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향기] 감나무 그늘 아래서 (g-enews.com)
유월이다. 제대로 봄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든 것이다. 햇빛이 쨍한 한낮이면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을 찾을 만큼 일찍 찾아든 더위가 만만치 않다. 산책길에 햇살을 피해 무심코 초록 그늘로 들어서다가 바닥에 떨어진 꽃을 보고서야 그제야 감나무 밑이란 걸 알아차렸다. 무에 그리 바빠 감꽃이 피는 줄도 몰랐을까.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이에 핑계를 대고 싶지만, 공연히 마음만 분주하여 허둥대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된다.
감꽃은 쉽게 눈에 띄는 꽃은 아니다. 잎이 피기 전 꽃이 먼저 피는 봄꽃나무들과는 달리 먼저 잎이 핀 뒤 5월 중하순 경에 잎겨드랑이에 작은 꽃병 모양의 황백색의 꽃이 달려 핀다. 넓은 진초록의 이파리에 가려 눈여겨보지 않으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나무에서 꽃을 찾기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보고 고개를 들면 그제야 보이는 꽃이 감꽃이다. 햇빛을 받은 감나무 잎은 도톰하고 표면이 매끄러워 햇빛을 받으면 유난히 반들거린다. 잎이 풍성한 감나무 그늘은 여느 나무들보다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 그늘이 얼마나 짙으면 어느 시인은 '함박꽃도 감나무 그늘 밑에 있으면 영원히 꽃이 피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짙푸른 초록 그늘도 일품이지만 정작 감나무가 빛을 발하는 것은 노을빛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늦가을이다. 일찍이 이호우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라고 했지만 내겐 감나무가 서 있으면 어디나 고향 같다. 감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다. 지금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한수 이북에 자리한 내 고향에서도 흔한 수종이 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귀한 나무였다. 그런데도 고향 집 울 안엔 어머니가 아끼시던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붉은 감을 주렁주렁 달고 선 그 감나무는 고향을 떠올릴 때면 어머니와 함께 늘 잡지의 부록처럼 따라오는 흐뭇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감나무는 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과수 중 하나다.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살아온 나무이니만큼 감나무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조선 초에 나온 《향약집성방》에 보면 감나무의 7가지 덕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수명이 길고, 둘째 좋은 그늘을 만들고, 셋째 새가 집을 짓지 않고, 넷째 벌레가 없고, 다섯째 단풍이 아름답고, 여섯째 열매가 먹음직스럽고, 일곱째 낙엽은 거름이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미술평론가 김용준은 수필 <노시산방기>에서 감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나무껍질이 부드럽고 원시적인 것도 한 특징이요, 잎이 원활하고 점잖은 것도 한 특징이며, 꽃이 초롱같이 예쁜 것이며, 가지마다 좋은 열매가 맺는 것과, 단풍이 구수하게 드는 것과, 낙엽이 애상적으로 지는 것과, 여름에는 그늘이 그에 덮을 나위 없고, 겨울에는 까막까치로 하여금 시흥(詩興)을 돋우게 하는 것이며, 그야말로 화조(花朝)와 월석(月夕)에 감나무가 끼어서 풍류를 돋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느 편으로 보아도 고풍스러워 운치 있는 나무는 아마도 감나무가 제일일까 한다"라고.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는 감나무지만 그중에도 가장 으뜸은 자연이 그려낸 수묵화라 일컬어지는 먹감나무의 무늬가 아닐까 싶다. 숯을 닮아 탄시목, 또는 까마귀처럼 검다고 오시목(烏枾木)이라고도 불리던 먹감나무를 손에 넣으면 소목장들은 가장 고급스러운 목가구를 제작했다고 한다. 감을 수확할 때 가지를 꺾어 감을 따는데 그 꺾인 가지의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 생긴 무늬가 바로 먹감나무 무늬이다. 감나무 그늘을 벗어나며 문득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빚는 먹감나무처럼 내 안의 상처들은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을까.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ㅣ글로벌이코노믹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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