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불멸의 꿈 (daum.net)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불멸의 꿈 /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혈액 도핑을 아는가? 이 행위는 승리를 바라는 운동선수가 자신의 혈관에서 일정량의 피를 뽑았다가 몇 주 뒤 수혈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줄어든 혈구를 벌충하고자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hematopoietic stem cell)가 부지런히 소임을 다하면 혈구의 수는 머잖아 정상으로 회복된다. 이때 자가 수혈로 적혈구 수가 늘면 운동 능력이 최대 20%까지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사이클 영웅 루이 암스트롱도 이런 수법을 썼다. 지금은 시합 전후 적혈구 수를 분석함으로써 이런 불법적인 일도 여지없이 적발해낸다.
젊은 쥐의 혈액을 늙은 생쥐에게 수혈함으로써 신경세포 재생을 촉진하여 학습과 기억력을 높이고 간의 재생을 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곤 한다. 그렇다면 경기에서 이기거나 아프지 않은 채 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왜 혈액에 주목하는 걸까? 아마도 피는 쉽게 밖으로 빼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빼낼 수 있다면 집어넣는 방법도 등장하게 마련이다. 로마 시대인들은 그 당시에 이미 피스톤 형태의 주사기로 약물을 투입했다고 한다. 1853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의사 알렉산더 우드와 샤를 가브리엘 프라바츠는 현대적인 모습의 주사기를 발명했다. 약물이건 혈액이건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혈액을 이루는 세포를 만드는 데 줄기세포가 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의 줄기세포에서 비롯했다. 서로 다른 유전 정보를 가진 두 세포가 융합된 수정란이 바로 그것이다. 수정란이 여러 번 분열하면 일부는 운명적으로 조혈모세포가 된다. 수정란만큼은 아닐지라도 조혈모세포도 혈액을 구성하는 상당히 여러 종류의 세포로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혈액에는 어떤 세포들이 있을까?
우선 적혈구가 있다. 최신 분석에 따르면 적혈구 수는 약 26조개로 전체 세포의 70%에 이른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온몸에 산소를 운반하는 일의 엄중함이 새삼스럽다. 그다음은 혈소판이다. 약 4조개의 혈소판은 손상된 혈관을 땜질한다. 합쳐 8할에 이르는 두 세포는 그야말로 세포계의 ‘거물’이다. 적혈구와 혈소판이 무탈해야 인간도 건강해진다. 게다가 혈액에는 내 안의 ‘남’을 탐지하고 맞서 싸우는 면역계 세포들도 건재하다. 이들은 가능하면 다양한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발견해야 한다. 면역세포의 특성이 ‘다양함’에 있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혈모세포는 가짓수가 많을수록 좋다.
혈구 줄기세포의 다양성을 언급하는 연구 결과는 일찍부터 나왔다. 2004년 미국 국립 노화연구소 리처드 우드맨은 65세가 넘은 노인층에서 빈혈 환자 빈도수가 급작스레 늘어난다고 보고했다. 적혈구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수치가 줄어든 탓이 컸다. 과학자들은 골수에서 어떤 줄기세포 집단의 수가 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적은 양의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돌연변이를 가졌으리라 추정했다. 유전자에 문제가 생긴 특정한 줄기세포들이 득세하면 자연히 에너지와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줄기세포가 타격을 입게 된다. 줄기세포가 암으로 변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보고되었다.
적혈구의 수명은 긴 편이어서 120일 정도지만 혈소판은 일주일 남짓이다. 줄기세포가 분열하면서 여러 차례 유전 정보를 대물림하다 보면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조혈모세포는 종류가 다양하다. 적혈구를 만드는 줄기세포도 그렇다. 세포 분열이 거듭될수록(나이가 든다로 읽는다) 돌연변이가 축적되면서 특정 세포 집단의 크기가 커지는 일이 발생한다. 불균등한 세포 대물림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2022년 4월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피터 캠벨 연구진은 먼저 혈구를 만드는 줄기세포 가짓수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탯줄 혈액과 골수 또는 혈액에서 얻은 줄기세포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이들 세포종(種)은 배아 발생 과정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며 2만~20만개에 이른다. 예상을 뛰어넘는 큰 값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이 75세가 넘으면 그 수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고작 12~18개에 불과해진다. 이들 세포는 40세 이전부터 시나브로 돌연변이를 축적했다. 긴 세월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세포들이 마침내 마각을 드러낸다. 늙음은 으레 그렇게 다가온다. 조혈모세포가 불멸을 꿈꾸며 다양성을 좀먹는 동안 인간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짙게 드리워진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ㅣ경향신문 202.06.16
/ 2022.07.15 옮겨 적음
'[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봉화 우구치리 철쭉 (0) | 2022.07.15 |
---|---|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땀은 송골송골 (0) | 2022.07.15 |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우리 엄마 젖을 다오 (0) | 2022.07.15 |
[나무와 꽃이 있는 창] 나무 세상 (0) | 2022.07.11 |
[숨&결] 샅샅이 조사해야 해법도 나온다 (0) | 2022.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