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허문 편지 두 통 / 김준 종교 칼럼니스트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군과 독일군이 공중전을 하다가 영국 전투기가 독일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겼습니다. 전투기를 격추시킨 영국 공군 장교가 착륙하여 추락한 독일 전투기에 접근해 보니, 전투기는 완파되었고 독일 공군 장교는 피를 흘린채 죽어 있었습니다.
영국 장교는 야릇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 죽은 독일 장교에게서 어떤 비밀스런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그 독일 장교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과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진 뒷면에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라고 적혀 있었고, 어머니의 편지에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구구절절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영국 장교는 그 유품들을 그냥 버릴 수가 없어 주머니에 간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쟁은 끝났지만, 영국 장교는 자신이 격추시킨 전투기에서 죽어간 독일 장교의 생각이 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는 보관하고 있던 독일 장교의 유품인 편지와 사진을 꺼내 보면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몇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와 독일 장교의 어머니를 일치시키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교의 어머니가 자꾸만 자신의 어머니로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러 보았습니다. 어머니 없는 그가 그렇게 속삭이고 나니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가 저 멀리 독일에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독일 장교 어머니에게 자신의 심정을 편지로 써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내는 편지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그 일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강하게 밀려오는 상념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장교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를 다시 보는 순간, 그는 편지를 써야겠다는 강한 뜻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겉봉에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독일 주소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저는 영국의 공군 R 대위입니다. 제가 지난해 공군에 복무하던 중…”
그는 전쟁 중에 발생한 일들과 종전 후에도 계속 잊을 수 없었던 P 대위(죽은 독일 장교)와 그 어머니에 대한 생각, 편지를 쓰게 된 심경을 자세하게 적은 후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습니다.
“…. 제가 차라리 P 대위의 시신이나 유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P 대위와 어머니에게 이토록 심한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지른 불가피한 일이라고는 해도 저는 죽은 P 대위와 어머니로부터 어떤 방법으로든지 속죄를 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 제가 속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P 대위를 대신해서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제 뜻을 어떻게 받아 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원한을 품으실 수도 있고, 저로 인해서 과거의 악몽이 재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시든지 저는 일방적으로라도 어머니의 아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의 이 진심을 받아주셔서, 자격도 없는 이 몸이지만 P 대위 대신 아들로 맞아 주신다면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하고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겠습니다. 어머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달려가 어머님을 뵙고 싶습니다. 늘 강건하시기를 바라오며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어머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영국 공군 R 대위가 독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거의 한 달이 다 된 어느날, 독일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P 대위의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R 대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설레는 기대를 안고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펴보았습니다.
편지의 상단 첫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R에게”
긴장했던 R 대위의 표정이 금세 환해지더니 어느덧 그의 눈시울은 붉어졌습니다. R 대위는 흥분을 진정시키면서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 네 편지를 받고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단다. 그것은 전사한 내 아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기 보다는 너의 그 아름답고 착한 마음이 안겨준 충격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총성이 멎은 후 조용해진 세상처럼 전쟁 중에 희생된 수 많은 전사자들과 그들로 인해서 흐느끼는 가족들의 곡성도 시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서서히 묻혀지는 지금, 네가 보내 준 한 통의 편지는 마치 전사한 내 아들이 다시 부활하여 R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감격이었단다.
때로는 세상이 허무하기도 했고, 때로는 죽은 자식 생각하면서 낙심하고 절망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네 편지를 받고는, 이 세상에는 그 허무함도 그 절망도 다 극복시키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으로 치달을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 있음을 나는 깨닫게 되었단다. 그 힘은 바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나에게 선물한 사람이 바로 너 R 대위로구나!
지금까지 온 세상은 다 나의 고독과 슬픔과 한을 잊고 있는 듯 했는데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위로가 되고, 나와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언덕을 넘어가는 동반자로 느끼게 된 이 나의 심정을 너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주기 바란다.
생각해 보면 너나 죽은 P 대위나 모두 전쟁의 희생자이면서도 또한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장한 젊은이들이 아니었느냐. 높은 파도와 거친 물결이 흉용하는 저 바다라도 그 밑에는 물고기들의 고요한 서식처가 있듯이, 전쟁이 휘몰고온 파도에 휘말렸던 나는 이제 너를 통해서 평온과 안정을 되찾게 되었으니 나는 물론이고 내 아들 P 대위도 천국에서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고맙다. 한없이 고맙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너와 나는 한 개인 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영국과 독일이, 적과 적이, 원수와 원수가 서로 손을 잡고 서로 화해하고 이해하며 평화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평화의 상징으로 남게 될 소중한 만남이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허락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달려오겠다는 네 마음처럼, 나도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너에게 달려가고 싶구나. 약 두어달이 지나면 꽃피는 봄이 오는데, 그때쯤 시간을 내어 너를 만나볼 수 있는 기쁨을 안겨주기 바란다.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더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내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가 상봉하게 될 그날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 독일에서 엄마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명을 유지시킬 모든 자양분을 자연과 만물을 통해 공급해 주십니다. 동시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값지고 소중한 요소를 주셨는데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는 잠재력이기도 합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을 끌어내어 표출시켜 사용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아무리 어두운 이생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즉 가난 속에서도, 질병 속에서도, 탄압과 압제 속에서도,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우고 행복의 열매를 맺어주고 있습니다.
/ 2022.05.05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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