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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 김용준

푸레택 2022. 6. 6. 18:34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 / 김용준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老柿山房)이라 한 것은 삼사 년 전에 이(李) 군이 지어 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 군이 일러 노시사(老柿舍)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하기는 그후 시관(時觀)과 같이 주안(酒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던 끝에 시관의 말이, 노시산방이라기 보다는 고시산방(古柿山房)이라 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여 잠깐 내 집 이름을 다시 한번 찝어 본 일도 있기는 하다. 푸른 이끼가 낀 늙은 감나무를 노시(老柿)라 하기보다는 고시(古柿)라 함이 창(唱)으로 보든지 글자가 주는 애착성으로 보든지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요, 노시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속되어 보일 뿐 아니라 젊은 사람이 어쩐지 늙은 체하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재미가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역시 고(古)자를 붙이는 골동 취미보다는 노(老) 자의 순수한 맛이 한결 내 호기심을 이끌었던 것이다.

원래 나는 노경(老境)이란 경지를 퍽 좋아한다. 기법상 술어(術語)로 쓰는 노련(老練)이란 말도 내가 항상 사랑해 온 말이거니와, 철학자로 치면 누구보다도 노자(老子)를 좋아했고, 아호로서도 나이 많아지고 수법이 원숙해진 분들이 흔히 노(老) 자를 붙여서, 가령 노석도인(老石道人)이라 한다든지 자하노인(紫霞老人)이라 하는 것을 볼 때는 진실로 무엇으로써도 비유하기 어려운 유장하고 함축(含蓄) 있는 맛을 느끼게 된다. 노인이 자칭 왈 노(老)라 하는 데는 조금도 어색해 보이거나 과장해 보이는 법이 없고, 오히려 겸양하고 넉넉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는 노시산방을 무슨 노경을 사랑한다 하여 바로 나 자신이 노경에 든 행세를 하려 함이 아니요, 그저 턱없이 노(老) 자가 좋고 또 노시(老柿)가 있고 하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데 불과함이요, 또 가다가는 호(號)까지도 노시산인(老柿山人)이라 해 본 적도 있었다.

한번은 초대면하게 된 어느 친구가 인사를 건넨 뒤 놀라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나를 적어도 한 사오십은 넘은 사람으로 상상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노시산인이란 호를 쓴 것을 본 때문은 아니요, 집 이름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을 간혹 들은 것만으로 그 집 주인은 으레 늙수그레한 사람이려니 하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 처음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생각됨직도 한 일이라 싶었다.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茅屋)을 노시산방이라 불러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무슨 화초 무슨 수목이 좋지 않은 것이 있으리요마는 유독 내가 감나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놈의 모습이 아무런 조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때문이다. 나무 껍질이 부드럽고 원초적인 것도 한 특징이요, 잎이 원활하고 점잖은 것도 한 특징이며, 꽃이 초롱같이 예쁜 것이며, 가지마다 좋은 열매가 맺는 것과, 단풍이 구수하게 드는 것과, 낙엽이 애상적으로 지는 것과, 여름에는 그늘이 그에 덮을 나위 없고, 겨울에는 까막까치로 하여금 시흥(詩興)을 돋우게 하는 것이며, 그야말로 화조(花朝)와 월석(月夕)에 감나무가 끼어서 풍류를 돋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느 편으로 보아도 고풍스러워 운치 있는 나무는 아마도 감나무가 제일일까 한다.

처음에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의 본을 받아 양류(陽柳)를 많이 심어 볼까 하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너무 짙은 감나무 그늘은 우울한 내 심사를 더 어둡게 할까 저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고 보니 요염한 버들가지보다는 차라리 어수룩한 감나무가 정이 두터워진다.

