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인물조각보]에너지 드링크가 필요없는 사회로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에너지 드링크가 필요없는 사회로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어머니는 일회용품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싱크대에는 늘 깨끗하게 닦인 일회용품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일회용품을 반복 사용하면 환경호르몬이 문제될 수 있으니 재활용품으로 쓰레기 처리하자고 하면, 고개는 끄덕이셨지만 정작 일회용품을 버리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나는 1970년대의 고도성장기 동안 유년기를 보냈고, 고도성장의 과실을 이미 20대에 맛봤다. 세대 경험이 극심하게 다르면, 동일한 사물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어머니에게 ‘일회용 그릇’은 어디까지나 ‘그릇’이었지만 나에게 그 그릇은 ‘일회용’이었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삶의 경험이 담겨 있는 가치관은 곧 인생관이다. 그래서 그 가치관은 당사자에게는 생생하고 또한 절실하기도 하다. 가치관에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담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가치관도 달라진다. 부모와 자식의 가치관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함은 누구나 알고 있다. 2017년 기준 15~29세의 실업률은 9.9%에 달한다. 취업의 관문을 뚫기 위해 필요한 스펙도 많기에, 그 스펙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신입사원의 평균연령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6년의 조사에 따르면 신입사원의 평균연령은 남자 29.2세, 여자는 27.9세에 이른다. 마침내 자녀가 취업에 성공하면 뒷바라지했던 부모는 한시름 놓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지 않은 대졸 신입사원이 힘들게 취업한 지 1년 내에 사표를 던진다. 2012년 신입사원의 23%가 입사한 지 1년 안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2014년에는 25%의 신입사원이, 2016년엔 27.7%의 신입사원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
높기만 한 청년실업률이라는 허들을 뛰어넘은 이들이 불과 1년 만에 사표를 제출한다니,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기업 인사담당자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49.1%가 신입사원의 인내심 부족을, 29.8%가 직업의식 부족을 이유라고 답했다(취업포탈 사람인 조사. 경향신문 2017년 8월26일자). 1950년대에 베이비부머로 태어나 고도성장기를 살면서 삶과 회사를 일치시켰던 이른바 ‘회사형 인간’이었던 사람의 눈으로는 사표를 던지는 신입사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평생 이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해요. 왜 그러겠어요. 이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거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사 갔다가 주말 시간을 활용을 잘해야 또 회사에서 경쟁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30년을 살아왔다고. 다들 비슷비슷할 거야.”(《회사인간, 회사를 떠나다》 중)
1950년대생의 자녀인 1970년대생과 1960년대생의 자녀인 1980년대생은 다른 눈으로 회사를 바라본다. 그들은 취업했다 하더라도 회사형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으면 퇴사를 선택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삶을 ‘다운 시프트’하겠다고 제주도로 이민도 간다. 물론 사표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양적으로는 더 많다.
그렇지만 퇴사하는 사람은 일과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세월이 흐르면서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징후이다. 《퇴사하겠습니다》 《퇴사학교》 《직장인 퇴사공부법》 《사표의 이유》 등의 제목이 달린 책은 고도성장기에 회사형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에겐 낯설지만, 그들의 자녀는 이런 류의 책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실제로 퇴사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인사담당자의 해석이 놓치고 있는 맥락이 드러난다. 그들의 말을 들어본다. “그런 거(연봉인상)에 매몰되다 보면 내 일이나 삶에 대한 기대치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지. 그 기준이 생긴다고 했을 때는 더 많이 해야 되거든. 휴일 근무 같은 것도 더 많이 해야 해. 하루 (휴일 근무) 나오면 20만원 나오는데 무조건 해야지. 야근도 웬만하면 다 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는 내 삶이, 그런 일들에 파묻히다 보면 내 삶의 공간들이 더 피폐해지는 거고….”(《사표의 이유》 중)
OECD 통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 사람은 하루 평균 7시간41분 동안 잠을 잔다. 회원국 중에서 가장 수면시간이 적은 나라이다. 회원국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22분이다. 잠은 가장 적게 자는데, 한국 사람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길다. 2016년 회원국은 평균 연간 1763시간 노동했지만, 한국 사람은 2069시간이나 일한다. 독일인의 연간 노동시간은 1363시간에 불과하다. 한국 사람은 독일 사람보다 연간 네 달 이상을 더 일하는 셈이다.
《피로사회》는 제목만으로도 잘 팔릴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장시간 노동 관행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니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피로사회였다. 1950년대생과 1960년대생도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면서 피로사회에서 일했고, 그들의 자녀도 에너지 드링크가 필요한 피로사회라는 동일한 껍데기 속에 있다. 1950년대생과 1960년대생의 한국인들은 과로사를 유발하는 삶이 보편적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겼다면, 그들의 자녀 세대는 에너지 드링크를 더 이상 마시려 하지 않는다. 억지로 그들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권할 수는 없다. 세상은 에너지 드링크가 필요 없는 내일을 원하고 있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06.19
/ 2022.05.04(수)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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