'이라는 경제적, 심리적 책임의무로부터 해방된 노년을 누릴 자유를 십분 존중하고 싶어서다.
그 결과 나도 온전히 나를 위해 사는 시간부자의 신분을 얻은 셈. 이건 결혼하지 않은 30대 딸과 아들 덕분이기도 하다. 친구들처럼 관절염에 걸려가며 황혼육아에 불꽃 모성애를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혼자 잘 노는 능력이 노년기를 결정한다
아침형 인간답게 일찍 일어난다. 밤비 내린 아침엔 눈을 뜨자마자 동네를 걷는다. 일찍 문 여는 빵집 앞을 일부러 지나며 코를 킁킁댄다. 때로는 빵집 문을 밀고 들어가 잉글리시 머핀에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빵 굽는 냄새와 커피 향기는 새 날을 축하하기에 딱 좋은 모닝 리츄얼!
동네 공원의 메타 세콰이어 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이렇게 멋진 길을 내준 구청 공무원들과 공사 관계자들이 고맙다. 세금 때문에 미워했던 구청이 덜 미워지는 순간이다.
아침 햇발에 초여름의 나뭇잎들이 반짝인다. 어릴 적 노래가 떠오른다. "햇빛은 나뭇잎 새로 반짝이며 우리들의 노래는 즐겁다." 바로 이것이다. 밋밋한 풍경에 담긴 완벽한 한 순간을 무심한 듯 절묘하게 포착해 내다니. 노랫말을 쓴 이는 아마도 뭔가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오전 일과 중엔 중국어 복습과 예습 30분이 들어있다. 치매 예방 활동으로 시작한 지 6년 째, 소리 내어 중국어 교본을 읽고 듣고 써본다. 유튜브로 짤막한 공짜 중국어 강의도 듣는다. 공부라기엔 놀이에 가깝다. 일주일에 한 번은 딸의 텃밭에 물 주러 간다. 그 외엔 우쿨렐레든 춤이든, 하고 싶은 것만 해도 좋은 이 나이, 진짜 근사하다. 진정한 자기주도형 학습을 가능케 한 건 결국 나이였다는 이야기?
주위의 70대 선배들을 관찰하며 알게 된 게 있다. 혼자 잘 노는 능력이 노년기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사실. 집의 꽃밭을 꽃과 채소를 섞어 키우는 키친 가든으로 바꾼 한 선배는 요즘 단톡방에 채소와 나무 이야기만 올린다.
수국 색깔을 보라로 바꾸는 방법이나 장미 삽목 시기, 냉동실의 묵은 도라지 씨앗에 검은 비닐을 씌워 발아시킨 성공담까지. 거의 날마다 흥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가드닝 이야말로 신대륙 발견이라는 그녀.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심심할 틈이 없이 명랑한 자기몰입형 인간이다.
느닷없이 목공 클래스에 등록하더니 직접 깍은 숟가락이랑 도마를 보내오는 친구가 있다. 한달살기로 간 강릉에 반해 아예 작은 집을 사서 이사하는 바람에 강릉 영주권자가 돼버린 친구도 있다. '국영수'로 인생 전반부를 살아온 인생들이 인생 후반부의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는 모습, 은근 사랑스럽다.
점심, 저녁 약속이 많다고, 갈 곳이 너무 많아 바빠 죽겠다는 친구들도 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더니, 내가 딱 그렇지 뭐냐." 시들지 않는 인기를 뽐낸다. 퇴직 후에도 일상을 꽉꽉 채워 살아야 뿌듯한 이들이다.
나는 좀 느슨하고 게으른 편을 택한다. 누군가를 의무 비슷한 감정으로 만날 필요가 없는 날들이 편안하다. 바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내 능력을 증명해 보이거나 경쟁하지 않아도 된 나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자신을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내겐 진짜 자유다.
삶의 끝까지 가볼까? 내 목표는 완주다
낡아가는 몸은 이곳저곳 신호를 보낸다. 십년 전 인대 파열을 겪은 오른 발, 올해 들어 조금씩 통증이 도지고 있다. 오른쪽 무릎도 뭔가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너무 많이 걷지 말라는 메시지일까? 하지만 걷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다. 겁이 난다.
'내 발로 걷는 인간'으로 사는 하루하루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존엄은 "내 발로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는, 딱 그때까지만"이란 말, 갈수록 실감한다.
신체 능력의 저하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우선 겸손해진다. 내 경우, 시력이 나빠지고 잇몸이 흔들리고 근육감소증까지 진행되고 있으니, 도무지 잘난 척을 할 수 없다. 오래 살수록 암에 걸릴 확률도 늘어난다지. 노화가 없다면 나를 포함한 인간들은 겸손해질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인생의 우선순위가 자동 재조정된다. 한때 엄청 중요했던 것들이 하찮아진다. 스타일리시한 브랜드 정장이나 가죽가방을 갖고 싶어 했던 젊은 날들은 거의 전생처럼 아득하다. 편한 티셔츠 두서너 장이면 한 해가 너끈해졌다. 무거운 가죽가방을 집어 던지게 만든 건 오십견 통증이었다. 새끼 발가락에까지 티눈을 박아주던 구두들은 신발장 속에서 고요히 낡아가고 있다. 이젠 컴포트화 외에 신을 수 있는 게 없다.
최첨단 새 아파트, 값비싼 차나 두둑한 은행 잔고도 예전만큼 부럽지 않다. 뭔가를 더 이상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줄어든 때문이다. 이제 내겐 함께 밥을 먹고, 영화와 치맥을 하고, 여행을 같이 갈 친구 몇몇이 더 중요하다.
좋은 책을 돌려 읽자는 독서광 친구가 있어서 나는 러시아 역사를 읽고 시집을 읽고 연암 박지원을 읽는다. 취향 공동체인 친구들은 OTT 영화랑 다큐 서로 추천하기 서비스 제공자가 돼 즐거운 수다의 물꼬를 튼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음식을 곧잘 보내주는 친구들이 있다. 김장철엔 전라도 친정집 김치와 경상도 시댁 김치를 나눠 먹는 연례 김치 파티까지 등장한다. 홈 메이드 비건 커리나 샐러드, 그리고 물김치, 열무김치, 오디쨈, 오이지 등 온갖 친구표 밑반찬이 문자 알림과 함께 현관 배송된다. 나눠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네 인맥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더 든든하다.
내 삶은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격렬한 60년을 살고 난 후 일종의 절전 모드로 접어든 느낌. 덜 쓰되 잘 먹고 잘 자기, 많이 웃고 틈틈이 걷기가 요즘 주요 일과다.
덕분에 이른 봄 연두 새싹이 솟아나고, 진달래 꽃봉오리에 갇혀있던 꽃잎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숨죽이며 들여다본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젊은 엄마들의 웃음소리가 갈수록 흐뭇하다. 우리 동네 아이들 모두가 "태어나서 참 좋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내 목표는 완주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당분간 계속될 삶의 여정을 끝까지 가보는 거다. 그러려면 "Travel Light!" 봇짐은 가볍게 꾸리는 게 맞다. 물론 제 아무리 호탕하게 출발한들 어느 시점부터 고독과 질병의 연대기로 바뀔 가능성이 더 크겠지. 갈수록 예측이 불가능한 게 노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으로, 최대한 명랑하게 노년 탐사는 쭉 계속될 것이다.
정경아 기자ㅣ오마이뉴스 2022.06.16
/ 2022.07.0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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