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인물조각보]"다 떨어질 때까지"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다 떨어질 때까지”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패션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부터 알아본다. 패스트 패션으로 만들어진 옷은 즉흥적으로 구매하기에도 부담없는 가격이다. 패스트 패션 매장은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지만 멋내기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 늘 붐빈다. 그런데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소유주는 우리처럼 궁색하지 않다. 자라(ZARA)의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포브스 선정 2018년 세계 부자 순위 6위에 오른 거부다. 이케아(IKEA)와 더불어 스웨덴을 대표하는 패스트 패션 기업 H&M의 옷은 한 시즌 입고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저렴하지만, 그 소유주의 재산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H&M의 소유주 스테판 페르손의 세계 부자 순위는 73위다. 유니클로의 창립자 야나이 다다시는 유니클로가 팔고 있는 소박한 가격의 속옷과는 달리 세계 부자 순위 55위에 오른 195억달러의 자산가다. 우리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매 시즌마다 수없이 사고 미련 없이 버린 패스트 패션 특유의 소비 방식이 반복될수록 그들은 부자가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있다. 각각 다른 상표를 달고 있기에 때로 경쟁관계에 있는 브랜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리, 랭글러, 잔 스포츠, 이스트 팩, 반스 오프 더 월, 노스 페이스, 팀버랜드는 모두 VF라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타미 힐 피거와 캘빈 클라인의 주인도 같고, 갭과 바나나 리퍼블릭도 한 회사다. 세계 부자 순위 4위인 베르나르 아르노와 그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는 브랜드를 싹쓸어 담았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루이비통, 셀린, 겐조, 지방시, 마크 제이콥스, 펜디, DKNY, 불가리, 태그호이어, 헤네시, 모에&상동은 아르노와 그의 가족 소유다. 그들은 페이스북의 창립자 저커버그보다 돈이 더 많다.
패션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은 이것만이 아니다. 매년 생산되는 직물의 65%를 차지하는 폴리에스터는 자연분해되는 데 500년이나 걸린다. 목화 재배지는 전체 농지의 3%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 농약의 10%와 살충제의 22%가 목화 재배지에서 사용된다. 티셔츠 한 장을 염색하려면 16~20ℓ의 물이 필요한데, 염료의 80%만 옷감에 남고 나머지 20%는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의류산업은 여전히 가장 전형적인 저임금 노동착취 공장인 스웨트숍(sweatshop)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버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패스트 패션의 세련된 광고와 라벨 뒤에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스웨트숍이 숨어 있다.
따지지 말고 아무 옷이나 입을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으나, 아무 옷이나 걸치기에는 찜찜한 사람이라면 뭔가 탈출구를 모색해야 한다. 트렌드라는 유령에 의해 누군가가 버려 쓰레기 신세로 전락한 옷을 리메이크해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을 만났다. “이미 존재하던 것을 새롭게 다시 만듦”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스트 오캄’을 운영하고 있는 손헌덕씨다.
그는 데님이라는 소재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데님은 아주 흔한 소재다. 누구나 청바지 한두 벌은 갖고 있다. 데님은 아주 내구성이 강한 소재이기도 하다. 멋을 내려고 일부러 청바지를 찢기도 하지만, 청바지의 자연수명이 다해 저절로 찢어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처럼 내구성이 강한 소재로 만든 청바지를 사용가치가 소진되어서 버리는 사람은 없다. 여전히 입을 수 있는 옷인데도 유행이 바뀌면 우리는 청바지를 버린다. 그는 마치 주술사처럼 유행에 의해 생명 단축이 강요되고 있는 옷에 새 숨을 불어넣는다. 아니 그 옷은 생명만 연장된 게 아니다. 연장된 삶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
리메이크되기 이전 그 옷은 대량생산되고 대량소비되는 흔한 공산품에 불과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그 옷은 세상에서 가장 유니크해진다. 그 옷을 입는 사람까지도 유일한 존재로 변신하기를 기대하며 그는 서울숲길 어느 빌딩의 지하에서 데님과 테일러 원단을 조합해 리메이크 옷을 만들며 시장지향적 패션산업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지 명령을 내리고 있다. 나지막한 중지 명령은 리메이크된 옷의 소비자를 만날 때 힘을 얻을 수 있다.
리메이크된 옷을 소비자가 얼마 동안 입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다 떨어질 때까지 입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자문해봤다. “다 떨어질 때까지” 입은 마지막 옷이 언제였는지? 가장 최근에 버린 옷은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다 떨어질 때까지” 입은 옷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바람처럼 “다 떨어질 때까지” 입어보겠다고 리메이크를 통해 그 어떤 옷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성을 획득한 그가 만든 귀한 옷을 구입했다. 패스트 패션이 지배하는 시대에 리메이크한 옷을 “다 떨어질 때까지” 입는 행위는 과장되게 말하자면 조용하지만 사회운동가가 아니어도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탈시장주의적 라이프스타일 행동이기도 하다. 과격한 구호가 적혀 있는 티셔츠는 아니어도, 리메이크된 옷은 그 자체로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가 리메이크한 이 옷을 “다 떨어질 때까지” 입어보리라. 그래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또 다른 목소리를 보태보리라.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07.17
/ 2022.05.04(수)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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