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미니픽션] 누군가 머물렀던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 누군가 머물렀던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진만은 한 생활폐기물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예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던 성구 형이 그쪽 업체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진만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간단해. 그냥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 가서 세간 살림 빼고 정리해주고 오면 끝.”
일당은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높았다. 가고 오는 시간까지 계산한 것이라고 했다. “좋잖아. 그래도 봄인데 시골로 나들이 가는 거 같고.”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목련꽃들이 삶은 달걀처럼 빼곡히 허공에 매달려 있는 계절이 와 있었다.
진만이 성구 형과 그날 처음 보는 박씨라는 사람과 함께 1t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광역시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면 소재지였다. 오래된 구옥 20여채가 모여 있는 작은 동네였다. 동네 앞으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양파밭이 펼쳐져 있었고, 뒤론 버석하게 마른 대나무들이 늘어선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오전 10시쯤 도착했는데, 골목길엔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았다. 진만이 오늘 작업할 집은 동네 초입에 위치한 기와집이었다. 대문 바로 옆에 행랑채가 딸려 있고, 슬래브 지붕을 얹은 작은 창고와 텃밭이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 혼자 살다가 돌아가신 집이지. 자식들이 정리하려고 우릴 부른 거고… 봄 되면 이렇게 정리하는 시골집들 많아.”
성구 형이 트럭 뒤에서 포대 자루를 꺼내며 말했다. 진만은 목장갑을 끼면서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텃밭 옆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 씨… 봄나들이 가는 거라더니.
작업은 안방부터 모든 세간살이를 마당으로 빼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한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을 열자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진만은 잠시 숨을 참은 채 안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개장롱이 있고, 작은 텔레비전과 요강이 놓인 방이었다. 벽에는 빛바랜 아이의 유치원 사진과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커다란 증명사진, 그리고 할머니 여러 명이 제주도에 가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불… 누군가 이미 자개장롱에 있던 이불을 방 한가운데로 모조리 꺼내 놓았다.
“여기도 자식들이 이미 다 뒤진 거야. 자기 엄마가 뭐 숨겨놓은 거 없었는지.”
성구 형은 그렇게 말하고 이불들을 발로 휘휘 한쪽으로 몰았다. 박씨는 커다란 장도리를 들고 장롱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진만은 텔레비전과 장롱 문짝을 마당으로 옮겼다. 처음엔 조심조심 내려놓던 것이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그냥 멀찍이서 내던지는 것으로 변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한 번 안 들여다보네?” 진만이 묻자 성구 형 대신 박씨가 대답했다. “이거 벌써 팔린 집이에요.”
박씨 말인즉 요즘 이런 시골집들은 유튜브로 소개되고 바로 거래가 이뤄진다고 했다. 그리고 생활폐기물업체에 연락해 짐을 정리한다는 것. 그런 집들만 골라 다시 싹 인테리어를 바꿔 되파는 업체들도 있다고 했다. 이 동네만 해도 반 이상이 빈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참을 작업하고 있을 때 대문가에 할머니 두 분이 낡은 유모차에 의지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할머니들 때문인지 성구 형도, 박씨도 짐을 내려놓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할머니 한 명이 기어이 성구 형 쪽으로 다가와 “이런 건 돈이 얼마나 드냐”고 묻기도 했다.
작업은 오후 세 시쯤 마무리되었다. 짐을 모두 빼낸 집은 더 작아 보였고, 더 낡아 보였다. 1905년에 지어진 집이라고 했다. 박씨는 그릇들을 정리하다가 놋쇠로 된 밥주발과 공기를 챙겼는데, 돌아오는 트럭 안에서도 그것을 계속 소매로 닦아댔다. 이런 게 잘 닦으면 빈티지가 된다는 말을 했다. 진만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포대 자루 안으로 버린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쓰던 베개를 버리다가 그 안에 담긴 쌀겨가 쏟아져 내렸는데, 거기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한 남자가 학사모를 쓴 채 어머니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누군가 베개도 뜯어본 것 같았는데… 그 사진은 왜 챙기지 않았던 걸까?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어쩐지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진만은 까닭 없이 마음이 불편해 트럭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 두 분이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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