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430인 행주의병 걷기대회] (1) 임진왜란 행주대첩 의병이 되어 행주역사누리길을 걷다

푸레택 2022. 6. 11. 20:48

행주산성 수변누리길에서
430 행주의병 걷기대회 출범식

[430인 행주 의병 걷기대회] 임진왜란 행주대첩 의병이 되어 행주역사누리길을 걷다

일시: 2022.06.11(토) 09:00~10:40
집결시각: 08:40
집결지: 경의중앙선 행신역 
종착지: 행주산성역사공원 개막공연
공연행사: 제34회 고양행주문화제 개막식 다시, 우리! 여기, 행주!” 개막공연 특설무대

걷기코스: 경의중앙선 행신역(고양시)~강매교~봉대산~강매석교~한강수변길~행주산성역사공원 (행주역사누리길 6km)


오늘은 고양시걷기연맹이 주최하는 430인 행주의병 걷기대회에 참가하여 행주역사누리길 6km를 걸었다. 하늘은 쾌청하고 공기는 그지없이 맑다. 초여름 유월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싱그러운 수목이 우거진 산길을 걷고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니 몸도 마음도 절로 평화롭다. 2022년 올해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30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 시민 430명이 모여 행주역사누리길을 걸으며 행주대첩의 의미를 되새겼다.

행주누리길 안내 지도

우리나라 3대 대첩으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꼽는다. 조선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는 1592년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같은 해 10월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그리고 이듬해 2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일컫는다.

다음은 《다음백과》에 소개된 ‘임진왜란’에 관한 글이다.

430년 전, 1592년 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해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육지의 곳곳에서도 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해 12월 명나라는 4만 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 장군의 조명 연합군에게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고양 행주산성역사공원

오늘은 430인 행주의병 걷기대회에 참가하여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고양 행주산성 누리길을 걸었다. 걷기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음은 《다음백과》의 ‘행주대첩을 발췌한 글이다.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牧使) 권율은 금산군 이치(梨峙, 배재)에서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일본 군대를 무찌르고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그후 명나라의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수원 독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조방장 조경을 시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진지를 물색하도록 하여, 1593년 2월에는 서울 서쪽 20리에 있는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진을 옮겼다.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 처영의 의승군(義僧軍)이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이들은 활·칼·창 외에 화차(火車)·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무기를 만드는 한편, 조총에 대비하여 토제를 쌓고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또한 조도사 변이중은 행주산성과 금천의 중간에서 서울의 적을 견제하며 권율의 부대를 돕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총대장 우키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성을 포위·공격했다. 성 안에 있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수차석포·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행주산성 돌탑 이야기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 마침 충청병사 정걸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우키타·이시다·요시가와 등 일본군 장수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창·칼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권율(權慄, 1537~1599)은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문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무장으로서의 업적이 가장 두드려진다. 그는 전라도(충청남도) 금산의 이치(梨峙) 전투, 수원의 독산성(禿山城) 전투, 그리고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幸州)대첩 등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행주대첩 조각작품

임진왜란 때 민초들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다음은 《위키백과》에 소개된 조선시대 의병에 관한 글이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조직되어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의병이 참여한 유명한 전투로는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등이 있다. 의병은 농민(農民)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忠義) 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향촌(鄕村) 공동체가 향토 방위를 떠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거병한 곳은 영남지역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문천회맹이 군민합동작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 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중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의 조호익·양덕록· 서산대사, 함경도의 정문부, 경기도의 김천일·심대·홍계남,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영천의 권응수,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 김덕령, 황해도의 이정암, 강원도의 사명당 등이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지형지물(地形地物)을 이용한 작전 등 관군의 전투 능력을 강화시켜 의병들은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도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청나라 군의 주요 침공로를 중심으로 크게 저항하였다.

봉대산에서 바라본 풍경
봉대산 행주누리길 조형물

봉대산 정상에 강매동(江梅洞) 해포봉수(醢浦烽燧)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용을 발췌하여 옮겨 적어본다. 해포봉수는 강매동 봉대산에 있던 봉수, 봉수대의 이름으로 봉수는 연기로, 봉화는 불빛으로 전달하는 전통시대의 통신수단이다. 봉대산 정상은 해발 96m로 이곳에서는 일산의 고봉산 및 고양 북한산, 서울 모악산과 관악산, 행주 덕양산, 인천 계양산과 한강을 바라볼 수 있다. 봉수의 남쪽으로는 창릉천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해포봉수는 조선시대 일산 고봉 봉수를 받아 서울 모악 봉수로 전달했다. 해포라는 명칭은 봉수대 아래 강고산 마을 입구 창릉천에 있던 큰 포구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는 당시 봉수대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와파편을 볼 수 있다.

팔각정 초소 전망대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팔각정 초소 전망대이다. 안내판에 새겨진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팔각정 초소 전망대는 민족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는 한강변 철책선의 초소 건물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산물이다. 한강의 강변 철책은 가장 남쪽의 이곳 행주산성에서 파주를 거쳐 임진강 일대로 이어져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철책을 철거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통일과 평화를 상징하는 교육 등의 목적으로 초소 건물을 새롭게 보수하여 전망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곳에서 보이는 한강의 풍광은 인근에서도 유명한데 특히 한강 일몰과 함꼐 비추는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옛 군초소였던 행호정 전망대

행주산성역사공원에는 옛 군 초소를 정비하여 새롭게 태어난 행호정이라고 이름 붙여진 평화의 전망대가 있다. 역시 안내문을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무장공비 침입에 대비해 1970년 설치한 군철책과 군초소, 2008년 군철책선이 철거되면서 방치되어 오다가 민관군이 협력하여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 평화의 전망대로 새로 태어남. 한강의 옛 이름인 행호강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행호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 이제 저와 함께 430인 행주의병 걷기대회’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을 걸어보실까요? 행신역에서 출발하여 행주산성역사공원까지 6km랍니다. 특히 한강을 끼고 걷는 행주산성 수변누리길의 풍광은 정말 가슴 설레도록 멋지고 아름다워요. 수변누리길은 최근 철책선을 걷어내고 평화의 길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한 길이라지요. 

430 행주의병 걷기대회 출범식 후 깃발을 앞세우고 출발!
엄마와 딸이 정답게 손을 잡고 봉대산을 오른다.
행주누리길 봉대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들을 지나고 하천을 건너서
수양버들 그늘에서 낮잠 자는 자전거
강매동 창릉천 푸른숲길을 지나고
강매동 석교를 지나 평화의 길을 걸어가면
멋진 방화대교가 눈앞에 나타난다.
고양행주문화제가 열리는 행주산성역사공원을 향하여
미국자리공과 방화대교
행주산성수변누리길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다
평화는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쉬엄쉬엄 천천히 쉬어가면서 걸어요.
군철책선을 걷어내고 만든 평화의 행주산성역사누리길
무엇이 그리워서일까, 나뭇가지를 강물로 뻗은 노송
팔각정 초소 전망대
고양행주문화제 개막식 준비 모습
병사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싸우고 있는 민초 백성들, 무거운 돌을 나르는 아낙네들 그리고 존재감을 뿜어내는 권율 장군.
행호정(군초소).
전국지방자치제 243곳을 상징하는 통일염원 바람개비 243개가 자연의 순리대로 사이좋게 움직이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국가 / 그 옛날의 빨래터
고양행주산성역사공원
행주산성 돌탑 이야기
고양행주문화제 개막식 축사를 하는 고양시 한준호 국회의원

https://youtu.be/aOGLjqyoa7o

https://youtu.be/-qbt2ngcKik

https://youtu.be/W5hnJDbzEp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