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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2400만개의 ‘학교’

푸레택 2022. 5. 4. 17:34

[노명우의 인물조각보]2400만개의 '학교'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2400만개의 '학교'

[경향신문] 자그마치 2400만명이 넘는다. 2017년 한 해에 해외여행을 떠난 한국인의 숫자이다. 해외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영·유아나 노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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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2400만개의 ‘학교’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자그마치 2400만명이 넘는다. 2017년 한 해에 해외여행을 떠난 한국인의 숫자이다. 해외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영·유아나 노인 인구도 감안하면 2400만명은 인구 대비 엄청난 규모이다.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 숫자로만 따진다면, 한때 국가의 요란한 구호였던 ‘세계화’라는 목표는 이미 초과 달성한 셈이다.

최초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마젤란은 길을 떠나기 전 비장한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럴 법도 하다. 항로를 개척하러 떠났던 배 5척 중 1척이 돌아오지 못하던 시절이다. 배 1척에 수백명의 선원이 올랐다면, 육지에 남아 있는 선원의 가족은 수천명에 이를 수도 있다. 떠나는 배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그 어느 도시보다 많았을 리스본에서 애조 깃든 창법이 특징인 파두가 등장한 건 우연은 아니다.

인천공항의 분위기는 대부분 밝다. 인천공항은 파두가 울려 퍼지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여행 가는 사람 특유의 명랑함이 있다. 여행객이 명랑하면 여행객으로 가득 찬 공항도 덩달아 명랑해진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이 지배하는 마젤란 시대의 항구는 다르다. 대체 돌아올 보장이 없음에도 마젤란 시대 때 사람들은 왜 배를 타고 떠났던 것일까? 비록 5척 중 1척이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만약 돌아오기만 한다면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카지노의 잭팟에 버금갈 일확천금을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항해를 후원했던 스페인 왕궁과 마젤란이 맺은 계약서를 살펴보면 그가 유서까지 쓰고 항해를 떠난 이유를 알 수 있다. 마젤란은 귀환한다면 발견한 나라에서 얻어질 수입의 20분의 1을 자기 몫으로 챙길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6개 이상의 섬을 발견하면 그 섬의 3분의 1인 2개의 섬에 대해 마젤란은 특별권을 갖게
된다. 발견한 모든 육지와 섬에서 마젤란은 귀족 신분과 총독의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그 지위를 자녀에게도 상속할 수 있다. 그래서 마젤란은 유서까지 쓰고 항해를 떠났던 것이다. 마젤란은 그런 셈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저 멀리로 떠났다지만, 대체 한 해 240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는 여행객들이 들고온 가방의 크기와 색만큼이나 제각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 해외여행이란 한국에 대한 불만이 우회되어 ‘헬조선’으로부터의 일시적 탈출로 표현되는 중산층 징후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겐 자식이 보내주는 생애 첫 호강 효도여행일 수도 있다. 가사노동에 지친 어떤 전업주부에게 해외여행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남이 해준 밥”을 삼시 세끼 먹을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퇴근 이후에도 심지어 주말에도 각종 업무 독촉과 지시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해외여행은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당한 구실을 제공해 주는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해외시찰을 구실 삼아 남의 돈으로 편안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해외여행은 자기 지위를 확인하고 헛기침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며, 1년을 꼬박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청춘에게 해외여행은 남들 블로그를 보며 키워왔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 해외여행은 텔레비전에서만 구경했던 리얼리티 쇼와 드라마의 현장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일 것이며, 인생사진을 남겨 인스타그램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파워 여행 블로거의 글에서 읽은 맛집을 반드시 순례하겠다는 투지로 떠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너도나도 다 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장소를 혼자 보며 좋아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묘미를 만끽하는 게 목적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겐 해외여행의 참맛은 다름 아닌 면세품 쇼핑일 수 있고, 어떤 이는 이런 사람들을 경멸할 수도 있다.

지리적으로는 반도이지만,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혀 있는 한국은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섬에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유는 1989년 이전까지는 없었으니, 우리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좋다. 어쨌든 한 해에 2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한국이라는 섬에서 잠시 벗어나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인 김기림은 “세계는/ 나의 학교/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나는 수없는 신기로운 일을 배우는/ 유쾌한 소학생”이라고 했다. 김기림 시를 빌려 표현하자면 한 해 2400만명의 사람들이 지불하는 여행비용은 ‘세계라는 학교’에서 ‘신기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치르는 수업료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해외여행을 통해 자국중심주의를 강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는 혜안을 얻기도 한다.

때로 수업료는 돈가치를 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수업료는 괜한 비용일 수도 있다. 한 해 24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치르는 수업료는 어떤 종류일까? 그리고 나의 수업료는?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01.30

/ 2022.05.04(수)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