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64) / 실비가 큰비 된다-한경용의 '실비가 나를 감다'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64) 실비가 큰비 된다-한경용의 '실비가 나를 감다'
실비가 나를 감다 / 한경용
보슬보슬 실처럼 내리는 비들이
이파리들과 모의하다
나를 감으며 어둡도록 고립시키자고
비슬비슬 나처럼 내리는 비 사이
물먹은 불빛 개척교회 목사님이
부슬부슬 벽보에 붙어 웃고 있다
뽀얀 풍경이 기다리는 안개 속으로
칙칙한 거리, 십자가를 싣고 간다
으슬으슬 후생으로 환승하니
아슬아슬 사다리 타듯 살아온 내게
옥상 위는 접근금지 해제를,
뿌연 안개가 걷히는 종점
마네킹의 가명이 오슬오슬 벗겨진다
한때 페이스북에서 자긍하던
평범 파괴자가 푸슬푸슬 내리니
굴뚝 아래 꽃들이 포슬포슬 마신다
-『시와 사상』(2019년 여름호)
<해설>
이 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보슬보슬, 비슬비슬, 부슬부슬, 으슬으슬, 아슬아슬, 오슬오슬, 푸슬푸슬, 포슬포슬을 어떤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으랴. 이 시의 화자는 인생이 썩 잘 풀린 케이스가 아니다. 개척교사 목사님이 잘나가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글쎄, 내 예측으로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상식 파괴자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평범 파괴자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자신을 빗댄 표현이 아닌가 한다. 세상엔 온통 잘난 사람들밖에 없는 듯하지만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생활인이 아니라 예술가들이다. 소년급제자들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시의 화자는 후줄근히 젖은 몸으로 오늘도 언어의 꽃을 피우고자 한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비에 흠씬 젖은 한경용 시인이 새 시집을 들고 나타날 때, 세상은 그를 괄목상대하리라.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ㅣ뉴스페이퍼 2019.06.17
/ 2022.04.1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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