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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왜’가 없는 대학, ‘어쩌다’만 양산

푸레택 2022. 5. 4. 20:10

[노명우의 인물조각보]'왜'가 없는 대학, '어쩌다'만 양산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왜'가 없는 대학, '어쩌다'만 양산

[경향신문] 대학 캠퍼스에서 신입생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입시의 부담감에서 막 벗어난 이들은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며 캠퍼스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은 보통 명랑하며 대개 수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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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왜’가 없는 대학, ‘어쩌다’만 양산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대학 캠퍼스에서 신입생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입시의 부담감에서 막 벗어난 이들은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며 캠퍼스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은 보통 명랑하며 대개 수다스럽고 심지어 발걸음도 가볍다. 그리고 단어만큼이나 많은 양의 웃음을 섞어 대화를 한다. 고등학생이라는 처지로 인한 제약에서 이제 막 벗어났으니, 주체할 수 없는 아니 처음 맛보는 해방감에 그럴 법도 하다.

대학교의 행정용어로는 신입생, 하지만 선배들은 새내기라 부르는 그들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무리를 이루며 쉴 새 없이 종알댄다. 고등학생이 더 이상 아니기에 이들의 해방감은 최대치로 상승한 상태이다. 이 시대의 청춘을 엄습하고 있는 취업 걱정은 아직 그들의 것이 아니다. 맞이한 자유로움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 걱정의 시간 차이가 이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나 보다. 이들은 지나치게 행복한 나머지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캠퍼스에서 사소한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도 신입생의 사소한 돌출행동쯤이야 ‘메뚜기도 한철’이라며 충분히 모른 체할 수 있다.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던 신입생들도 불과 몇 년 후에는 세상일에 지쳤는지, 세상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고 싶어서인지 귀에 이어폰 꽂고 모자까지 눌러쓰고 캠퍼스를 홀로 다니는 대변신을 한다.

졸업한 후 소식을 모르던 제자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나도 그리고 졸업생도 마침 모두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살짝 불어난 몸집을 보고 학교 다닐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 하자,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다소 겸연쩍게 대답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고 보니 대학생 시절이 그래도 제일 좋았었다며 요즘 대학은 어떠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학교로 돌아와 18학번이자 새내기이자 신입생이자 아직은 무리지어 다니는 종달새 패거리이기도 한 그들을 만났다. 33명의 신입생에게 대학에 진학한 이유와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를 물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한 지식을 더 많이 쌓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대학 신입생은 아마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이유를 털어놓았다. 어떤 신입생은 ‘어쩌다’ 대학생이라고 답했다. “솔직히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딱히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지금도 내가 대학생이 맞는지 모르겠다.” 입시 면접 상황이었다면 숨겼을 속마음이다. 어떤 신입생은 더 꾸밈없는 대답을 했다. “진정으로 무엇을 탐구하고 배우러 왔다기보단 솔직히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거쳐가는 대로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왔다고 생각한다”고.

이러한 ‘어쩌다’ 대학생 곁에 ‘다 가니까’ 대학생이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학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그러했고, 선생님의 수업 방향 또한 궁극적 목표는 대학 진학이었다.” “남들 가는 대학교 나도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다 가니까 꼭 가야 할 것만 같아서” 대학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에 온 이유가 허무하게도 ‘다 가니까’라는 짧은 표현 속에 담길 수 있는 것이다. “남들 다 가는 거 혼자 안 갈 수 없으니까” 대학에 온 학생 곁에 “모두가 가려고 하니까, 대학을 거치지 않고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필수처럼 여겨지니까” 대학에 온 학생이 있는 꼴이다.


‘어쩌다’와 ‘다 가니까’ 신입생 뒤에 ‘오로지’ 부모가 있다. 중산층 부모는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뒷바라지가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지극정성으로 마련된 ‘오로지’라는 인공적 온실 속에서 ‘어쩌다’와 ‘다 가니까’라는 이유는 무럭무럭 자란다. 마침내 ‘어쩌다’ 혹은 ‘다 가니까’의 이유로 ‘오로지’의 도움을 입었던 이들이 신입생이 되면 차츰차츰 ‘오로지’라는 방어벽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자녀도 부모가 노출되어 있는 고용 불안정성을 알아챈다. 그 순간 부모의 지극정성을 의미하던 ‘오로지’는 되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변한다. ‘어쩌다’ 대학생과 ‘다 가니까’ 대학생이 ‘오로지’ 부모의 고충을 눈치채면 종달새 무리는 흩어진다. 각자의 길을 향하여.

‘어쩌다’와 ‘다 가니까’의 이유로 대학에 온 신입생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대학생이 된 궁극의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그들을 품고 있는 대학은 이유를 찾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아니 사실은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우리의 대학은 애초에 왜 생겼는지, 그리고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어쩌다’ 만들어졌고 ‘어쩌다’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니까. ‘어쩌다’ 지속되고 있는 대학에 ‘어쩌다’와 ‘다 가니까’의 이유로 매해 신입생이 들어온다. 우리의 대학에는 ‘왜’가 없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었는가?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03.27

/ 2022.05.04(수)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