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세상의 '마찰' 보며, 떠올리는 미래의 폭주 (daum.net)
자연에는 딱 네 종류의 상호작용이 있다. 해 주위를 도는 지구의 운동은 중력이 만들고, 겨울날 차문 손잡이의 짜릿함은 전자기력 때문이다. 서로를 강하게 밀치는 전자기력을 이기고 양성자 여럿이 오밀조밀 원자핵 안에 모여 있을 수 있는 것은 강한 핵력 덕분이다. 강한 핵력이 없다면 원자핵도, 원자도, 세상의 온갖 물질도, 그리고 나도 없다. 한편, 약한 핵력은 원자핵을 다른 원자핵으로 바꾸는 과정에 관여한다. 수소가 만나 헬륨으로 바뀌는 태양의 핵융합도 약한 핵력으로 가능하다. 초여름 따가운 햇볕은 약한 핵력이 만든다.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내 작은 팔심이 지구의 중력을 이기고 있다. 넷 중 가장 약한 것이 중력이고 그다음 약한 것이 약한 핵력이다. 중력은 우리 모두의 소중한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묶어두어 온갖 생명을 가능케 하고, 태양빛을 만들어내는 약한 핵력은 지구 위 모든 생명의 에너지의 근원이다. 약하고 여린 것이 지구 위 모든 삶의 바탕이다.
큰 것들에서 눈을 돌려 책상 위 커피 잔을 바라본다. 우리 사는 세상은 중간계다. 천체보다는 무척 작고, 원자보다는 무척 큰 세상이다. 둘 모두 ‘핵’자 돌림인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은 원자핵 크기 정도의 짧은 거리에서만 등장해 우리 사는 중간계에서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중력으로 보면 너무 작고, 핵력으로 보면 너무 큰 세상이 우리가 매일 만나는 세상의 거의 전부다.
사랑에 빠진 둘은 서로를 매력적(attractive)이라고 느낀다. 서로를 더 가깝게 하는 끄는 힘(인력, attractive force)이 작용하는 셈이다. 매력(魅力)이 인력(引力)으로 작용하는 끌림의 근원을 넷 중 하나에서 굳이 고르면 전자기력이다. 당신의 모습은 전자기력을 매개하는 빛알의 형태로 내 눈 망막 시세포에 닿고, 전기적인 신경 신호로 바뀌어 내 뒤통수 쪽 시각 중추에 도달한다. 다시 뇌의 곳곳으로 전달되어 여러 신경세포의 전기적인 발화 패턴의 모습으로 감정과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과정을 과학이 속속들이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첫눈에 반했다면 전자기력에 감사할 일이다.
바둑판 위 바둑알을 손가락으로 살짝 치면 마찰력이 있어 곧 멈춘다. 마찰력의 근원도 전자기력이다. 바둑판은 너무 작아 중력일 리 없고, 너무 커서 핵력일 리도 없다.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로 이루어진다. 두 원자가 가까워지면 한쪽 원자의 전자는 다른 쪽 원자의 전자를 좀 더 먼 쪽으로 밀어낸다. 첫 번째 원자의 전자는 전하 분포가 바뀐 두 번째 원자의 양의 전하량을 띤 부분과 더 가깝게 되고, 결국 중성 원자 사이에도 서로 잡아끄는 전기력이 발생해 마찰력으로 작용한다. 바둑판의 한 원자는 바둑알의 한 원자를 따라가다가 결국 포기하게 된다. 계속 가고 싶어도 주변 다른 원자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위치에서 벗어날수록 다른 원자가 만든 전기력이 커져서 이 원자는 결국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원자가 방향을 왼쪽으로 바꿔 움직이면 처음 위치를 지나치게 된다. 작은 원자도 질량이 0이 아니어서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원자는 처음의 평형 위치 주변을 진동하게 되고, 바둑판의 다른 원자들에게도 떨림을 전달한다. 처음 운동에너지는 결국 바둑알과 바둑판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마구잡이 떨림이 가진 운동에너지로 변해 온도를 높인다. 마찰이 멈춰도 떨림은 남는다.
물체가 마찰력으로 멈추고 나면 양쪽 모두는 더 뜨거워진다. 강한 마찰을 이어가 온도가 계속 오르면,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가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는 자연발화가 시작된다. 연소반응 전 분자들의 에너지가 반응 후 에너지보다 크고, 둘의 에너지 차이는 열의 형태로 주변에 전달되어 다음의 연소반응을 이끌어낸다. 모든 발화는 자연발화이고 모든 연소는 연쇄 반응이다.
계속되는 마찰은 온도를 올리고 발화점을 넘기면 불이 붙어 재를 남긴다. 마찰이 있다고 늘 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알을 가만히 두고 바둑판을 살짝 기울이면, 마찰력으로 바둑알은 미끄러지지 않고 열도 발생하지 않는다.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의 마찰력이 정지 마찰력이다. 외부의 힘이 마찰력을 넘기면 물체는 가속을 시작한다. 어지러운 세상의 온갖 마찰을 보며 미래의 폭주를 떠올린다. 계속되는 강한 마찰로 더 뜨거워지는 세상과 결국 발화해 남겨질 잿더미를 걱정한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ㅣ경향신문 2022.06.23
/ 2022.06.2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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