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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위키피디언’이라는 자부심

푸레택 2022. 5. 7. 16:28

'위키피디언'이라는 자부심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daum.net)

 

'위키피디언'이라는 자부심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경향신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분명 한때 그랬다. 서가에 꽂혀 있기만 해도 아우라를 풍겼다. 소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다. 지금도 그런가? 여전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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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위키피디언’이라는 자부심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분명 한때 그랬다. 서가에 꽂혀 있기만 해도 아우라를 풍겼다. 소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다. 지금도 그런가? 여전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만큼이나 낯설다.

《백과전서》가 궁금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엔 어린이는 《컬러 학습대백과》를, 어른은 《두산종합 백과사전》을 들추어보았다. 요즘엔 《백과전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누구나 검색한다. 구글에서 《백과전서》를 검색하면 가장 상단에 위키백과의 《백과전서》 항목이 표시된다. 《백과전서》가 사실은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이라는 긴 제목임을 나는 위키백과를 통해 처음 알았다.

위키백과가 2001년에 등장하고 난 이후, 2012년 브리태니커는 15판을 끝으로 종이 출판을 포기했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17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시작한 《브리태니커》를 집필한다. 《브리태니커》에 기고한 사람은 4000명이 넘는데, 그중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11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막강한 전문가 집단이 모여 만들어내는 《브리태니커》를 위협하는, 아니 이미 압도한 위키백과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그들은 익명의 다수이다. 위키백과는 예를 들면 ‘사용자:Jjw’ ‘사용자:거북이’ ‘사용자:Ryuch’ 등의 아이디로만 알려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의 대중이 스마트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익명의 다수인 그들이 궁금했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정보 역시 위키백과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키피디언(Wikipedian)’ 혹은 위키백과 사용자라 부른다. 위키백과 사용자는 “위키백과에 새로운 항목을 만들거나 기존의 정보를 고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하고 위키백과를 이용하지만, 위키백과의 편집에 참여하는 사람은 전체 인터넷 이용자의 0.25%에 불과한 소수이다. 광고도 없이, 별도의 구독료도 없이 운영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위키백과 사전을 묵묵히 편집하고 또 편집하는 그들의 행동 동기가 궁금했다. 다행히 그들의 이야기를 ‘사용자:Jjw’ ‘사용자:거북이’ ‘사용자:Ryuch’ 혹은 진주완, 정철, 유철이 번갈아 고쳐 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위키백과 사용자가 전문가는 아니다. 그가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실의 전문가이든 아니든 여기서는 모두가 한 명의 위키백과 사용자에 불과하다. 10대 초반부터 위키백과를 알게 되었고 2018년 현재 대학생으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철도 및 교통과 관련된 문서를 주로 편집하고 있는 어떤 위키백과 사용자는 위키백과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밖에서는 어리다고 의견을 내는 것에 많은 제약을 받았는데, 위키백과에서는 나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수 있고 10대부터 80대까지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평가되니까요. 위키백과의 문서가 언론사나 다른 사람의 책, 블로그 등에 인용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한때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던 ‘오타쿠’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시킨 특정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이른바 ‘덕후’이기도 하다. 한때 쓸모 없는 ‘잉여질’이라고 취급되던 ‘덕질’이 시간 낭비가 아님을 이들은 위키백과를 통해 증명한다. ‘덕질’에 ‘덕질’이 더해져 만들어진 위키백과의 어떤 항목은 그 어떤 세계적 석학이라도 단독으로 저술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지식의 범위로 우리를 이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이들이 위키백과에 글을 쓰는 이유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나는 이 글을 쓰면 원고료 명목으로 글과 돈을 맞바꾼다. 물론 약간의 공명심도 기대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돈과 글을 바꾸지 않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들은 돈이 아니라 명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쓰고, 새로운 항목 편집을 통해 자기 만족을 얻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위키백과의 항목을 더 풍성하게 만들면서 지식 공유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획득한다. 고작 돈과 바꾸기 위해 끄적이는 나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이다.

이 글을 전적으로 위키백과에 의존해 작성했으니, 원고료를 받으면 위키백과에 기부해야겠다는 겉보기에 착해보이는 심산으로 위키백과의 메인 페이지에 해당되는 대문에 들어가 오른쪽 상단에 있는 위키백과 후원 버튼을 클릭했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렇게 써 있었다. “금전적 기부가 위키백과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유일한 방법만은 아닙니다.” 돈과 무엇을 바꾸는 오래된 못된 습관에 따라 행동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위키백과를 지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위키백과 편집자가 되어 각자의 능력껏 기여하는 일임을 위키백과를 통해 또 배웠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10.16

/ 2022.05.0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