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삶의 지혜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문맹률과 문해율

푸레택 2022. 5. 4. 17:26

[노명우의 인물조각보]문맹률과 문해율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문맹률과 문해율

[경향신문] 러시아에서는 키릴 문자가 사용된다. 키릴 문자를 읽지 못하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키릴 문자 ‘문맹’이었기에 여행지였던 모스크바에서 지하철 탈 때도

news.v.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 문맹률과 문해율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러시아에서는 키릴 문자가 사용된다. 키릴 문자를 읽지 못하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키릴 문자 ‘문맹’이었기에 여행지였던 모스크바에서 지하철 탈 때도 음식 주문할 때도 불편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까막눈’의 답답함과 무기력을 러시아에서 실감했다.

한국은 ‘까막눈’ 즉 문맹의 상태에 처한 사람이 매우 드문 사회라 알려졌다. 통계에 따르면 사실이다. 1945년 한국인 중 78%가 문맹이었는데, 1958년 조사에서 문맹률은 4.1%로 급감했다. 그 1958년 이후 우리는 ‘한국은 사실상 문맹률이 제로에 가깝기에 문맹률 조사 자체가 의미 없는 나라’라고 알고 있다.

이런 믿음이 통념이 되어 세상을 떠돌면 배움의 기회가 없었기에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은 주눅 든다. 자신이 문맹률 제로라는 한국의 신화를 파괴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까막눈’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글을 배우고자 한글학교를 찾아간다. 용기가 작은 기적을 만든다.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글로 표현한다. 글을 깨친 후에야 비로소 기록되기 시작한 인생의 심정이 담긴 책 《보고 시픈 당신에게》를 펼쳤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이제는 ‘까막눈’이 아닌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글을 몰라서 기록하지 못했던 심정이 서툰 글씨로 쓰여 있다. 평생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이 침묵을 뚫고 쏟아져 문장이 된다. 부천시 원미구에 살고 있는 75살 하채영씨는 배우지 못한 평생의 한을 이렇게 표현했다. “죽을똥 살똥 일을 해도 펴지지 않는 살림살이 아침마다 학교가는 옆집 순덕이 숨어서 보며 살았다. 동생 업고 교실 밖 창문 너머로 순덕이 얼굴 선생님 얼굴 몰래 훔쳐보고 돌야 오는 길에 애꿎은 동생 엉덩이만 꼬집었다. 우는 동생 엉덩이를 더 때려주고 언제나 눈물 찔끔. 교실 안에서 공부하는 나. 이제 구경꾼이 아니라 학생이다. 어릴 적 순덕이 처럼 나도 공부하는 학생이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탓할 수 없는 문장이다. 문장의 힘은 문법적 완성도가 아니라 많은 경우 글쓴이의 절실함이 만드니까.

부천시 오정구에 사는 78살 조점순씨는 글을 몰랐기에 겪었던 무기력한 세월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걸 못 배워 멀쩡한 내 두 눈 멀게 하고 멀쩡한 내손 묶어 놓고 멀쩡한 내 입 벙어리인양 가슴 아프게 살아온 세 월, 나의 눈, 손, 입 치료하기 위해 한글교실 입학하여 공부하니 씻은 듯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자기의 심정을 글로 기록하게 되자, 문맹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글쓰기로 인생의 한을 치유한다. 글은 무지에서 비롯된 무기력으로부터 이들을 구원한다.

경솔한 믿음은 섣부른 판단을 부른다. 이제야 한글을 배우는 ‘문맹’의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아주 희귀하다는 믿음은 사실 직시를 방해한다. ‘한강의 기적’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믿음은 한국은 OECD 국가에서 노인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임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자부심은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단순히 문맹 여부가 아니라 글로 쓰인 내용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문해율을 따져보면 우리의 자부심은 산산조각 난다. 문해율 나라 간 비교 조사(1994~1998) 결과는 충격적이다. 한국은 학력과 문해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높지 않은 나라이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보다 월등하게 문해 능력이 높지 않다. 통계상의 학력 수준과 문해율 상승 사이에 연관성이 약하다면 1960년도에 도달한 의무교육 취학률 98%, 현재의 대학 진학률 70%라는 통계 숫자는 뭔가 어색하다. 문해율의 세대별 격차도 매우 크다. 2002년에 발표된 OECD 조사에서 16~24세 연령대의 실질문해율은 22개국 중 3위이지만, 55세에서 65세 사이 한국인의 실질문해율은 조사대상 22개 나라 중 최하위권인 20위이다. ‘까막눈’은 아니지만 문서화된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당수의 성인이 있다는 뜻이다.

문해력은 체력과 유사하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이 필수적이다. 문맹이 사실상 제로인 나라이고, 의무교육 취학률이 100퍼센트에 가깝고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는 나라여도 규칙적인 독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문해력은 시간이 지나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201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학생의 연평균 독서율이 94.9%인데 성인의 독서율은 65.3%에 불과하다. “공부 좀 하라!”고 닦달받을 사람은 사실 학생이 아닌 셈이다. 학생들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누워서 침 뱉는 행동을 그만두려면 사실상 ‘문맹’이 없는 나라라는 믿음부터 버려야 한다.

용기 내어 ‘까막눈’에서 벗어나고자 한글학교를 찾아간 사람뿐만 아니라, 이들을 측은하다 여기며 자신은 공부와 관계없다고 간주하는 사람도 문해력 향상이 필요한 대상자인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 까막눈 탈출은 시작일 뿐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아주 오랜 기간 문맹 탈출이 목적인 줄 알고 살아왔을 뿐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경향신문 2018.01.02

/ 2022.05.04(수)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