나는 또 노시산방에 이들 감나무와 함께 조화를 시켜야 할 여러 가지 나무와 화초를 심기에 한동안은 게으르지 않았다. 우선 나무로서는 대추며 밤이며 추리며 벽오동(碧梧桐) 등과, 꽃으로는 목련, 불두(佛頭), 정향(丁香), 모란, 월계, 옥잠, 산다(山茶), 황국, 철쭉 등을 두서없이 심어 놓고, 겨울에는 소위 온실이라 하여 한 평이나 겨우 될락말락한 면적을 사오 척 (尺) 내려 파고 내 손으로 문을 짠다 유리를 끼운다 해서 꼴같잖게 만들어 놓은데다가, 한두 분(盆) 매화와 난초를 넣고 수선을 기르고 하면서 날이 날시금 물을 주기에 세사(世事)의 어찌 됨을 모를 만한 지경이었다. 이렇게 하고 있노라니까 이 모양이나마 우리 산방의 살림을 누가 보면 재미가 나겠다고도 하고, 자기네도 한번 이렇게 살아 보았으면 하며 부러워하는 인사(人士)도 있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의 성질로써 그런 생활이 오래 계속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나는 한두 해를 지나는 동안 어느 여가엔지 뜰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차츰 줄어들고, 필시에는 본바탕의 악성, 태만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던 감나무도 심상해지고, 화초에 풀이 자욱해도 못 본 체하고, 어떤 놈은 물을 얻어먹지 못하여 마르다 못해 배배 꼬이다가 급기야는 곯아 죽는 놈들이 비일비재였건만 그래도 나는 태연해졌다. 대체로 화초란 물건은 이상한 것이어서, 날마다 정신을 써 가면서 들여다볼 적에는 별로 물을 부지런히 주는 법이 없더라도 의기가 충천할 것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놈이, 아무리 비옥한 토질과 규칙적으로 물을 얻어먹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주인에게 벌써 사랑하는 마음이 끊어지고, 되면 되고 말면 말라는 주의로 나가는 데는 제아무리한 독종이라도 배배 꼬이지 않는 놈을 별로 보지 못했다. 화초일망정 아마도 정이 서로 통하지 않는 소이일까.

나의 게으름은 이렇듯이 하여 금년 들어서부터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다시피 했다. 그것은 어느 때고 한 번은 오고야 말 운명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록 게을러서 화초를 거두기에 인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마다 하느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마르다 못해 곯고, 곯다 못해 죽어가던 놈도 철 따라 사풍(斜風)과 세우(細雨)의 덕분으로 밤 동안에 개울물이 풍성하게 내려가고 뿌리 끝마다 물기가 포근히 배 오르면 네 활개를 치듯이 새 기운을 뽐내는 것들인데, 금년에도 역시 나는 설마 비가 오려니 오려니 하고 기다렸더니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는 격으로 장마철을 지난 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또 가고 하여도 비가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산골 개울물이 마르는 것쯤은 또 용혹무괴(容或無怪)이려니와 그 잘 나던 샘물이 마르고 식수가 떨어지고 나중에는 멀쩡한 나뭇잎이 단풍도 들지 않은 채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연달아 밤나무가 죽고 대추나무가 죽고 철쭉이 죽고 하여 평생에 보지 못하던 초목들의 떼송장이 온 마당에 질펀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지 못해 한 지게에 십 전(錢)씩 하는 수돗물이라도 사서 먹는다 치더라도, 그렇다고 그 많은 나무들을 일일이 십 전어치씩 물을 사서 먹일 기력이 내게는 또한 없다. 그러고 보니 점점 초조해지기만 한다. 가지마다 보기 좋게 매달렸던 감들이 한 개 두 개 시름없이 떨어지고, 돌돌 말린 감잎이 애원하듯 내 앞으로 굴러 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보기 좋던 나무 둥치가 한 겹 한 겹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나는 다른 어느 나무보다도 감나무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살고 있다시피 한 이 노시산방의 진짜 주인공이 죽는단 말이 될 말인가. 모든 화초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감나무만은 구해야겠다는 일념에서 매일같이 십 전짜리 물을 서너 지게씩 주기로 했다. 그러나 감나무들은 좀처럼 활기를 보여주지 않은 채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지고 했다. 여느 해 같으면 지금 한창 불타 오르듯 보기 좋게 매달렸어야 할 감들이 금년에는 거의 다 떨어지고 몇 개 남은 놈들조차 패잔병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주인을 못 만난 그 나무들이 명춘(明春)에 다시 씻은 듯 새 움이 돋고 시원한 그늘을 이 노시산방과 산방의 주인을 위해 과연 지어 줄 것인지?

- 기묘 11월 4일 노시산방(老枾山房記)에서

김용준
1904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 출생. 한국화가, 미술평론가, 수필가. 호는 근원(近園).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벽루산인(碧樓山人), 반야초당주인(半野草堂主人), 매정(梅丁) 등 많은 호를 갖고 있다. 중앙고보를 거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했으나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고 동양화로 전향하였다고 함. 1934년 노시산방(성북동 274-1)로 이사하여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교수 역임. 서울대 예술대 학장 역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 전 1950년 9월 월북. 평양미술대학 교수, 미술교육자, 미술사학자로 활동했다. <춤>, <묘향산>, <강냉이>가 있다.


/ 2022.06.0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